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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은 전쟁의 역사에서 무엇을 경험하였나
<모퉁이에서 책읽기> 김현아 “전쟁과 여성” 
 


 

‘전쟁과 여성 인권 박물관’에 갔다. 산비탈에 가까이 있어 근처에 녹음이 보이고 잠자리 떼가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입구의 벽은 노란 나비 모양 쪽지로 빼곡히 덮여 있었다. 검고 둔중한 느낌이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작은 벽에 비친 영상에서도 빛나는 나비 떼가 날아간다.


▲   ‘전쟁과 여성 인권 박물관’ 입구 벽. 방문자들이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로 가득차 있다. © 일다

 

이곳은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들이 겪은 역사를 기억하고 교육하며 계속되는 전시 성폭력 문제를 해결하고자 만들어진 곳이다. 표를 사서 입장해 첫 번째 문을 열면 쾅쾅거리는 포화 소리가 들리게 설치되어 있었고 눈을 감은 여성들의 얼굴과 손이 부조로 새겨진 벽을 따라 계단을 내려가면 지하에도 전시물들이 있었다. 전쟁과 여성에 대해 떠오르는 대로 생각했다.

 

꿈에서 딸을 피신시켰다는 아버지의 불안

 

내가 사춘기 때 아버지는 딸이 밖에서 행여 강간이라도 당하지 않을까 심하게 염려했다. 꿈에서 전쟁이 일어나 군인들이 나를 끌고 데려갈까 봐 피신시켰다고 아침상 앞에서 심란한 얼굴로 말하기도 했다. 강박에 가까운 아버지의 염려가 실은 그분이 어릴 때 겪은 전쟁의 불안 때문이라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일본의 명으로 위안부로 차출할 것이란 이야기를 듣고 혼처를 가리지 않고 상대가 총각이라는 이야기만 듣고 급히 시집 보낸 큰누나’, ‘젊은 여자들만 보면 잡아간다는 미군’에 대한 두려움, ‘어디서나 전쟁터를 피할 수 없는데 가족의 젊은 여자들을 데리고 다니면 더 위험하니 차라리 고향에서 전쟁을 맞는 것이 낫다’고 판단해 피난을 가지 않았던 일, 이 모든 일이 아버지의 불안에 영향을 미쳤다. 아버지의 자서전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밤이 되면 아버지는 형님들과 같이 산에서 생활한다. 집보다 더 안전하다. 나도 따라갔다. 산 너머 멀리 안동 쪽에 계속 불빛이 번쩍이고 온통 하늘이 밝고 붉게 물들어 있다. 유엔군 비행기의 폭격 소리가 산 위에까지 들렸다. 불빛이 아버지가 입은 흰 옷에 반사되었다. 폭격은 밤늦도록 계속되었고 우리는 새벽녘에 산에서 내려왔다. (…)

 

이웃 새댁은 돌 더미 너머 냇가에서 빨래를 하다가 발에 총을 맞았다. 그때는 소속이 불분명한 사람들이 한두 명씩 총을 가지고 다녔다. 낮에 다니면 대개 경찰이나 국군 소속이고 밤에 다니면 빨치산 소속이었다. 새댁은 아픈 고통을 참으며 빨래를 이고 다리를 끌면서 수백 미터를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총을 쏜 사람이 누구인지 어디 소속인지 알 수 없었다. 경찰에 연락해도 수사도 없이 연락을 받고 그뿐이었다. 소독약도 없고 병원에도 변변히 가지 못한 새댁은 총에 맞은 상처가 덧나 앓다가 한 달도 안 되어 죽었다. 새댁에게는 갓 젖을 뗀 남자 아기가 있었다.>

 

여성들은 전쟁의 역사에서 무엇을 경험하였나

 

전쟁의 기억은 몸과 마음에 남게 된다. 제주 4․3(일본 패망 후 한반도를 통치한 미군정에 의해 친일세력이 부활하고 남한에서 단독정부를 수립하려 하자, 제주에서는 남조선노동당을 중심으로 이를 반대하는 민중항쟁이 일었다. 이승만 정부는 군과 경찰을 동원해 무력으로 진압하였으며, 1948년 4월 3일 이후 7년 동안 수많은 제주도민들이 희생당하고 수십 개의 마을이 사라져버렸다.) 때에 경찰이 쏜 총에 턱을 맞아 평생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살아야 했던 “무명천 할머니”의 이야기도 전쟁의 일상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그녀는 사람들을 거의 만나지 않고 살다가 십여 년 전에 돌아가셨다. 총을 맞는 날 어떤 일이 있었는지 손짓과 몸짓으로 말하며 웅크리고 여전히 두려워하던 화면 속의 모습이 떠오른다. 진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그 후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카메라로도 언어로도 전달되지 못한 채. 


