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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르타뉴에서 보낸 편지> 19. 들풀 보기를 화초와 같이 하라
‘하늘을 나는 교실’의 필자 정인진님이 프랑스의 서북부 브르타뉴 지방에서 머물면서 보고 느낀 것들을 기록한 ‘브르타뉴에서 온 편지’ 연재 www.ildaro.com
가을날 아삐네 호수 산책하기
브르타뉴의 짧은 여름이 끝나고 가을로 접어들자, 아삐네(Apigne) 호숫가 모래사장도 한산해졌다. 물놀이 나온 사람들은 모두 떠났다. 호숫가를 산책하거나 조깅하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눈에 띌 뿐, 아삐네는 다시 들오리나 갈매기 같은 물새들이 차지했다. 이곳은 물새들이 주인인지도 모르겠다. 자유롭게 물가를 헤엄쳐 다니는 새들을 보자, 들떴던 7~8월의 기분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평안한 마음이다.
10월로 접어들면, 브르타뉴는 햇볕 좋았던 날이 언제였던가 싶게 아침 저녁으로 선뜩선뜩한 바람이 분다. 또 여름 내 멈췄던 비가 사나흘씩 본격적으로 내리기 시작하는 때도 이쯤이다. 몇 일째 내리던 비가 개고 바람까지 멎은 날이면, 아삐네 호수로 산책을 가는 게 좋다.
렌에서도 ‘클뢰네’ 마을에 살게 된 것을 큰 행운이라고 여기는 가장 큰 이유는 아삐네 호수가 가까이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집에서 걸어서 1시간 거리에 아삐네 호수가 있다. 오고 가는 데 2시간, 호수 가장자리를 한 바퀴 도는 데 30분을 합해 2시간 30분 걸리는 호수 산책은 운동 시간으로 매우 적당하다.
게다가 아삐네 호수를 가기 위해 관통해야 하는 참나무 산책로인 ‘게리내’(Guerinais)와 ‘토피내’(Taupinais)를 걷는 것도 즐거워, 아삐네 호수에 가는 걸 정말 좋아한다.
산책로에서 즐기는 채집 생활
그런데 아삐네 호수를 다녀오는 것이 2시간 30분만에 끝날 때는 무척 드물다. 그 이유는 아삐네 호숫가와 토피내 산책로에는 채집할 것이 매우 많기 때문이다.
▲ 아삐네 호숫가, 산딸기들이 들판 가득 열려 있다. 산딸기 따는데 열중인 나. ©정인진
이른 봄이면, 호숫가 한 편에는 야생 무들이 싹을 띄운다. 지난해 한 노부부가 노란 꽃봉오리가 맺혀 있는 여린 줄기를 따는 걸 보고 다가가 ‘뭐냐’고 물은 적이 있다. 노부부는 ‘야생 무’라는 사실을 알려주면서 ‘날로 샐러드를 해먹어도 맛있고, 생선 비린내를 잡아주기도 한다’며 야생 무 순의 쓰임에 대해 덧붙여 주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도 내내 속으로는 총각김치를 생각했다.
무가 없는 총각김치가 되겠지만, 원래 총각김치는 무보다 무청이 더 맛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나로서는 도전해 볼만한 것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무꽃 순을 원하니, 경쟁자도 없고 그들에게 피해를 주지도 않으니 마음 편하게 여린 잎, 거친 잎 가리지 않고 뚜벅뚜벅 꺾어와 김치를 담았는데, 예상이 적중해 정말 맛있는 김치가 되었다.
그 뒤 민들레잎을 따와 샐러드에 곁들이기도 했고, 냉이를 한웅큼 캐서 무쳐먹기도 했다. 그러나 민들레는 산책 나온 개들이 뛰어다니는 들판에 피어있다는 것을 알고, 더는 먹지 않았다. 냉이도 우리 나라에서 나는 것과 똑같이 생겼지만, 향도 맛도 그 맛이 아니어서 실망하고는 더 시도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름이 되면 아삐네 호숫가 들판 가득 열리는 산딸기는 포기할 수 없었다. 8월 말에 수확할 수 있는 산딸기는 개똥을 걱정할 만큼 낮게 자라지도 않는 데다, 검붉은 빛을 띄는 잘 익은 열매는 한국에서도 먹어본 적 없는 맛있는 맛이었다. 나는 손가락이 시커멓게 되도록 산딸기를 따와 요구르트에 넣어 먹기도 했는데, 봉지에 따 담은 걸 돌아오면서 우적우적 모두 먹어 치울 때가 훨씬 많았다.
그리고 10월이면, 밤의 계절이다. 아삐네를 갈 때는 게리내 산책로를 이용하지만, 10월에는 게리내 옆의 토피내 산책로를 통해 집으로 돌아올 때가 많다. 참나무만 가득 자라고 있는 게리내와 달리, 토피내 산책로에는 밤나무가 많기 때문이다. 엄지 손톱만한, 꼭 우리 나라 토종 밤만한 크기의 토피내 밤들은 맛이 참 좋다.
이곳 사람들이 밤을 안 먹는 게 아닌데, 신기하게도 토피내에서 밤을 줍는 사람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 야생 무는 말할 것도 없고 산딸기도 커다란 통을 챙겨와 따가는 사람들을 여러 차례 보았지만, 밤은 탐내는 사람이 없어 이곳 밤들은 늘 내 차지가 되었다.
