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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세계를 공유한 두 존재의 애착과 생존
영화 <차이나타운>과 유사가족
인천 차이나타운의 낡은 골목. 이주민들에게 가짜 신분증을 발급해주며 돈을 벌고, 버려진 아이들을 주워와 앵벌이를 시키며, 빚을 갚지 못한 채무자에게는 장기 적출과 밀매를 서슴지 않는 어둠의 세계에 ‘마가흥업’과 그 세계를 관장하는 ‘엄마’ 마우희(김혜수)가 있다. 영화 <차이나타운>(한준희 연출)은 여타 유사한 분위기나 스토리를 가진 영화들이 남성인물중심의 세계로 그려냈던 조직과 범죄, 폭력의 대물림이라는 소재를 여성이 활약하는 이야기로 그려냈다.
그간 남성중심의 어두운 세계에 등장하는 여성배우들은 모성의 담지자이거나 욕망의 객체로 남는 경우가 많았다. <차이나타운>은 조직의 보스로 묵직한 중량감을 유지하는 마우희와, 자신이 놓인 세계에 번민하는 일영, 두 명의 주연 여성캐릭터의 조합을 통해 성별을 바꿔놓는 시도로 생각보다 새로운 것들을 발견할 수도 있음을 상기시킨다.
▲ 한준희 감독, 김혜수, 김고은 주연 영화 <차이나타운>
밥상과 노동을 공유하는 마가흥업의 ‘유사가족’
1996년 인천의 지하철 보관함 ‘10’번에서 버려진 채 발견된 일영(김고은)은 그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존재하거나(1) 존재하지 않거나(0), 그 둘 다 이거나, 둘 중 어느 쪽이어도 상관없는, 증명되지 않은 존재로 자라난다.
차이나타운의 보스로 조직들을 관장하는 우희를 사람들은 ‘엄마’라는 호칭으로 부른다. 일영과 같은 시기에 마가흥업에서 자란 곤, 쏭, 홍주를 비롯해 자기 기반을 만들어 독립한 치도, 그리고 제복을 입은 중년남성들도 우희를 ‘엄마’라고 칭한다. 그녀는 특정한 누군가의 엄마가 아닌 그냥 ‘엄마’이다.
엄마를 중심으로 밥상과 노동을 공유하며 유지되는 이 가족은 일반적인 가족애와는 무관하며 필요와 쓰임이라는, 그 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에 따라 구성된 공동체다. 엄마는 애정으로 돌보고 받아주는 모성적 존재가 아니며, 그 세계의 법칙이 합리적으로 유지되도록 관장하는 관리자의 위치에 서 있다.
영화는 우희의 역사나 감정적인 배경에 대해 묘사하지는 않지만, 그녀 역시 일영과 비슷하게 성장하고 유사한 사건들을 겪으며 지금의 위치에 오른 것이 아닌가 상상하게 된다. 그녀는 스스로의 감정에 거리를 두는 것처럼 일영에게도 그러하고, 자신에게 엄격한 방식대로 일영에게도 엄격한 태도를 요구한다. 어린 일영을 데리고 나온 밤, 골목길에서 죽어가는 개를 발견하고 머물러있는 일영에게 “도와주지 않고 왜 보고만 있니”라며 삽을 들어 개의 목숨을 끊는 에피소드에서 볼 수 있듯, 우희는 일영에게 자신의 세계를 보여주고 동화되게 한다.
▲ 영화에서 '엄마'를 중심으로 밥상과 노동을 공유하며 유지되는 유사가족은 그러나 가족애와는 무관하다.
생존을 건 세계에서 형성된 애착 관계
동업자로, 유사가족으로, 갑과 을의 관계로 유지되던 우희와 일영의 관계에 갈등을 촉발하는 계기는 석현(박보검)의 등장이다. 석현은 비현실적인 밝음을 가진 캐릭터로 아버지에 대한 믿음, 가족과 집에 대한 애착을 가졌다는 점에서 차이나타운의 세계와 대립되는 가치를 추구한다.
일영과 석현의 교감은 다소 부자연스럽고 사건을 만들어내기 위한 작위적인 설정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일영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다만 석현에 대한 애정 때문만은 아니다. 일영은 석현을 통해 ‘다른’ 세계를 접했으며, 이를 계기로 엄마를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욕망을 발견한다.
석현을 마주한 우희는 “니가 얘 흔들었니?”라고 말한 뒤 원칙대로 석현을 처리한다. 우희가 일영의 흔들림을 경계하는 이유는, 일영이 그들의 세계를 유지하기 위한 삶의 태도와는 상반되는 태도와 가치, 믿음에 매혹되었기 때문이다.
원칙대로라면 큰 실수를 저지른 일영 역시 단번에 처리되어야 했겠지만 우희는 차선의 방법을 택한다. 일영의 생존 문제를 두고 예외적인 모습을 보여준 것은 엄마 주변 인물들이 ‘엄마도 한 물 갔다’고 판단하게 되는 근거가 된다. 그런 판단을 감당하고 스스로의 삶의 방식에 균열을 내면서도 우희가 일영을 지키려고 했던 것은, 일영이 자신의 자리에서 살아남는 것이 곧 우희의 생존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희는 여타 ‘정상적인’ 엄마같이 일영을 낳거나 키우지 않았지만, 생존의 문제를 건 세계 위에서 쌓아올린 애착감은 더욱 끈끈할 수밖에 없다.
▲ 한준희 감독, 김혜수, 김고은 주연 영화 <차이나타운>
우희의 자리에 앉아 그녀의 생존을 이어가는 일영
결국 일영은 우희가 일구어 놓은 집으로 돌아오고, 우희의 자리에 앉아 그녀의 생존을 이어간다. 우희가 마지막 순간 건넨 열쇠를 가지고 자신이 태어난 지하철 보관함 ‘10’번을 찾아간 일영은 보관함 안에 우희가 남겨놓은 입양관계 증명서를 발견한다.
우희는 입양이라는 형식을 통해 존재하거나(1) 존재하지 않거나(0), 그 둘 다 이거나, 둘 중 어느 쪽이어도 상관없는 무명의 삶을 살아 온 일영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내어준다. 스물이 넘어서야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게 된 일영은 지하철 락커 앞을 지나가는 보통의 사람들 틈 속에서 고독한 모습으로 엄마를 기억한다.
영화 초반에 누군가 일영과 무슨 관계냐고 묻자 우희가 “워 하이즈(내 아이입니다)”라고 대답한다거나, 일영에게 입양관계 증명서를 남기고, 일영이 제사를 지내며 우희를 기리는, 유사 모녀관계의 애착을 표현한 일련의 장면들을 가지고 우희가 일영의 친모라고 해석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차이나타운>은 오히려 혈연과 무관함에도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로 남게 되는, 결국에는 입양이라는 형식으로 혈연을 대체하게 되는, 한 세계를 공유한 두 존재의 애착과 생존에 관한 이야기다. ▣ 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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