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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날아봐! 길을 잃는 게 뭐 대수냐
<모퉁이에서 책읽기> “단독비행”을 응원하며 
 


 ※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고 읽고 쓰는 사람, 안미선이 삶에 영감을 준 책에 관해 풀어내는 연재. 한국여성민우회 블로그 민우트러블’에도 공동 게재됩니다. ▣ 일다 www.ildaro.com 

 

예전에 우린 몰랐지, 이렇게 어른이 될 줄은

 

고향 친구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제각기 다른 지방에 살며, 딸린 아이들도 있으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기어이 만났다. 설날이었다. 고향에 잠깐 와 있다는 것을 빌미로 모인 것이다. 모인 사람은 세 명이었고 한 명은 시내에서 떨어진 절에 있다고 했다. 망설일 것 없었다.

“절에 가자, 불러내어 같이 밥이라도 먹자!”

 

한 명이 차를 가져와 교외를 거침없이 달렸다. 부산스레 인사를 나누며 서로 살펴본다. 전보다 깡마른 손을 잡아보기도 하고, 급하게 걸치고 나온 태가 역력한 옷매무새도 쓰다듬어본다. 눈가에 주름이 지기 시작하고 지쳐 보이는 얼굴을 마주본다.

 

같이 소풍을 가서 김밥을 나눠먹고, 골방에서 키득거리며 만화책을 읽고, 목걸이를 만들어 목에 걸어주고, 수학여행 때 몰래 내뺄 궁리를 하기도 했다. 더 커서는 연애나 피임 얘기를 은밀히 주고받고, 자취방에서 술 마시고 춤추고, 심야영화관에서 졸다가 노래방에 가서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결혼식 때 가서 축하를 해주었고, 태어난 아기를 보고 신기해했으며, 기막힌 시집살이 이야기에 혀를 찼다. 겉보기에 멀쩡한 그이 남편이 했다는 몰상식한 욕을 전해 듣고 같이 분개했으며, 아파트에서 뛰어내리고 싶다는 친구에게는 국수 한 그릇 사주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에 줄줄이 결혼했고 줄줄이 아이를 낳았고, 올망졸망한 아이들을 끌어안고 해마다 아슬아슬하게 만나 기념사진 한 장씩을 찍었다. 사진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늙어가고 아이들은 조금씩 자라났다.

 

이제 이혼을 한 이도 있고 줄타기를 하듯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친구도 있다. 어릴 때는 미처 몰랐다. 우리가 이런 모습으로 어른이 되어 있을 줄은. 절에 가 마지막 친구 하나를 찾아내 인사하느라 호들갑을 떨었다. 내온 차를 마시며 공양간에서 지난 이야기를 해댔다. 관람을 마친 연극이나 영화 평을 하듯이 지난 일들을 주절거린다.

 

“너, 그때 나보고 결혼하지 말라고 했잖아. 기억 나? 난 그때 지는 결혼해놓고 나보고는 결혼하지 말라고 한다고 뭐라고 했지!”

 “그래서 내가 너한테 그랬지? 난 결혼해봤기 때문에 너한테 말할 수 있는 거라고. 굳이 결혼하려고 애쓰지 말고 너 하고 싶은 거 하라고.”

“그때 네 말이 맞았어. 이혼하고 나니까 네 말이 생각나더라…”

“나도 한참 후에야 이혼했는데 뭐.”

 

한쪽에서는 이런 얄궂은 대화를 나누는가 하면 또,

“야, 그때 너희 커플이 제야의 종소리 들으러 갈 때 내가 따라간 거 기억 나냐? 종소리 들으며 키스하면 영원히 헤어지지 않는다고 둘이 뽀뽀하고 있는데, 사람들한테 치이며 굳이 따라가 구경한 나는 뭐냐?”

“그러게, 이렇게 끝날 줄 모르고.”

“영원한 사랑일 줄 알고!”

 

그 ‘영원한 사랑’이란 말이 왜 그렇게 웃긴지 모두 배를 잡고 웃었다. 눈물을 질금거릴 정도로 웃어댔다. 영원한 사랑이라니!

 

그땐 그랬지. 마당에서 꽃을 줍다가 진흙으로 인형을 만들다가 철 지난 시집을 꺼내 읽다가 기사님이 창 밑에서 공주를 기다린다는 시를 서로 끼적여주고 감탄하다가, 다가오는 남자에게 우리의 멋진 환상을 무턱대고 화환처럼 머리에 씌워주었지.

 

꿈들이 간단없이 찢겨나갈 때, 느낌을 믿기까지 얼마나 많이 망설여야 했는지. 생각이 틀린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될 때까지 얼마나 다쳐야 했는지. 집이라고 믿었던 곳에서 뛰쳐나오기까지 얼마나 용기를 내어야 했는지. ‘이건 사랑이 아니고, 폭력이야.’ 그 말이 낯설어서 얼마나 의심했는지. 자신이 틀렸다고 여기는 순간이 행복했고, 자신이 맞다고 확신하는 것이 가장 두려웠다.

 

우리는 서로의 유일한 목격자였다. 현실의 민낯은 민망스러울 정도로 삭막했지만, 우린 만날 수 있었고 낯설고 지친 모습이었어도 어쨌든 웃을 수도 있었다.

