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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던 집들’에 안부를 묻다 
<모퉁이에서 책읽기> 송경동 시집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고 읽고 쓰는 사람, 안미선이 삶에 영감을 준 책에 관해 풀어내는 “모퉁이에서 책읽기”. 한국여성민우회 블로그 ‘민우트러블’에도 공동 게재됩니다.

 

 

'내 집'이라고 애지중지했던 자리들

 

가을이면 있던 자리에서 뽑혀나가 하염없이 부유하고 싶다. 땅을 밟고 바지런히 돌아다녀도 싹트지 않는 발바닥의 뿌리, 한곳에 정주하지 못한 마음도 그렇다. 지나간 집들을 돌이켜본다. 2년씩, 길어봤자 3, 4년씩, 내 집이라고 애지중지하던 자리들을 모자이크 맞추듯 죽 이어본다.

 

스무 살, 서울에 처음 올라와 대학교 앞에 있는 반지하방에 살았다. 반지하방이 영 낯설었다. 자고 나면 등이 푹 젖고, 어두컴컴해 항상 불을 켜두어야 하고, 괜히 다른 사람의 발이라도 창가에서 어른거리면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머리 밑에 습진이 생기더니 누런 딱지가 앉아 병원에 다니기도 했다. 그래도 대학생 처지에 셋집에 산다는 것은 다른 동무들이 부러워할 만한 일이었다. “네 부모님은 젊을 때 아주 열심히 일하셨나 봐, 그래서 자식한테 셋방도 얻어주고.”

 

또래 친구들은 하숙을 하거나 기숙사에 살거나 고시원에 살았다. 고학을 하는 친구는 내 방에 와서 벼룩시장을 뒤적이며 아르바이트 강사 자리를 구했다. 면접을 가기 전에 그 방에서 밥을 같이 먹었다. 친구는 나중에 이렇게 쓴 엽서를 나에게 주었다. “살아갈 자신이 없을 때, 저녁에 친구가 차려준 밥상이 살아갈 힘이 되기 되기도 하지.”

 

대학교를 졸업하고 새로 방을 구했다. 이층에 있는 단칸방이었는데 보증금 오백만 원에 월세가 이십만 원이었다. 그 방은 집주인이 오래된 물건들을 넣어두고 창고처럼 쓰던 곳이었다. 나는 세간이 없어 지나가는 트럭에서 냉장고를 육만 원 주고 사고, 세탁기도 팔만 원 주고 샀다. 세탁기는 금방 고장이 나서 못 쓰게 되었고 냉장고도 그랬다. 화장실은 계단 아래에 있어 따로 드나들게 되었는데 벽이 사선으로 낮게 되어 있어서 머리가 자꾸 부딪쳤다.

 

방 창 밖에는 주인집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어서 창문을 열어두지 못했다. 부엌 겸 욕실을 같이 써야 해서 쭈그려 앉아 바가지에 물을 퍼 몸에 끼얹을 때마다 반투명 유리 문 밖에 실루엣이 어른거릴까 봐 신경이 쓰였다. 좁긴 해도 불만이 없었는데, 그 집에서 2년밖에 못 살았다. 주인이 그 방을 다시 아들의 짐을 보관하는 데에 쓰겠다고 비워달라고 했다. 내가 살던 집이 다른 사람에게는 창고에 지나지 않아서 마음이 좀 아팠다. 또 급하게 돌아다니며 방을 구했다. 근처에 있는 한 칸 방을 겨우 구했다.

 

직장에 갓 입사했을 때 첫 월급 받던 날, 우리 부서의 과장님이 신입사원들에게 꼭 청약저축을 들라고 했다. 그때부터 시작한 청약저축이 몇 년이 지나자 청약 신청을 넣을 수 있게 되었다. 임대아파트는 서울의 외곽 쪽에 주로 있었다. 직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긴 했지만 11평 임대아파트에 청약 신청을 넣었다. 그곳의 입주금은 내 월세방 금액과 같았다. 보증금 오백만 원에 월 이십만 원이었다.

