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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치지 못한 편지 – 소중한 내 친구에게 
<모퉁이에서 책읽기> 사이바라 리에코 “여자 이야기” 

 

 

※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고 읽고 쓰는 사람, 안미선이 삶에 영감을 준 책에 관해 풀어내는 연재. 한국여성민우회 블로그 민우트러블’에도 공동 게재됩니다. ▣ 일다 www.ildaro.com 

 

우리를 기억하는 나무에게

 

서영 씨, 미안. 그리고 보고 싶어.

 

지나간 것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편지를 쓰게 되었어. 다시 가보지 않는 곳은 세상에 없는 곳이지. 나는 안 갈 거고, 그건 서영 씨도 그럴 거야. 우리가 살았던 그 아파트 기억하지? 암, 기억할 거야. 난 장담해. 서영 씨도 나처럼, 그 아파트의 낡은 현관이며, 냄새 나는 엘리베이터며, 난방이 잘 안되어 늘상 춥고 습하던 방들을 샅샅이 기억할 거라고. 그곳이 번쩍번쩍한 새 아파트였다 해도 우린 뚜렷이 기억했을 거고 다신 가지 않았을 거야. 그래서 나는 서영 씨가 나의 편지를 달가워할지 자신이 없네.

 

놀이터에서 유모차를 끄는 엄마끼리는 단박에 친구가 되지. 서영 씨와 내가 인사를 처음 나눈 곳도 가을날 그 아파트의 놀이터였어. 왜 그날따라 우리밖에 없었을까? 동갑내기 아이를 둔 엄마라는 이유만으로도 우린 친해지기 충분했어. 안 그래도 심심하던 차였지.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놀게 하고 우린 같이 어울려 종일 죽치고 얘길 나누었어. 할 얘기가 뭐였겠어? 우리에 대해서 말하는 거야. 그래서 금방, 서로 무슨 일을 했고, 무슨 일을 하고 싶어하고, 어떤 가정환경에서 컸고, 연애는 어떻게 했는지 속속들이 알게 되었지.

 

어떨 땐 아이들은 대형마트 놀이방에서 뛰어다니고 서영 씨와 나는 미끄럼틀 위에, 볼풀장 안에 쪼그리고 앉아 아이들의 시끄러운 고함 속에서, 새된 울음소리 속에서 얘기를 하고 또 했어. 서영 씨는 어릴 적부터 용돈 벌던 얘기랑, 취직해서 직장 상사의 추근거림 때문에 사직한 이야기랑, 암에 걸린 얘기랑, 남편의 폭력이랑 별거 생활을 덤덤하게 얘기했어.

 

나는 지금도 플라스틱 놀이 기구 속에 틀어박혀 두런두런 이야기 하던 우리를 떠올리면 어쩐지 안타까워져. 우리 말을 들어줄 이는 그때 세상에 단 둘뿐이었던 거지. 그래서 서로 마구 챙겨주기 시작했어. 장을 보다 뭐 필요한 거 없냐고 전화해서 물어보고 콩자반을 사다 주기도 하고, 치킨을 사서 식기 전에 부랴부랴 갖다 주기도 하고, 요리가 담긴 접시를 랩에 싸서 유모차를 끌고 와 기어이 전해주기도 했어. 정을 붙일 사람이 있으면 혼자가 아닌 것 같잖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건 좋은 거니까.

 

난 눈치가 없었어. 아이를 데리고 서영 씨 집에서 놀기도 하고 어떨 땐 불쑥 찾아가 고민 거리를 이야기하기도 했어. 고민을 말하면 항상 서영 씨는 나보고 잘살라고만 했어. 내 결혼 생활을 두둔해주고 지켜주려고 했어. 난 그게 부아가 나서 더 큰소리로 속상한 이야기를 줄줄이 늘어놓았지. 어떨 때 서영 씨는 그냥 웃고 말았어.

 

서영 씨는 주말에 웨딩 헬퍼 일을 해서 오만 원을 벌었고 그 돈으로 일주일 동안 생활했지. 더 돈을 벌면 꼭 패밀리레스토랑에서 나에게 맛있는 걸 사주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어. 어떤 날은 힘이 없어 보였지. 계속 항암 치료를 받고 있었어.

 

독실한 기독교인이었고 늘 기도했지. 서영 씨의 패인 옷 가슴팍에는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어. 밤새 가슴을 치면서 기도하느라 생긴 멍이었어. 악마를 쫓기 위해 그런다고 했지.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하는데 자꾸 안 좋은 생각이 들면 그건 악마의 짓이라고 서영 씨는 단언했어. 그러면서 열심히 읽던 책은 <긍정의 힘>이었어. 하나님의 방언으로 쓴 알아볼 수 없는 일기장까지 나에게 보여주었어. 서영 씨는 조용한 집에서 아이와 단 둘이 살면서 날마다 그 일기장을 써내려 가는 데 혼신의 힘을 다했지. 그래서 서영 씨가 살 수 있었던 거야.

