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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르타뉴에서 보낸 편지> 브르타뉴의 성곽 도시들⑤
‘하늘을 나는 교실’의 필자 정인진 님이 프랑스 서북부 브르타뉴 지방에서 머물면서 보고 느낀 것들을 기록한 ‘브르타뉴에서 보낸 편지’가 연재됩니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프랑스에서 “들러볼 만한 매우 아름다운 곳”
브르타뉴에 짐을 풀고 가장 먼저 가본 곳이 비트레(Vitre)다. 그 많은 브르타뉴의 도시들 중에서 비트레에 가장 먼저 갔던 건, 우연한 일이었다. 프랑스에서 전문 무용수로 활동하는 한 한국 친구가 그곳에서 공연이 있다며 초대를 해주었다. 오랜만에 친구도 만나고 비트레도 구경할 겸해서 갔지만, 이 작은 동네에는 그다지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 성 앞 광장에서 보이는 비트레 성(Chateau de Vitre)의 성채와 도개교(le pont-levis) © 정인진
그러나 기차역에서부터 먼 발치로 보이는 웅장한 고성은 예사롭지 않은 느낌이었다. 천 년이 넘은 거대하고 육중한 느낌의 비트레 성은 마치 “잠자는 숲 속의 공주”가 자고 있었던 성이 저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하는 느낌을 준다. 비트레에 도착하자마자 장중하고 위용이 있는 성의 모습에 놀라고, 골목에 촘촘히 줄지어 서있는 15~16세기의 오래된 꼴롱바주 집들에 눈이 휘둥그래졌던 기억이 난다.
한 마디로 비트레는 서양의 중세 어느 지점에 떨어진 듯한 느낌을 주는 곳이다. 게다가 그날은 날씨도 춥고 간간히 비까지 뿌려져, 중세의 어둡고 을씨년스러운 느낌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했다.
비트레를 다시 찾은 건 지난해 가을 햇볕이 유난히 좋았던 어느 일요일이었다. 맑은 햇볕 속에서 다시 보니, 을씨년스러운 느낌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고풍스럽고 낭만적인 느낌마저 주었다.
푸제흐(Fougeres)처럼 비트레도 옛날 프랑스와 브르타뉴의 국경에 위치한 ‘막슈 드 브르타뉴’(les Marches de Bretagne, 브르타뉴의 변방들)의 한 도시이다. 성을 비롯해 중세의 문화유산들로 넘쳐, 프랑스에서 ‘예술과 문화의 도시’로 분류되어 있고 ‘들러볼 만한 매우 아름다운 곳’ 목록에도 올라 있다.
고풍스런 위용을 갖춘 비트레의 요새성
▲ 북쪽 성 밖에서 올려다 본 비트레 성의 ‘몽타필랑 탑’(La Tour de Montafilant)
‘브르타뉴의 변방’(les Marches de Bretagne) 도시들이 보통 그러하듯이 비트레에도 유명한 요새성이 있다. 이 성은 브르타뉴의 어떤 성보다 아름답고 완벽한 모습으로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비트레 성’(Chateau de Vitre)은 빌렌느강 발치 아래 위치한 두 계곡 사이에, 높이 솟아있는 넓은 편암 위에 세워졌다. 이런 이유로 물이 없는 깊은 해자(성 주위를 깊게 둘러싼 못)로 둘러싸여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성은 일에빌렌느 지역에서 돌로 건설된 첫 번째 성으로, 유적 발굴 조사를 통해 그 축조 연대가 1060년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에 세워진 성은 나무로 만든 것이었다. 그것을 13세기에 들어와 앙드레 3세(Andre III) 남작이 돌로 다시 짓는다. 오늘날과 같은 커다란 둥근 망루를 위시한 삼각 형태의 기초를 다진 건 바로 이때였다.