 

11평 임대아파트에 입주가 가능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열쇠를 받으러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가던 날은 내가 서울에 올라와 가장 기뻤던 날이었다. 작은 방 두 칸을 둘러보고 기뻐서 열쇠로 조심스럽게 문을 잠그고 돌아서서는 아파트 단지가 온통 내 집인 양 몇 번이고 믿기지 않아 돌아보았다.

 

엄마는 같이 청소를 하면서 그런 나를 탐탁하지 않게 여겼다. 젊은 애가 꿈이 없다는 것이다. 이 낡고 춥고 좁은 아파트에 평생 살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 그리고 “이 년 정도 살겠지” 하고 잘라 말했다. “아니야, 난 이제 집 때문에 걱정 안하고 여기서 평생 살 거야” 하고 결심이 대단했다.

 

아파트는 산을 마주하고 있어서 복도에 서면 산이 보였다. 그리고 복도에는 러닝 바람으로 담배를 피우는 아저씨들이 이따금 있었다. 실직을 했거나 돈을 버는 게 신통치 않은 사람들이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일하는 아주머니가 옆집에 살았다. 가끔 쓰레기봉지를 내놓을 때 눈이 마주쳤는데 “집이 조금만 더 넓었으면…” 하고 아주머니는 한숨을 쉬었다. 그 집에는 큰 아들도 있고 딸도 있다. 두엇이 누우면 자리가 다 차는 작은 방에 가족끼리 북적이며 살아서 피곤해했다. 복날이 되면 노인들은 한두 마디 맥없이 주고받았다.

 

평수가 다른 아파트는 크기만 다른 게 아니었다. 복날이 되어 뭔가 먹고 싶다는 식욕을 느끼고 수박을 먹을까 닭을 고아 먹을까 궁리하는 것과, 식욕조차 없으니 그냥 죽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의 차이였다. 집에서는 바퀴벌레가 자꾸 나왔다. 방음이 안 되는 벽 너머로 이웃의 전화벨 소리며 욕하는 소리가 다 들렸다. 방음이 안 되는 칸막이 집들에 줄줄이 살아 서로 대충 사정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2년을 살았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몇 평 더 넓은 주공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지난 시간은 숫자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 놀이터에서 만난 몇몇 엄마들은 포대기에 아이를 업고 아이를 유학 보내려면 어떤 준비를 지금부터 해야 하고, 외국어학교에 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고, 아파트값이 어떻게 오를 것인지 정보를 나누었다. 경전철이 들어서면 아파트 값이 곧 오를 거라며 나에게 귀띔을 해준 이웃의 말을 나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곧 아파트 값은 두 배가 넘게 올랐고 그 이웃은 은평 뉴타운으로 새로 이사를 갔다. 그러나 나는 오른 전세금을 벅차하다 다시 이사를 하게 되었다.

 

같은 집에 살기 위해서도 이 년에 이천만 원씩은 벌어야 한단다. 은행에서 전세금 대출을 받고 이 년 동안 맞벌이를 하며 그 돈을 겨우 다 갚을 때쯤 다시 집주인이 전세금을 올린다. 또 전세금 대출을 받고 그 빚을 갚으며 그 집에서 산다. 그런데도 집주인은 주변 시세가 더 올랐는데 싸게 올린 거라며 고마운 줄 알라고 생색을 냈다. “당신네 나가면 우리야 더 좋지!” 하고 큰소리를 쳤다.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방이 더 작고 싼 집을 구해보기로 한다.

 

경기가 불황이고 매매고 전세고 거래가 끊겼다며 당시 이 근처 부동산 가게에서는 몇 개 안 되는 매물을 가지고 경쟁이 붙었다. 가압류가 걸렸고 저당이 잡혀 있는 위험한 집까지 보여준다. 이사 갈 집이 마땅치 않아 이사 날짜까지 미루며 겨우 한 집을 구해 계약을 했다. 그동안 모은 전 재산이 한 장의 수표로 집주인의 호주머니에 들어갔다. 그 수표를 은행에서 받아 가져오면서 얼마나 조마조마했던지.
 