 

미안한 게 있어. 비가 오는 날, 서영 씨가 아이와 함께 우산을 쓰고 아파트 입구에 쪼그려 앉아 있는 걸 보고 우리 집에 불러 점심을 같이 먹고, 그리고 망설이다 쌀 한 말을 싸주었지. ‘쌀이 떨어져서 사러 가려는데 비가 와서 앉아 있었다’던 말을 듣고서였어. 서영 씨는 머뭇거리며 고맙다고 했지. 서영 씨는 나에게 남편이 있다는 것을 부러워했어. 월급을 가져다 주고, 아이에게 아빠 노릇을 해주는 남편이 있다는 것을 부러워했어.

 

“내가 나중에 큰 집을 마련하면 미선 씨 가족도 같이 살게 해줄게.” 서영 씨는 그렇게 인사했어. 서영 씨는 식당에서라도 일하고 싶은데, 아이를 맡길 데가 없어서 일할 수 없어 속상하다고 했어. 그런 서영 씨 앞에서 나는 점점 더 이야기를 들어주며 짐짓 위로하는 역할을 자청했는지도 몰라.

 

내가 반 년짜리 아르바이트를 구했을 때 서영 씨는 예쁜 머리띠를 선물해주었고, 사회생활 잘 하라고 축하해주었지. 6개월짜리 일이라도 열심히 하면 계속 근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며 나보다 더 기뻐했어. 한때 무역회사에 다닌 서영 씨에게도 출근하라고 연락 오는 이전 직장이 있었지만 아이 때문에 일할 수가 없었지. 서영 씨는 계속 기도했어. 난 무슨 엄살을 그리 늘어놓아서, 새벽에 교회에 갈 때도 아이가 잠을 깨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후다닥 다녀온다는 서영 씨가 나를 위해 기도하게까지 했을까.

 

난 서영 씨에 대해 다 안다고 여겼지만, 나중에 서영 씨가 하지 않은 이야기가 훨씬 많다는 것을 알았지. 부끄러웠어. 유모차를 끌고 당당하게 서영 씨 집 문을 두드리던 내 모습이, 차를 마시고 활기차게 아르바이트 조언을 하던 내가 부끄러웠어. 어설프게 배운 타로 카드를 들고가 카드 점을 쳐주겠다며 큰소리치던 내 모습도 부끄러웠어. 카드 앞에서 서영 씨는 착잡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지.

 

아이를 안고 있는 여신 카드가 나왔을 때 말없이 가만히 내려다보았어. “…왜 그렇게 눈치가 없어.” 나보고 원망하듯 슬프게 말하며 쳐다보던 눈길. 그때야 난 서영 씨가 그사이 완전히 이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 돈 없고 아픈 여자라고 양육권도 친권도 박탈당하게 되었다는 것도. 위로해준답시고 내밀었던 어설픈 카드가 미안했어. 서영 씨가 다시는 아이를 만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어.

 

“미선 씨, 난 죽지 못해 살아. 돈을 아주 아주 많이 벌어야 하는데… 나중에라도 아이한테 뭘 해주려면…. 난 반드시 부자가 될 거야. 반드시.” 아이를 빼앗기고 가슴에 멍 자국만 덩그렇게 남은 서영 씨는 그렇게 말했어.

 

서영 씨가 아파트를 떠나던 날, 난 가슴이 두근거렸어. 이사 차량이 와 있고 서영 씨는 가구가 나가는 빈 집 안에 우두커니 있었지. 난 어쩌자고 “밥은 먹었어?” 하고 물었어. 서영 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난 또 안 어울리는 말을 해버린 거지. ‘난 밥을 먹었는데, 넌 밥을 먹었어? 밥은 먹어야 하는 건데, 넌 밥을 먹었어? 난 우리 집에서 남편과 새끼랑 알콩달콩 밥을 먹었는데, 넌 빈집에서 세간을 내보내며 밥은 먹었어?’ 보태주는 것 없이, 그런 입 치레로 행여 들리지 않았을까 낯이 뜨거웠어.

 

우린 이제 이웃이 아니었어. 틀에 박힌 인사로는 할 말이 없었지. 놀이터에서 처음 나눈 말마디처럼, 아이가 무럭무럭 잘 큰다거나, 남편과 어떻게 지낸다거나, 어디에 싼 가게가 있다거나 하는 그런 이야기는 더 할 수 없었어.

 

“저기 나무 보이지? 처음 이사 올 때도 있었어. 창밖에 나무가 보인다고 우리가 좋아했는데….”

 

서영 씨가 대답 대신 손가락으로 창 밖을 가리키며 말했어. ‘우리’라는 말을 썼어. 지금은 곁에 없는 사람, 남편과 아이였겠지. 서영 씨는 한때 사랑한 사람들과 함께 머물렀던 그 공간에 마지막까지 애착이 있었어. 그 집을 떠나는 건 다 지워버리는 거였어. 희망과 애착을 가지려고 한 시간을, 기도하며 버티어낸 숱한 불면의 밤을 없던 것으로 지워버리는 거였어.