15세기에 비트레 성은 다시 라발(Laval) 가문의 ‘기 12세’(Guy XII)에 의해 더 넓혀진다. 성채(le chatelet, 두 개의 탑 사이에 성문이 있고 그 위에는 주로 주거공간이 딸려 있는 건물 형태)와 ‘마들렌느 탑’(La Tour de La Madeleine), ‘생-로랑 탑’(La Tour Saint-Laurent)이 세워진 것은 이 시기이다. 이들 건물이 세워지면서 비트레 성은 오늘날의 위용을 갖추게 된다.
성채의 웅장한 두 탑을 사이에 두고 깊은 계곡의 해자 위에 놓인 도개교(le pont-levis)는 특히 인상적이다. 독특하게도 성문은 두 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좁고 작은 문은 보행자들이 드나들 때 사용되었고, 다른 넓고 큰 문으로는 기사들과 짐수레가 드나들었다고 한다.
1487년 프랑스의 공격을 받았을 때, 라발 가문의 ‘기 15세’(Guy XV)는 전투 없이 프랑스 군대에 성문을 열어준다. 이로써 요새로서의 비트레 성의 역할은 역사 속에서 끝이 난다. 1530년대에는 르네상스식의 ‘작은 예배당과 외랑’(L’Oratoire et Les Loggias)이 세워지는데, 렌에 페스트가 창궐한 1564년, 1582과 1583년에는 이곳이 브르타뉴 의회로 쓰이기도 했다.
16세기 이후 비트레 성은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며 그들의 주거지로 쓰이기도 하다가 방치되어 무너지고 만다. 그랬던 것을 1820년 지방정부(departement)가 매입해, 역사문화유적으로 분류해 보호하고 있다. 형무소로 사용된 적도 있고, 여러 번의 복원 공사를 거쳐 현재는 박물관과 시청으로 사용되고 있다.
상업과 국제무역으로 번영했던 성곽도시
▲ 지붕과 맨 위 층을 아르두와즈 돌편으로 감싼 한 꼴롱바주 집. 여관과 크래프 식당을 겸하는데, 비트레를 소개하는 책자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아름다운 집이다. 그 옆으로 건물 전체에 아르두와즈 갑옷을 입힌 집도 살짝 보인다. © 정인진
성 밖의 도시는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다. 성이 건설된 직후인 13세기에 비트레는 돌로 된 성벽으로 둘러쳐진다. 현재도 절반 가량 북쪽과 동쪽의 계곡을 낀 부분이 잘 보존되어 있지만, 기차역으로 향한 남쪽 부분은 모두 파괴되어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이미 건물들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는 도시 한복판에 성벽을 복원시킬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그러나 상점들을 기웃거리며 시내를 구경하다 한 쇼핑센터 안에서 성벽의 흔적을 발견했다. 쇼핑센터 지하에 있는 성벽과 망루의 유적들을 조금이나마 볼 수 있도록 유리창을 설치해 놓았다. 유리 안 쪽으로 제법 큰 규모의 성벽과 한 망루의 옛 모습이 보였다. 어두워서 눈을 크게 뜨고 유리창에 딱 붙이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지만, 문화유적과 현재의 삶이 공존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는 모습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일요일이라 상점의 문이 닫혀 있어서 좀더 자세하게 유적지를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안타까웠다.
특히 비트레에는 15~16세기 해상무역가들의 생활모습을 잘 보여주는 꼴롱바주 건물들이 줄지어 서있는 골목길이 잘 보존되어 있다. 꼴롱바주 집들 중에서도 반원형 문을 가진 집, 상부 돌출의 삼각뾰족지붕을 가진 집, 아르두와즈로 갑옷을 입힌 집들이 특색 있기로 유명하다.
16세기부터는 상업도시로서 번영했던 비트레는 배의 돛이나 상품포장용으로 쓰이는 큰 폭의 대마천 생산지로 유명했다. 이곳 상인들은 대마천의 국제무역을 담당했는데, 상품은 영국, 플랑드르, 독일, 스페인, 포르투갈, 멀리 라틴아메리카까지 수출되었다고 한다. 이런 번영 속에서 당시 비트레는 6~7천명의 주민이 살았다. 이 숫자는 렌의 절반에 해당하는 인구였다고 한다.
