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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은 없다, 모든 것을 말하라
<모퉁이에서 책읽기> 알리스 슈바르처 “아주 작은 차이” 

 

※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고 읽고 쓰는 사람, 안미선이 삶에 영감을 준 책에 관해 풀어내는 “모퉁이에서 책읽기”. 한국여성민우회 블로그 ‘민우트러블’에도 공동 게재됩니다.

 

 

▲ 알리스 슈바르처의 <아주 작은 차이>(이프, 2001) 
 

이 책은 절판된 책인데 헌책방이나 인터넷 중고책 서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2001년에 초판이 나왔는데, 나올 때 관심을 많이 끌었고 그때 많은 독자가 이 책을 읽은 것 같다. 헌책방에 가서 보게 되면 ‘좋은 책인데, 누가 사보면 좋겠다’고 눈길을 주게 되는 책이다.

 

이 책의 출판사인 <이프>가 동명의 잡지를 창간했을 때 나는 갓 스물 무렵이었다. 친구가 “이런 잡지가 나왔다! 우리 여자 얘기가 있는 것 같아!” 하며 기뻐하며 보여주던 모습도 떠오른다.

 

당시 <아주 작은 차이>(알리스 슈바르처 지음, 김재희 번역, 이프, 2001)는 상당히 비장한 사명감(?)을 가지고 기획되고 출판된 것 같다. 여성운동의 목소리를 드높이고 우리 나라에서도 이런 움직임을 만들어내자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을까. 나는 유독 이 책을 볼 때면 이 책을 기획하고 번역한 이들의 웅성거림이 귀에 들리는 것 같다. “이런 책이 꼭 한국에서 출간되어야 해!” 의도는 꽤 시의적절한 것이어서, 그때 고조된 여성주의에 대한 관심 속에서 제 역할을 해내었을 것이다.

 

이 책의 출간은 적어도 이십대였던 우리에게는 퍽 새로운 사건이었다. 실은 당시 나는 책을 다 읽어보지 않았는데, 책에서 성적 경험을 진솔하게 이야기하는 부분이 생경했더랬다. 그리고 가슴 아프고 구구절절할 것 같은 선입견이 독서를 막기도 했다. 겪은 걸로 충분해, 뭘 또 아프게 읽어, 하는 심경.

 

십오 년쯤 지나 이 책을 다시 읽어보았다. 이십대 때 독서로 간접 경험을 얻으려고 읽던 책이 어느새 직접 경험한 것들을 책으로 반추하려는 마음으로 바뀌었다. ‘왜 이렇게 살까?’ 설익은 의아함이 ‘정말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어’ 하는 끄덕임으로 바뀌었다.

 

저자 알리스 슈바르처는 1970년대에 이 책을 썼고 2001년에 한국어판 서문을 썼다. 이 책은 경제적, 사회적 지위가 다르고 성 정체성도 다양한 여러 여성들의 인터뷰를 담고 있다.

 

여자라면 누구나 그런 시기를 겪게 마련이지요.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더 이상은 견딜 수 없는 그런 시점에 이르게 된단 말예요. 하루하루 숨이 차서 더 이상은 못 살겠다! 아무리 해도 표시가 안 나는 일, 그런 소리를 하면 남편들은 귀머거리 시늉을 하죠. 그런데 젊은 아가씨들은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잖아요. 이런 현실에 대개 그냥 속수무책 아무 준비 없이 결혼만 하면 저절로 해결이 되는 줄 알고… 우리 때는 다들 그랬어요.” <하루하루 숨이 차서 더 이상은 못 살아> 카타리나, 32세, 청소부였던 속기사, 이혼, 딸 하나 아들 둘. 214p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매일 찾아와 주던 여자 동료가 하나 있었어요. 회사에서 시켜 주는 교육 과정을 함께 다녀서 전부터 잘 아는 사이였어요. 퇴원 후 우리 집에 놀러왔는데, 레코드판을 올려놓고 함께 춤을 추다가 입을 맞추게 되었어요. 그리고는 넋이 빠진 채 서로 눈을 맞추고 한참을 바라보다가 문득 정신이 들었어요. 우린 둘 다 어쩔 줄을 몰라 했어요. 그 친구는 전혀 그런 경험이 없었고, 나로서도 생전 처음 여자하고 그런 교감을 나눈 셈인데, 너무나 자연스레 진행이 되고 우리 둘 다 아주 편하게 그 일을 받아들였어요.” <여자가 여자를 사랑한다?> 안네, 29세, 중소기업 사장 비서, 미혼, 자녀 없음. 111p

