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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르타뉴에서 보낸 편지> 16. 브르타뉴의 성곽 도시들④
‘하늘을 나는 교실’의 필자 정인진님이 프랑스의 서북부 브르타뉴 지방에서 머물면서 보고 느낀 것들을 기록한 ‘브르타뉴에서 온 편지’ 연재 www.ildaro.com
기원전 56년, 로마인들에 의해 세워진 도시
반느(vannes)를 찾았을 때는 유난히 햇볕이 좋은 4월이었다. 평소 브르타뉴 지역의 날씨를 감안해 스웨터에 점퍼까지 챙겨 길을 나섰다가, 너무 더워서 하나씩 벗어 던졌지만 마지막으로 입은 긴 팔 티셔츠는 벗을 길이 없어 땀을 흘리며 쩔쩔 매며 다녔던 기억이 생생하다.
▲ 반느의 동쪽 성곽. ‘뿌드리에르(Poudriere)탑’과 ‘꼬네타블(Connetable)탑’이 보인다. ©정인진
반느가 위치한 ‘모르비앙만’(Golfe du Morbihan)은 브르타뉴 말로 ‘작은 바다’라는 뜻이다. ‘께르빵이르곳’(Pointe de Kerpenhir)과 ‘나발로’(Navalo) 항구가 맞닿을 듯 끌어안고 있는 만 안에는 수십 개의 섬들이 산재해있다.
모르비앙만은 온화한 해양성 기후의 영향 아래, 브르타뉴에서도 특별히 지중해성 기후 성향을 띄는 곳으로 유명하다. 이런 온화한 날씨 덕분에 이 일대에는 브르타뉴의 다른 어떤 지역보다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문명을 이루며 살았던 흔적이 많이 존재한다. 그 중심에 반느가 있다.
반느는 기원전 56년, 고대 골민족의 하나인 베네트(Venete)족을 누르고 로마인들에 의해 세워진 도시이다. 로마인들이 지배할 당시, 진정으로 브르타뉴의 중심지 역할을 한 곳은 반느였다. 그러나 5세기 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는 쇠퇴해 변두리가 되고 만다. 중세 동안에는 성벽 안을 중심으로 아주 조금의 발전이 있었고, 브르타뉴에서 주교가 상주하는 몇 안 되는 도시 중 하나였다.
또 1532년에는 프랑수와1세가 브르타뉴와 프랑스 결합 협정을 준비하기 위해 반느에 머물기도 했고, 17세기 말에는 브르타뉴 의회가 열려 활기를 되찾기도 했다. 이 시기에 특색 있는 건물들이 지어지고 성벽 밖까지 도시가 넓혀진다. 철도가 개통되고 현재 시청과 경시청, 법원 건물이 들어서고 성벽을 우회하는 길들이 정돈된 것은 19세기 후반의 일이다.
오늘날 반느에는 6만4천 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성곽 내 아름다운 구 시가지와 근처에 있는 모르비앙만 덕분에 관광도시로서 가치가 높다.
오랜 역사를 가진, 특색 있는 꼴롱바주 집들
반느 기차역에 내려, 중심가를 향해 ‘퐁텐느길’(rue de la Fontaine)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그 길 끄트머리에서 가장 먼저 우리를 반기는 건 오래된 꼴롱바주 집들이다. 나무 기둥들이 예쁘게 색칠된 꼴롱바주 집들을 발견했다면, 반느의 중심가를 잘 찾은 것이다. 이 집들 앞에서 발길을 멈추지 않을 수 있을까? 이 길에 있는 꼴롱바주 집들이 반느에서 가장 오래된 것들이라고 한다.
▲ 반느의 퐁텐느길(rue de la Fontaine) 끝에 있는 꼴롱바주 집들 © 정인진
이 집들 바로 옆에 있는 ‘생-파텡 성당’(Eglise Saint-Patern)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아, ‘생-파텡길’(rue Saint-Patern)을 따라 펼쳐져 있는 꼴롱바주 집들을 보는 것도 놓칠 수 없다.