 

“나가자! 너 뭐 먹고 싶어?”

“고기… 맨날 풀만 먹었더니 기력이 딸린다.”

“야, 절에 있는 애가 고기부터 찾냐? 먹자! 고기!”

 

왁자지껄하며 차 시동을 걸고 한 접시에 팔천 원짜리 돈가스 집으로 달려간다. 둘러앉아 시답잖은 이야기를 한다. 넌 지금도 예쁘다, 좋은 사람하고 연애해라, 넌 꼭 작가로 성공해서 돈 많이 벌어라, 넌 지금이라도 전공을 살려 화가가 되면 어떻겠니? 어릴 적 전깃줄 조각으로 네가 만들어준 반지 생각난다, 우리 같이 만들던 지점토 인형은 어떻게 되었더라? 인형 속에 있던 유리병이 깨어져 버렸단다, 난 이제 알았네, 세상에나…

 

그런 두서 없는 이야기를 한다. 한쪽에서는 호출해대는 아이며, 남편 전화에 시간에 쫓기면서도 맞은편에 앉은 친구를 한껏 치켜세워준다. 그리고 잊지 않고 올해도 기념사진을 찍었다. 카메라 앞에서 잠깐 어색해하다가 곧 활짝 함께 웃었다.

 

혼자라는 것이 결코 불행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걸 

 

▲ 캐롤 M. 앤더슨 & 수잔 스튜어트 <단독비행> 원서. <Flying Solo: Single Women in Midlife> 
 

“과거는 바꿀 수 없으므로 우리는 과거에 대한 우리의 사고 방식을 바꾸는 수밖에 없다. 가장 효과 있고 자기 긍정적인 수단은, 과거에 저지른 일과 못다 한 일에 대하여, 용기가 꺾였던 순간들에 대하여, 너무 쉽게 지조를 버렸던 때에 대하여 스스로를 용서하는 것이다.

 

우리는 더러 지금 돌이켜보면 어리석었던 선택을 했다. 일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 남자, 사랑해선 안 될 남자, 심지어 신체적, 정신적인 학대를 가한 남자를 떠나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순전히 시집 못 간 여자가 될 것이 두려워, 또는 아니면 뭘 해야 할지 도대체 몰라서 결혼을 하기도 했다. 과거의 관계와 결혼 생활을 돌아보면 너무 지나친 희생을 했다고, 더 일찍 떠났어야 했다고, 또한 할 도리를 다하지 않았다거나 좀더 참고 견뎠어야 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학교 교육을 더 받았으면 좋았을 거라고, 또는 자녀들을 갖기 전에 직장 생활을 했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후회할 수도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쉬움 속에 미남 영화 배우만큼이나 멋있게 떠오르는 옛날의 마지막 남자를 떠나 보내지 말았어야 했는데 싶기도 하다. 그러나, 회한과 후회 속에 사는 대신 우리는 그래도 당시 우리가 아는 한도 내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받아들이고 대신 만족스러운 미래를 구상하는 데 우리의 힘과 자원을 써야 할 것이다.”

- 캐롤 M. 앤더슨 & 수잔 스튜어트 <단독비행 : 혼자 사는 즐거움>(엄영래 옮김. 또하나의 문화)

 

그때는 몰랐다. 여자가 행복해지기 위해 한 남자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혼자 나이 들어도 외롭지 않고 충만할 수 있다는 것을, 결혼하지 않아도 꿈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은 많다는 것을, 하고 싶은 대로 해도 고립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자신에게 의미 있는 것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자신이라는 것을, 삶을 어떻게 느낄지 결정할 힘은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결혼을 낭만화하는 것은 문화적 미신이라는 것을, 자유와 독립을 위해 더 애써야 한다는 것을, 혼자 있다는 것이 결코 불행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우린 언제나 이야기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다. ‘외로울 것이다. 경제적으로 힘들 것이다. 책임을 다하기 버거울 것이다…’ 서로 추측하며 자기 날개에 놓인 짐의 무게도 문득 가늠해볼 뿐.

 

그날따라 어쩌자고 겨울 들판에 불에 타다 남은 건물 하나가 시야 안에 덩그렇게 들어왔다. 검게 탄 벽 너머로 거뭇한 철새들이 일렬로 날아가 사라졌다. 어쩌면 우리도 절름거리며 어두운 땅을 천천히 떠나고 있는 중인지도 몰랐다. 나에게 날개가 있다는 것을 신기해하며, 그동안 날개를 잊고 지낸 시간에 눈물겨워하며, 땅 위에서 낮게 퍼덕거리며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렇게 미적거리며 그런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네게 언제나 있었던 날개를 내가 기억한다! 날아봐! 친구야! 더 머뭇거리지 말고!’

 

지친 날갯짓이 내는 소리가 하나 둘씩 모이면 그건 또다시 커다란 박수소리가 될 테지. ‘영원한 사랑이란 거 없어도 좋다. 까짓 거. 하늘에서 길을 잃는 게 뭐 대수냐. 하늘로 날아가는 길은 어차피 제 각각이니까.’ 차가운 손을 꽉 잡고 과장스럽게 흔들어대며, 우린 오랜 친구라는 특권으로 어쩌면 그런 말을 전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 안미선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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