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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퉁이에서 책읽기> 어머니의 양육과 타인의 양육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고 읽고 쓰는 사람, 안미선이 삶에 영감을 준 책에 관해 풀어내는 “모퉁이에서 책읽기”. 이 칼럼은 한국여성민우회 블로그 ‘민우트러블’에도 공동 게재됩니다. ▣ 일다 www.ildaro.com 

 

 

“우리는 옛날의 앞치마를 두른 어머니의 이미지대로 살 수도 없고 슈퍼부모도 될 수 없으므로 항상 죄책감을 느낀다. 이 모든 과업들을 해내기에는 시간도 에너지도 없는 것이다. 우리는 자주 우리 자신을 속이려고까지 할지 모른다. 그러나 요구되는 역할이 너무 많아 무엇인가 잘못되게 되어 있다. (…) 어머니의 책임은 두려울 정도로 많다.” -샌드라 스카 <어머니의 양육과 타인의 양육>

 

왜냐면 엄마니까…?!

 

그때도 겨울이었다. 돌이 지난 아이와 주공아파트 안에서 종일 지내던 나날. 서랍을 열고 옷을 꺼내다가, 냄비뚜껑을 바닥에 두드리다가, 전화기 줄을 잡아당기다가 심심해진 아이와, 밥을 먹이고 씻기고 입히고 젖을 물리다가 더 할 게 없어진 내가, 둘이 우두커니 앉아 있으면, 창으로 들어온 햇빛은 우리를 비추고 밖이 추운 대신 빛은 시리도록 밝아, 어쩐지 맑은 슬픔이 고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손가락 인형놀이를 하고 아이는 그걸 구경했다. 손가락이 살아 있는 건지, 엄마가 말하는 건지 아직 모르는 아이가 쳐다보는데, 혼자 하는 연극은 사위가 문득 어두워질 때까지 계속되고, 혼자 관객인 아이는 다른 할 것이 없어 내 손가락과 입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때 세상에서 오롯이 우리 둘뿐인 것 같던 그 텅 빈 방이 무진장 커 보이고, 아이와 나는 쓸쓸함에 짓눌리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있었던 것 같다. 다행히 더 심심한 사람은 나였고, 아이는 내가 씩씩하게 굴면 그나마 나았다. 하지만 우리 둘만으로 내내 행복할 순 없었고 그건 당연한 이야기였다.

 

아이가 백일이 되었을 때 내가 일하러 나가고 싶다고 하자 남편은 “쟤를 두고?” 하고 말도 안 되는 소리인 양 취급했고, 아이를 업고 찾아간 구립 어린이집에서는 돌은 지나야 받을 수 있다며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일을 하던 여자가 아이를 낳고 계속 일을 하고 싶다는데 왜 그게 터무니없는 소리일까? 아둔했던 나는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왜 어린이집에 보내? 성격 버려.”

“차라리 내가 아프지 말지, 가면 맨날 아프대. 애 잡을 일 있어?”

 

이웃들이 훈수를 두었고 소아과 의사까지 합세하더니 친정 부모까지 거들었다. 공부해서 대학 가야 한다는 교육을 똑같이 받고 키워진 우리 또래들은, 실은 엄마 노릇이 생경했고 솔직히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누구도 우리가 곤경에 빠져 곤혹스러울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면 엄마니까. ‘엄마’는 누구나 닥치면 해내는 일이니까. 여자라면 할 줄 아는 일이니까. 아니, 그건 일도 아니니까. 제 새끼 제 손으로 키우지 못하는 건 에미도 아니라 했으니까.

 

그렇게 말없이 엄마 노릇을 꾸역꾸역 해내면서, 빈 방이 오로지 한 세계이고 아이가 유일하게 만나는 사람이며, 이웃과 가족에게서 고립되어 우리는 속으로 붕괴되어 갔다.

 

어느새 ‘엄마 주자’가 되어 달리는 여성들

 

학교와 일터, 익숙하던 이른바 공적인 세계에서 떨어져나가 가정이라는 사적 공간에 들어왔을 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주는 곳은 없었다. 난무하는 것은 ‘카더라’ 통신이었다. 그건 돌쟁이 아이를 데리고 나갔을 때 “벌써 늦었어요. 빨리 한글 시작해야 해요.” 하고 회원가입을 권하는 사교육시장이었고, 애는 무조건 엄마가 3년 동안 키워야 한다는 출처 없는 윽박지름이었고, 살을 빼기 위해 유모차 앞에서 줄넘기를 하면서도 다른 아이와 자기 아이의 발육 상태를 비교하며 조바심 내는 얼치기 모성이었다.