제초제 대신 사람의 손길이 닿는 ‘풀 뽑기’
1년 내내 렌에서 채집 생활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건 농약을 뿌리지 않는 덕분이다. 렌은 현재 시 전체 공유지에 농약과 제초제를 전혀 치지 않고 있다. 지난 20년 전부터 렌은 살충제 사용을 줄이기 위해 애써왔다.
1981년 시의 녹색공간을 다르게 관리하기로 마음 먹은 이래, 1994년에는 가로수나 인도의 제초제 사용을 금지했다. 2001년에는 레베크(L’Eveque) 읍의 ‘라 투슈’(La Touche) 구역이 ‘무농약 마을’을 시작했고, 2005년에는 묘지들을 제외한 렌 전 지역에 살충제를 금지하기에 이른다. 또 2011년에 몇몇 공동묘지를 시작으로, 2012년부터는 렌의 모든 묘지에서 살충제를 쓰지 않고 있다. 1996년만 해도 1년에 농약을 775kg 사용했는데, 현재는 전혀 쓰지 않고 있다고 한다.
▲ 앞서서 사람들이 도로 위로 밀쳐놓은 잡초들을, 청소차가 거둬가고 있다. ©정인진
가로수와 인도에 제초제 사용을 금지한 덕분에, 잡초 제거하는 모습을 길에서 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먼저 괭이나 작은 기계로 사람들이 일일이 인도나 도로 가장자리의 풀을 깎고 지나가면, 뒤를 이어 어깨에 맨 방풍기를 이용해 제거한 풀을 도로 위로 밀쳐놓는다. 그럼, 마지막으로 청소차가 지나가면서 도로에 펼쳐진 잡초들을 거둬가는 식으로, 시 전체 인도와 도로 가의 풀들을 제거하고 있다. 가끔 쭈그리고 앉아 하나하나 풀뿌리까지 뽑는 작업도 잊지 않는다.
이곳 브르타뉴는 비가 자주 내려, 뽑고 돌아서기 무섭게 풀이 금방 자라 있다. 그러니 길가는 물론, 잔디가 깔린 공원이나 운동장 등 녹지공간들의 제초 작업은 숨가쁘게 돌아가는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일이 사람 손으로 하는 작업이다 보니, 일하는 이의 마음이 엿보일 때가 있다. 우리 집 옆 시민운동장 가장자리는 흰 데이지꽃이 한 가득 피는 여름엔 베지 않는다. 가끔 말끔히 단장된 인도에 키 작은 들꽃 한 포기가 담장 아래 그대로 있을 때도 있다.
이런 정다운 마음이 표현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담을 수 있는 시스템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사람들의 손길이 남기고 간 작은 들꽃들을 보면서 하게 된다. 이 일들을 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인력이 요구될 테니, 일자리 창출의 의미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논란 속에 실시된 ‘묘지 살충제 금지’
한편, 지난해부터 시작된 모든 묘지의 살충제 금지 조치는 아직 많은 논란을 일으키며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렌의 묘지들에는 이용자들의 건강을 보호하고 지하수 오염을 막으며, 나아가 생물 종의 다양성을 추구할 목적으로 자연적인 방법을 채택했다고 알리는 안내판이 입구마다 설치되어 있다.
▲ 살충제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공간임을 알리는 한 묘지의 안내판. © 정인진
묘지 관리 방법도 인도에서 하는 방법과 크게 다르지 않아, 괭이나 풀 뽑는 기계를 이용해 주기적으로 잡초를 제거한다. 이에 덧붙여, 가는 자갈이나 모래가 깔려 있는 장소에는 나무를 심거나 잔디를 깔 것을 권하고 있다. 또, 묘지 안의 오솔길에는 지역의 꽃들로 단장을 해나가고 있다. 이러한 조치는 묘지를 지금보다 더 자연친화적인 녹지 공간으로 만들어 나갈 것이다.
그러나 묘지에 풀이 웃자라 있을 때는 고인들의 무덤을 방치한 듯한 불편한 마음을 불러일으키고, 빨리 풀을 베지 않아 모기들이 들끓는다는 인근 주민들의 민원이 빗발치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실제로 1994년에는 4백명의 정원사들이 4백 헥타르(ha)의 녹지를 돌보았는데, 2012년 역시 정원사들은 여전히 같은 수이지만, 그들이 돌봐야 하는 녹지는 8백50헥타르(ha)로 그 범위가 크게 넓어졌다고 한다. 그러니 일손을 더 늘려야 할 형편은 분명해 보인다.
경제적인 가치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풀을 베는 하찮은 일에 이렇게 많은 인력을 집중시키는 것이 어리석어 보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이런 시 정책 덕분에 시민들이 좀더 건강한 생활을 할 수 있고, 게다가 방역방제 작업으로 건강을 해치는 노동자들이 없으니 더 좋은 일이 아닌가 싶다.
렌 시는 들풀들이 화초들과 뒤섞여 있는 것을 보아주고 웃자란 풀을 불편하게 바라보지 않는 시선을 갖도록, 나아가 벌레들과 생활을 나누는 방향으로 사람들의 인식이 변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 정책을 밀어나가고 있다. ▣ 정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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