이 길에는 17세기 이후에 유행한 일자형의 간단하고 소박한 양식의 꼴롱바주 집들이 줄지어 서 있다. 색색으로 채색된 나무 기둥의 집들을 조금 높은 지대에 위치한 생-파텡성당 마당을 가로지르며 바라보는 것도 아름답다. 특히 이 날은 햇볕까지 좋아서 다른 어떤 도시에서보다 꼴롱바주 집들 앞에서 감탄했던 것 같다.
현재도 반느에는 14세기말부터 19세기에 걸쳐 건설된 170 여채의 꼴롱바쥬 집들이 남아 있다고 한다. 이들 가운데 35채는 1380년~1500년 경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되며, 약 30채는 16세기에, 나머지 105채는 17~19세기 사이에 지어졌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런 만큼 성곽 안팎으로 꼴롱바주집들을 발견하기가 어렵지 않다. 반느 사람들은 성벽 한 가장자리에 있는 오래된 빨래터(1817~1821년)조차 꼴롱바주 형태로 복원해 놓았다.
역사 문화유산으로 보존되어온 반느의 성곽
반느를 소개할 때 성곽을 빼놓고 얘기할 수 있을까? 반느의 가장 중심가는 성곽으로 잘 둘러쳐져 있다. 3세기, 로마인에 의해 도시는 성벽으로 둘러싸인다. 이 성벽은 이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건립되었다고 하는데, 당시 흔적을 아직도 성곽 일부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성곽은 14세기 말에 재건된다.
반느는 오랫동안 공작령 도시였다. 1341년부터 1364년 사이에 있었던 ‘브르타뉴의 계승전쟁’(Guerre de Succession de Bretagne)으로 공작은 파산을 하고, 두 공작 가문 사이의 싸움에서 반느는 쟝 4세에게 여러 차례 포위당한다. 이 계승전쟁의 승리자인 쟝 4세는 반느에 ‘에르민느 성’(Chateau d l’Hermine, 1380~1385년)을 건설하는데, 이 때 이미 존재해 있던 도시의 성벽을 확장하기 시작한다.
반느의 성곽 확장 공사(14~15세기)는 쟝 5세까지 이어진다. 성벽이 남부, 항구가 있는 지역까지 넓혀지면서 반느는 매우 활기 넘치는 도시가 된다. 현재 성벽은 1928년부터 역사 문화유산으로 분류돼 보호되고 있다.
한편, 공작의 주거를 목적으로 세운 ‘에르민느 성’은 아직도 성벽을 끼고 그 위용을 자랑하며 서 있다. 성의 이름인 ‘에르민느’는 ‘담비’를 뜻하는 단어로, 담비는 1381년부터 브르타뉴 공작 가문의 공식 문장으로 사용되었다. 이런 이유로 담비는 반느의 상징이 되었고, 이후에는 브르타뉴의 상징으로 발전한다. 오늘날도 브르타뉴의 많은 지역의 도시 문장에는 담비가 그려져 있다. 브르타뉴의 깃발에 새겨진 검은 무늬 역시 담비를 형상화한 것이다.
▲ 반느의 장터. 중앙에 검은 깃발이 브르타뉴 깃발, 그 아래 담비가 그려진 빨간 건 반느의 도시 깃발이다. © 정인진
동쪽 성벽 밖으로는 식물들을 기하학적인 모양으로 손질한 전형적인 프랑스식 정원이 넓게 자리해 있다. 그곳에서는 시민들을 위한 행사들이 많이 벌어진다. 내가 반느를 방문한 날도 한 사진작가의 전시회가 그 정원에서 열리고 있었다.
또 성곽 남쪽, 생-뱅상(Saint-Vincent)문을 사이에 두고 반원 형태를 띠고 있는 ‘강베타 광장’(la Place Gambetta)은 항구를 향해 활짝 열려있었다. 19세기에 건설되었다는 광장 위에 넓게 자리 잡은 카페 테라스에는 햇볕을 즐기며 차를 마시는 사람들로 활기 넘치는 분위기였다. 그들을 보자, 나도 좀 앉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모르비앙만’을 향해 탁 트인 항구를 보니, 좀더 걸어야 할 것 같았다. 항구에는 레저용 소형 돛단배들이 가득 정박해 있었다. 16~17세기 반느의 항구는 매우 활기 있었다고 한다. 보르도의 포도주와 샤랑트(Charente)의 돌들이 이곳을 통해 수입되었고, 밀과 소금 같은 이 지역 생산물들이 이 항구를 통해 나갔다.