 

"십 년을 정말 군소리 없이 일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이렇게 늙으면 어떻게 되는 건가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심하게 병이 났는데, 보험을 들어놓지 않은 거예요. (…) 남편에게는 아주 어린 여자가 생겼어요. 나는 대학병원에 입원을 했는데, 오히려 병이 재발이 되고 말았어요. 환청이 들리고 이상한 그림과 무늬가 눈앞에 어른거려요. 벽에 있는 스피커에서 말소리가 나고 벽에서는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리고요. 그 소리가 전부 나한테 뭔가를 시키는 거예요. 이건 해라 저거 해라, 그러다가 결국은 나더러 죽는 수밖에 없다 그래요. 계속해서 그 소리가 들리니까 몇 차례는 그렇게 따라 했는데 마지막 순간에 겁이 나서 그만두곤 했어요." <여자노릇을 거부한 여자들의 종착역, 정신병원> 리타, 35세, 비서, 이혼, 자녀 없음. 181p

 

저자는 이들의 다양한 삶에서 공통점을 주시한다. 계급과 세대와 성적 지향성이 다를지라도 그들이 섹슈얼리티에서 억압되어 있으며 가사와 육아, 돌봄 같은 재생산 노동의 전담자로 자리매김 되어 있다는 현실이었다. 이것은 여성들이 경제적 사회적으로 취약해지고 자존감을 잃고 의존적 존재로 전락하는 이유였다.

 

저자는 이런 관점에 따라 묻고 다양한 여성들의 개성 있고 솔직한 목소리를 기록하여 자신의 해석을 실은 후 명확한 의견까지 설파한다. 강압적인 이성애와 질 오르가즘의 신화, 페니스 숭배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또한 가사와 육아, 관계를 위한 노동의 전담자인 여성이 자신의 자원을 갖추고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해 직업적 경력을 쌓고 자원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성적 억압과 주부 역할 때문에 모든 여성이 공통적인 억압을 당하고 있으며, 경제적 사회적 자원을 얻기 위해 자신을 개발하고 이른바 공적 노동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은 타당한 이야기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사는 2010년대의 시대는 또한 여성들 간의 차이가 커지고, 노동 시장에서 여성들이 맞닥뜨리는 차별이 공고해지며 가사, 육아 노동의 분담이 이뤄지지 않는 현실을 실제로 경험해왔고 새로운 모색을 하는 시기이다. 교육 경력과 일자리를  확충하고 여성들이 노동자가 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으며, 가사 육아 노동의 분담은 거의 불가능한 형국이고, 세대 재생산과 복지 확충, 국가의 책임을 요구하며 고군분투하는 시기다.

 

저자의 목소리가 낙관과 희망에 차 있는데, 그 열정이 여전히 뜨겁게 느껴지면서도 한편 다시 읽으며 한숨을 짓고, 암중모색하는 목소리들의 간절함이 지금도 어디에선가 그대로 살아 있을 것만 같다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어쨌든, 이 책은 살아 있다. 출간된 지 십오 년이 지났고 절판 되었지만 그 유효한 목소리들 속에, 그것을 성적 억압으로 해석하든, 재생산 노동의 불공평함으로 해석하든, 제한된 질문 속에 통째로서의 삶의 편린을 보여준 여성들의 진솔한 목소리 덕분에, 우리는 묻혀 있던 경험을 새로운 질문으로 묻고 그 숨은 기억조차 우리의 역사로 끄집어낼 시도를 새롭게 할 수 있고 용기도 낼 수 있는 것이다.

 

비밀은 없다, 당신 삶 속에 떠올릴 수 없는 기억이 있다면 이 책을 읽고 또다시 그 기억에 빛을 쬐이고 기억끼리 연대하는 법을 배우자. ▣ 안미선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영문 번역기사 사이트ildaro.blogspo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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