▲  송경동 시집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창비, 2009)  
 

그때 갑자기 깨달았다. 돈은 모이는 게 아니라는 것을. 돈은 그냥 종이 위에 찍힌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통장에 찍혀나가는 숫자들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의 시간은 흘러간 것이고, 나의 시간이 숫자로 환원되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것을. 이 집을 저 사람이 나에게 빌려주는 것은, 그래서 내가 어떤 집에 살 수 있는 것은, 이 사회의 약속과 사람들끼리의 약속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 약속은 공평하지 않을 수도, 말도 안 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약속을 바꿔나가야 하는 것이지, 내 시간을 돈으로 바꿔나가 죽도록 쌓아간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러니까 돈을 벌기 위해 저녁에 가족과 같이 밥을 먹지 못하고, 돈을 번다고 아이와 제대로 놀지 못하고, 돈을 번다고 친구와 차 한 잔 마음 놓고 못 마시고, 돈을 번다고 사랑하지 않고, 눈 맞추지 않고, 스스로 아껴주지 않은 것은, 어떤 것으로도 보상되지 않고 그냥 그렇게 흘러가버렸을 뿐. 돈이, 그 가공의 것이 채워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처음부터 아니었다는 것을.

 

그래서일 것이다. 새삼스레 이전에 살던 집들을 죽 뒤돌아본 것은. 그 속에서 함께 했던 친구며 사람들을 새삼 떠올려본 것은. 함께였던 사람들과의 일상의 풍경, 작은 소리까지 다시 떠올려보려고 애쓴 것은.

 

주름진 시간 속에 숨어 있는 사람들, 주름마다 튀어나오는 오래된 집들, 그때는 몰랐지. 우리가 유일하게 가진 것은 손수 지었던 그 저녁의 윤기 나는 흰 밥들이었다는 것을. 지금은 잊어버린, 그 밥을 후후 불며 먹었던 불 켜진 방들이었다는 것을. 같이 밥을 먹자고 사람을 그리워하며 여닫던 그 문들이었다는 것을. 하늘이 보이지 않는 땅 아래 있어도 맞은편에 나란히 마주한 너의 눈을 보면서, 너의 웃음을 들으며 맞잡은 손이었다는 것을.

 

언제나 그랬으니 앞으로도 함께 할 거라고 여기고 무심히 넘어간 시간들, 언제인지도 모르게 헤어진 사람들. 그래도 우리가 짓고 함께 나누어 먹었던 밥들이 소복소복하게 그 자리에 남아 지금도 주린 맘을 따뜻하게 달래주니, 지금은 문득 멈춰 서서 지나온 집들에 안부를 묻고 싶다. ▣ 안미선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야겠다

 

대전역 내리니 연계된 기차가 없었다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야겠다고 생각하니

막막해졌다 우선 짐을 맡기러 물품보관소에 가니

11시 52분, 오늘까지는 1200원인데

내일이 되면 가산요금이 붙는다고 한다

교각 아래 텅 빈 플랫폼을 보며 8분을 기다린다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야겠다고

마음을 내려놓았지만 너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지친 몸을 뉘어야 하는데 아침이면 또 먼 길을 떠나야 하는데

너는 오늘은 안된다고 했다

나는 갈 곳 잃은 새처럼 거리를 헤매거나

초라한 마차에서 혼잣술에 입부리를 적셔야 했다

 

0시 1분,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야겠다고

보관함에 짐을 부렸는데

벌써 떠나야 할 오늘이 되어버렸다는 서글픔

언제였던가 그때도 나는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야겠다고

이 별에 고단한 짐을 부렸지

행복했던가 따뜻했던가

 

어디라도 가서 몸을 뉘어야 하는데

내일 다시 가야 할 새로운 정거장들만이

저 하늘에 하나둘 그리운 별빛으로 떠올라 있다

깃들일 곳 하나 없이

뜬눈으로 새우다 가더라도

나는 오늘밤 이 별에서 자고 가야 한다

 

- 송경동 시집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창비, 2009) 중에서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영문 번역기사 사이트ildaro.blogspo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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