여성들이 기억하는 전쟁은 남성의 시각으로 쓰인 전쟁과는 아주 다르다. 남성들이 쓴 전쟁의 기억을 가지고는 여성들이 경험한 삶의 비극성을 이해할 수 없다. 이제까지 공적 역사에 쓰이지 않았고, 무시되고, 주변화되었던 여성들의 전쟁 기억은 가부장제라는 또 다른 축을 매개하지 않고서는 역사화될 수 없다. 여성들이 기억하는 전쟁의 시작과 끝, 그리고 전쟁의 폭력과 공포는 그들이 여성이라는 조건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전쟁 역시 철저히 성별화되어 있는 제도이고, 또 사회를 성별화시키는 사회 기제이다.” - 김은실 <전쟁과 여성> 발문 ‘상상 속의 평화와 현실 속의 평화’

 

<전쟁과 여성: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 속의 여성, 기억, 재현>(여름언덕, 2004)을 쓴 김현아 씨는 여성주의 관점으로 베트남과 한국에서 일어난 전시의 여성 폭력을 기록했다. 그 시간을 겪은 당사자 여성, 목격한 이들의 목소리를 전하며 가부장제 사회에서 되풀이되고 침묵되는 폭력을 증언했다. 여성은 역사 속에서 어떤 존재로 여겨지며, 기억은 어떻게 재현되는지, 어떤 일이 정말 있었으며,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함께 듣고 기억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책에 담고 있다.

 

미군 폭력을 기억하는 할머니의 ‘기록’

 

글쓰기 수업을 하다 보면 나이 드신 분들을 만나게 된다. 일흔 살, 여든 살, 그분들은 내가 ‘어르신’이라고 부르는 이들이다. 그러나 떠오르는 기억을 써보라고 했을 때 그분들이 쓴 글 속에는 어린 시절에 겪은 전쟁 경험이 나온다.

 

일흔이 다 된 남자 분들이, 네댓 살 때 전쟁통에 엄마를 잃고 울부짖던 이야기를 할 때, ‘이제 나 어떡해! 어떡해!’ 외치며 피난 행렬 속에서 기를 쓰고 헤매고 다녔다고 할 때, 보도연맹 사건(국민보도연맹은 좌익 세력을 우익으로 전향시키겠다며 만든 관변 조직으로, 1950년 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부는 3개월간 전국 수만~수십만 명의 보도연맹원들을 집단 학살하였다)으로 끌려가 죽은 아버지의 빈 자리로 가족이 굶주려 죽게 되었을 때, 모두 발길을 끊었는데 친척이 건네준 쌀 한 말로 살아남았다고 고백할 때, 그 시간을 떠올려 쓰는, 지금은 머리가 허연 나이 든 노인들은 울음을 터뜨린다. 떨리는 입술로 차마 글을 마저 읽지 못한다.

 

“만약, 그때 어머니가 나를 다시 찾으러 오지 않았다면, 눈에 띄라고 일부러 빨간 망토를 입히지 않았다면, 나는 전쟁통에서 죽었을 겁니다. 살아남았다 해도 고아가 되었거나 외국에 입양이 되었겠지요. 어머니는 몇 십 년 전에 돌아가셨지만 저는 어머니에게 언제나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도 있다. 이분은 자신은 글을 써본 적이 없다며 첫 수업을 듣고는 그만 듣겠다고 하셨던 분이다. 노트에 날마다 글을 빼곡히 쓰면서도 별 것 아니라고 손으로 가리던 분이다. 맨 앞에 앉았는데 말씀을 거의 하지 않던 분이다. 마지막 수업시간에, 할머니는 남의 눈을 피해 “선생님만 보라”면서 노트를 몰래 나에게 보여주었다. 수업시간에 소리 내어 읽거나 발표하지는 않겠다고 했다. 이것이 그녀의 글이다.

 

<자서전 쓰기 수업에 참여해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쓰게 되었다. 그때 내가 몇 살이었는지는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점심을 먹고 있는데 어디선가 꽹과리 소리가 들려오기에 밥을 빨리 먹고 밖으로 나갔다. 학교 쪽에서 들리는 것 같아 학교로 뛰어가는데 사람들이 길에서부터 학교까지 꽉 메어서 “만세, 만세, 만세”를 부르면서 학교로 가기에 나도 따라갔다.

 

학교 문 앞을 나오는데 누군가를 마구 때리고 있다. 교장 선생님이 맞고 있다. 동네 언니가 있기에 “언니, 왜 교장 선생님을 때려?” 물어 보았더니, “우리가 해방이 돼서 일본 놈들을 다 내쫓는다. 알았니?”라고 했다. 일본 교장 선생님을 어찌나 때렸는지 등 살갗이 옷에 묻어났다. 여기저기서 피는 흐르고 걷지도 못하는데 사람들이 끌고 이 동네 저 동네 돌면서 돌을 던지기도 하고 나는 조그마니까 사람들 속에 들어가서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다리 아픈 줄도 모르고 저녁 늦게까지 쫓아다녔던 기억이 난다. 여기저기서 “일본 놈 다 죽여라. 우리는 해방이다. 만세, 만세”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기억들.