그러나 17세기부터 직조 산업은 몰락하고, 현재는 농업과 유제품의 생산지로 활기를 띠고 있다. 이 생산품을 바탕으로 1970년대부터는 농산물 가공과 신발 산업으로 활기를 되찾는다.
순례자도 빌렌느 강가에선 발길을 멈출 것이다
▲ 비트레 거리에 박혀 있는 ‘몽생미셀 길’ 표지판, 몽생미셀과 지팡이 위로 ‘산티아고 꽁포스텔라 순례’를 상징하는 조개 문양이 있다. © 정인진
한편, 비트레는 옛날 몽생미셀로 향하는 순례길의 한 길목이기도 했다. 도시 중앙 골목길 바닥 곳곳에는 ‘몽생미셀 길’(Les chemins de Saint-Michel)을 표시하는 구리징들이 박혀있다. 이 순례길은 오래 전부터 존재했지만, 1998년부터 다시 찾고 복원해 2009년에는 유럽 전역으로 이어지는 길들이 구체적으로 완성되었다고 한다.
그 중 비트레를 통과하는 순례길은 영국인들이 몽생미셀을 거쳐 유명한 스페인의 ‘산티아고 꽁포스텔라’로 가기 위해 경유해야 하는 길이다. 그래서인지 원래 몽생미셀길 표지는 몽생미셀과 지팡이가 그려져 있는데, 비트레에 박혀 있는 것은 산티아고 꽁포스텔라를 상징하는 ‘조개’가 덧붙여져 있다. 그러니 옛날 비트레는 몽생미셀과 산티아고 꽁포스텔라로 향하는 순례자들이 만나는 곳이기도 했을 것이다.
조개가 덧그려져 있는 ‘몽생미셀 길’ 표지판을 따라 성을 끼고 북서쪽 경사지를 통해 성곽을 빠져나오면, 시내보다 훨씬 소박하고 전원적인 비트레 사람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마을이 눈앞에 펼쳐진다. 식당이나 호텔, 상점들로 가득 찬 시내와 전혀 다른 소박한 생활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몽생미셀 순례길’을 안내하는 구리징을 언제 놓쳤는지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내가 다시 비트레에 와봐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바로 이 길 때문이었다. 처음 비트레에 다녀온 후 관광안내소에서 받은 비트레의 다양한 정보들은 하나같이 성벽 밖 북쪽, 강가를 걷길 권하고 있었다.
길 옆, 물길 건너편으로는 거대한 규모의 ‘몽타필랑 탑’(La Tour de Montafilant)이 그늘에 싸인 채 시커멓게 버티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위용이 하도 장엄해, 누구라도 탑에서 쉽게 눈길을 떼지 못한 채 자꾸 뒤돌아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물길 옆으로 난 산책로에 접어들면, 탑에 눈길을 준 게 언제였냐 싶게 키 큰 과실수들과 관목들로 뜰이 가꾸어져 있는 소박한 집들의 울안을 자꾸 들여다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옛날 순례자들은 어땠을까? 갑자기 중세의 순례객들이 떠오른 건 바로 성 밖, 북쪽을 걸으면서였다. 내 생각에 비트레에서 순례객들은 발길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을 것 같다. 이 도시의 아름답고 편안한 분위기는 순례객들에게 하루나 이틀, 쉬어간들 어떨까 하는 마음이 들게 하지 않았을까? 생각하면서 이곳 비트레의 빌렌느강 발치 아래, 나도 숨을 고르며 앉아 있었다.
▲ 비트레 성 안에서 내려다 보이는 북쪽 마을의 모습. 소박하고 전원전인 풍경이 아름답다. © 정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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