 

나는 가슴이 더 두근거렸어. 그 집을 떠나야 하는 서영 씨는 얼마나 긴장했을까? 가슴이 두근거릴 겨를도 없었을지 몰라. 나는 서영 씨에게 큐빅이 박힌 핀을 선물로 주었고 서영 씨는 그 핀을 머리에 꽂았어. 말을 하진 못했지만 서영 씨는 아주 예뻤어. 여전히, 언제나처럼. 그 반짝이는 핀을 꽂고 서영 씨는 창 밖을 묵묵히 내다보고만 있었어. 그리고 나중에 나도 서영 씨와 별반 다르지 않는 형편이 되어 그 아파트를 떠나게 되었지.

 

그곳에 다시 가고 싶어. 가서 그 나무가 잘 있는지 눈으로 보고 싶어. 그 나무는 우리를 기억하고 있는지, 변한 시간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도 과연 있는 것인지 가보고 싶어. 그 나무 아래에 서서 나뭇잎들이 바람에 파르르 떨리며 빛날 때 그때의 나무를 생생히 느끼며 뭉클해지고도 싶어. 그 나무 아래서 얼마나 우리가 불안하게 서성이고 또 그 불안을 잊기 위해 무연하게 나무를 애써 쳐다보았는지 다시 떠올리고 싶어.

 

그래서 부자가 되었을지, 여전히 빠듯하게 살아갈지, 아이를 만났을지, 여전히 그리워하고 있을지 모를 당신과 내가 그동안 살아낸, 아무도 모를 시간을 축복해주고 싶어. 그냥 다 잘했다고 말해주고 싶고 그만하면 되었다고 위로해주고 싶어. 그래서 우리가 끝까지 용케 참아낸 눈물을 그때야 흘리면서 그동안 정말 힘들었다고, 정말 슬펐다고 목 놓아 펑펑 울고도 싶어. 다르다고 생각해서 미안하고 네 상처는 나와 다르다는 양 우쭐대었던 것도 미안해. 알고 있어. 지우고 싶은 시간이니까, 서로 연락을 끊게 된 거지. 영영 헤어진 거지.

 

사람들이 오가고 무수한 시간이 엇갈리는 길모퉁이에 그 나무가 있지. 우리가 그때 보낸 시선이 영원히 아로새겨져 있을 나무에게 한번쯤은 돌아가고 싶은 거야. 그 단단하고 거칠한 줄기를 쓰다듬으며 견뎌낸 시간을 어루만져주고 싶은 것뿐이지. 잠깐이었지만 영원처럼 느껴진 그 시간에, 지금도 우두커니 그 자리에 말없이 서 있을 것 같은 우리에게로 돌아가,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뒤늦게 말해주고 싶은 거지.

 

‘내 소중한 친구들…꼭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  사이바라 리에코의 자전적 만화 <여자 이야기> 
 

<여자 이야기>(김동욱 옮김, 에이케이)는 사이바라 리에코가 자신의 어릴 적 이야기를 담은 자전적 만화이다. 낯선 새 아빠네 할아버지 집에 가서 겪은 일들, 새로운 고장, 친구들의 기억이 담겨 있다.

 

외로워서 그림자를 가만히 내려다보면 그림자 모양이 연보라색 닭이랑 커다란 올챙이로 보이고 혼자 모양 맞추기 놀이를 했다. 밥을 먹으려면 입을 벌려야 하는데 입을 벌리면 눈물이 나왔고 저녁때까지 할 일이 없어 계속 울었다. 울고 있으면 꼭 뭔가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여섯 살 나츠미는 비가 그친 공원에서 철봉에 맺힌 물방울을 핥는 게 좋았고 처음 생긴 친구들과 죽은 고양이를 공장 한 귀퉁이에 묻었다. 키이와 미사는 가난한 동무들이었고 종일 셋은 웅크리고 모여 앉아 시간을 보낸다. 힘든 엄마들의 삶을 지켜보고 죽어가는 이웃을 보며 현실을 알게 되고, 꿈을 꾼다. 그리고 어른이 된 아이들은 현실의 벽 앞에서 자신의 엄마들처럼 슬픈 삶을 잇게 되고 뿔뿔이 헤어진다. 어른이 된 나츠미는 혼잣말한다.

 

<나는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 아무것도 듣지 않았다.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 부끄러운 일이다. 아무것도 보지 않고, 아무것도 듣지 않고,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니, 너무나도 부끄러운 일이다.>

 

<키이한테 좋아하는 상대가 생겼다. 그 상대는 ‘신령님’이었다. 잘됐구나. 키이. 나는 키이가 좋다. 그러니까 키이는 꼭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지금 키이한테는 신령님이 있다. 정말 다행이다. 돌아오는 길, 속으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주문을 반복해도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나는 키이가 좋다. 그러니까 키이는 꼭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지금 키이한테는 신령님이 있다. 정말 다행이다.>

 

<언제 어느 때고 떠오르는 그때 그 공장과 주택단지 뒤편 온갖 내음으로 가득하던 공터, 나는 마사랑 키이가 좋다. 내 소중한 친구들. 그런 친구들은 평생 두 번 다시 사귈 수 없을 것이다.>   안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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