 

그리고 몇 년이 지났는지 6․25 전쟁이 났다. 내가 서울로 이사 온 지 두 달밖에 되지 않았다. 우리 집에서 이화여대까지는 가까웠다. 이화여대를 가려면 기찻길도 있고 굴도 있다. 기찻길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굴속에서 시체가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죽은 사람들을 밟지 않고는 길을 건너갈 수가 없었다.

 

우리도 피난을 가야 하는데 아버지는 이불 보따리 지고 어머니는 애기 업고 솥단지 이고 나는 동생 손잡고 한강이라고 왔는데, 다리가 끊어져서 못 건너가고 얼음 위로 건너야 했다. 밤에 잠도 길에서 자면서 몇 날 며칠을 걸어도 끝도 없고 길가에는 죽은 사람들이 널려 있고 논바닥에는 아이들 버리고 간 것이 얼마나 많은지….

 

기차가 가다가 못 가고 서 있는데 지붕 위에까지 사람들이 새카맣게 매달려 있는데 한번 꽝 하면 낙엽 떨어지듯 사람들이 죽어서 우수수 떨어진다. 이렇게 앞뒤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는데도 우리는 죽지 않고 어느 산 밑에 자그마한 집 뜰 안에서 자리를 잡았다. 하루는 그 집 막내아들이 스물두 살이라고 하는데 밑에 동네 거동을 좀 보고 온다고 하면서 내려가더니 얼마 안 돼 폭격을 맞아 창자가 모두 밖으로 터져 나온 것을 사람들이 데리고 왔다. 얼마나 무서운지 우리는 그저 떨기만 했다.

 

그 와중에도 미국 군인들이 들이닥치더니 여자는 다 끌고 나왔다. 외양간 밖에 수수깡 밭으로 끌고 가서 강간을 하는 것이다. 우리 어머니도 끌고 가더니 애기를 얼마나 꼬집었는지 얼마 안 된 아기라 새파랗게 질려서 울었다. 그것을 보고는 그냥 놓았다. 이제는 이곳도 안전지대가 아니다 하면서 우리들 보고 어디로 가라고 했다. 우리 어머니는 주인집에서 늙은 호박을 하나 사서 쪼개 가지고 머리에다 붙이고 얼굴만 내놓고 칭칭 감고 아기를 업고 나만 데리고 그 어떤 동네인지 갔다. 안전지대란다 그곳은.

 

하루를 자고 나니 이곳도 미국 놈들이 들이닥쳐서는 여자들은 다 끌고 나가는 것이었다. 우리 엄마도 끌고 가려고 잡아당겼다. 애기도 나도 엄마를 잡고 막 울었다. 엄마 꼴은 그 와중에 상거지 모습을 하고 있는데도 여자로 생겼다 하면 다 끌고 외양간으로 가서 한 놈 들어갔다 오면 또 한 놈 들어가고 또 나오면 다른 놈이 들어가고 이렇게 한 여자를 두고 몇 놈씩 들어갔다. 어느 집 딸인지 모르겠지만 아현동에서 두 딸이 다 끌려 나가서 당하고, 딸 하나가 죽었다. 외양간에서. 어디다 하소연 한 번 못 하고 그 집 식구들은 다음 날 그곳을 떠났다.

 

이북 군인들은 우리 민간인에게는 해코지 안 했다. 미국 놈들은 우리 민간인들을 얼마나 죽이고 해코지했는지 말로는 다 못할 악랄한 놈들이었다. 6․25 무서운 전쟁이었다. 6․25보다는 미국 놈들이 더 무서웠다. 나는 지금도 미국 놈들이 한 짓이 눈에 선하고 생생하다.

 

6․25 전쟁으로 말도 못 하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일본 놈, 6․25. 우리는 두 번이란 전쟁을 겪고 보릿고개라는 가난을 겪은 지라 전쟁의 후유증이 지금도 생생하게 남았지만 지금 젊은 세대들은 말로만 전쟁이지 전쟁을 몸소 겪어 보지 못한지라 그들이 얼마나 나쁜 놈들인지 모른다. 다시는 이런 전쟁이 없어야 할 것이다. 젊은이들이여. 우리 세대는 이렇게 두 번의 전쟁으로 굶주리며 살았어요. 좀 생각을 바꾸고 정신 차리고 살아주었으면 좋겠어요. 미군, 6․25 때 당하고도 미국의 앞잡이로 살고 있는 것이 사실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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