집들 사이에 성벽이 숨겨져 있어
내 생각에 반느 성곽의 가장 특색 있는 점은 성벽에 딱 달라붙어 있는 집들이 아닌가 싶다. 성곽의 3/4이 보존되어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 둘러볼 수 있는 부분은 그에 훨씬 못 미친다. 지도를 들고 탑들을 둘러보고,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며 성벽을 따라 걷다가, 툭 끊어진 자리에 도착했다. 분명 성벽이 존재한다고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는데, 감쪽같이 사라져 잠시 우왕좌왕했다. 이 작은 도시에서 길을 잃었을 리도 없는데, 성벽이 사라진 것이다.
▲ 프리종(Prison)문 앞, 집들이 성벽에 딱 붙어 지어진 모습을 볼 수 있다. © 정인진
그냥 포기하고 주변 상점을 기웃거리며 걸음을 이어나갔다. 그러다가 다시 한 작은 성문이 보여 가까이 가보니, 그 주변으로 성벽이 둘러져 있었다. 성벽이 집들 사이에 숨겨져 있던 거였다. 그 근처 집들은 모두 성벽에 바짝 붙어 옹기종기 자리해 있었다. 그러나 울 안 깊숙하게 숨겨진 성벽을 확인할 길은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 조사해보니, 17세기부터 ‘포테른느 문’(Porte Poterne) 주변은 집을 지을 수 있도록 성곽의 일부를 팔거나 임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성벽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것은 안타깝지만, 성곽이 주택가 속에 숨겨진 도시도 흔한 것은 아니어서 재미있게 생각되었다.
실제로 브르타뉴를 여행하다 보면, 성곽 위에 떡 하니 얹혀져 있거나 성벽에 몸을 기댄 집들을 발견하기가 어렵지 않다.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슬쩍 성벽에 기대거나 과감히 성곽 위로 올라가 집을 지었던 그들…. 난 이런 집들을 좋아한다. 집을 지은 사람들의 천진스러움이 늘 투박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성 안 전체가 활기찬 시장으로 바뀌는 풍경
마침 반느를 방문한 날은 일주일에 한번씩 서는 장날이었다. 성 안은 온통 상인들이 쳐놓은 천막들과, 반느는 물론 주변 마을에서 장을 보기 위해 몰려든 인파로 가득했다. 사람들의 물결에 공연히 나까지 흥겨워져서 장인들이 만든 특산품들과 주변 농가에서 들고 나온 풍미 있는 먹을 거리들을 기웃거렸다.
▲ 반느에서는 매주 목요일 오전에 장이 선다. "AB"라고 쓴 초록 표지판이 프랑스의 유기농 인증마크다. © 정인진
전통시장이 쇠퇴해 가는 와중에도 브르타뉴에서는 이렇게 도시 전체가 시장으로 바뀌는 풍경을 종종 목격할 수 있다. 특히 이런 장에는 유기농 농산물과 가공품을 파는 상인들이 점점 늘고 있는 추세다. 가격으로 경쟁할 수 없는 대형마트에 대항해 브르타뉴 농부들은 유기농 생산물로 경쟁력을 강화해가고 있다. 또 브르타뉴에서 열리는 시장에서는 생선가게들도 눈에 띈다.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 지역인만큼, 늘 장에는 싱싱한 생선들이 푸짐하게 쌓여 있다. 아무 것도 사지 않아도 이런 장을 구경하는 것은 늘 즐겁다.
그러고 보면, 맑은 햇살 아래 빛나는 꼴롱바주 집들보다, 넓게 펼쳐진 강베타 광장의 카페 테라스보다, 이 장터에서 더 출렁이는 햇볕과 활기를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난 시장 인파 속에서 당시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은, 로마시대 반느 시장 풍경을 잠깐 본 것도 같다. 반느 사람들의 삶이 이어지고 있는 역사의 물결 속에, 내가 서 있었다. ▣ 정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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