 

세상일이 그렇듯 엄마가 된다는 건 경쟁이었고 아이들은 벌써 줄서기에서 우위를 차지해야 하는 달리기 경주를 시작한 것이었으며, 그걸 뒷받침해주는 것은 새로운 ‘엄마’들의 동원이었다. 그 ‘엄마’가 되기 위해 우리 또한 달려야 했다. 이게 아닌데, 아닌데 하는 생각은 일단 이기고 나서 해야 할 사치스런 생각이었다.

 

젖먹이 아이를 둔 엄마들의, 아직은 솔직한 공허감을 파고 들어오는 건 빈틈없는 교회 전도였다. 아파트에서는 신앙이 급속도로 전파될 수 있다. 아이를 잠시 봐준다는 그 한 시간 동안 엄마들은 교회 예배에서 하나님을 만났다. 그건 자신에게 간만에 허락된 혼자만의 시간이었기 때문에 감회가 남달랐다. 곧이어 엄마들은 “아이는 선교의 미래입니다!” 외치며 마음 놓고 신앙에 전념할 수 있었다. 왜냐면 믿어서 이길 수 있다는 교회의 논리와 세상의 논리가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승자가 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아이라는 또 다른 원점에서 함께 마라톤 경기를 시작하는 ‘엄마’ 주자가 된다. 그래서 세상이 전과 같이 굴러간다. 겉보기에는 그럴 듯한 그 가족들 속에는 말 못하고 분열되는 ‘자기’들이 많았다. 그래서 가족은 세상을 지탱해주는 벽돌이지만, 그 곪은 속에서 서로를 수백 번, 수천 번씩 죽이는 원흉이 되기도 했다.

 

“우리가 우리를 속이지 않을 때” 

 

샌드라 스카(Sandra Scarr)는 <어머니의 양육과 타인의 양육>(박철용 역, 서원)에서 질문한다.

 

“왜 어린 아동의 어머니가 자녀에 대한 불확실한 의무와 책임 때문에 고통 받고 있는가? 왜 이 사회는 남성이 하기에 적당한 일에는 그리 명백하면서 전통적인 여성의 일로부터 조금 떨어진 일들에서는 그리 불명확한가?”

 

“지역 사회가 어떠한 탁아정책을 마련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들 각자가 사회적 문제를 개인적으로 풀어야만 한다는 것을 뜻했다. 그리고 우리는 취업모에 대한 지역사회의 태도를 거의 바꾸지 못했다. 우리는 단지 남자들이 만든 규칙에 따라 게임을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현재 우리 취업모는 여성이 유아의 어머니일 때 여성과 아동이 필요로 하는 것을 거부하는 체제 속에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책이 그 체제를 바꾸는 것에 일조하기를 희망하고 있다.”(서문 가운데)

 

“비취업모들은 대개 직장을 가진 어머니를 부러워하며 집에 남겠다고 한 자신의 결정을 탁아의 적합성을 의심함으로써 정당화할 필요가 있다. 취업모들은 비취업모들이 그들의 아이들과 함께 나누는 시간을 부러워하며 그들의 자녀들의 성장과 비취업모의 아이들의 성장을 마음을 졸이며 비교한다. 80년대에 우리는 어머니의 취업이 어떤 사람의 실질적인 만족에 주는 비용과 혜택을 해결하지 못했다. 나는 이 문제의 미해결이 어머니가 직장을 갖거나 혹은 집에 머물러 있을 때 보여지는 실질적으로 좋거나 나쁜 효과들보다는 여성과 아동에 대한 상충하는 문화적 가치로부터 온다고 생각한다.”

 

<어머니의 양육과 타인의 양육>(원제: Mother Care Other Care, 1984)은 취업여성에게 가해지는 불필요한 죄책감, 한 물 간 시대적, 심리학적 통념들이 미치는 해악들, 탁아가 아동에게 미치는 실제 양상, 연구들이 보여주는 것과 보여주지 않는 것, 현대 가족의 여러 모습들, 어머니와 다른 사람에 의한 좋은 양육의 특질을 설명한다.

 

이 책은 신화와 싸운다. 그리고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애쓴다. 사회 통념인 문화적 가치들의 지체 때문에 현재에 사는 사람들이 불필요한 고통을 겪기 때문이다.

 

여성과 아동은 어떤 모습이어야 한다는 세상의 통념은 한 세기 전의 것이다. 그 속에는 지금 살아 있는 여성과 아동의 모습이 없다. 문화적 고정관념과 싸우고 바꾸지 않고서는, 빈 방에서 아이에게 영어로 사물의 이름을 종일 중얼중얼 알려주고,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밤새 가슴을 치면서 기도하는, 미쳐가는 엄마 노릇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당연히, 문화적 가치를 바꾼다는 것은 함께 솔직하게 토로하고 서로의 눈물과 웃음이 같은 색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 그리고 함께 외칠 말이 있다는 걸 깨닫는 데서 시작한다.

▣ 안미선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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