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브르타뉴에서 보낸 편지> 13. 내 인생의 다정한 브르타뉴 사람들 

‘하늘을 나는 교실’의 필자 정인진님이 프랑스의 서북부 브르타뉴 지방에서 머물면서 보고 느낀 것들을 기록한 ‘브르타뉴에서 온 편지’ 연재 www.ildaro.com

남 프랑스의 몽쁠리에(Montpellier)라는 도시로 여행을 왔다. 몽쁠리에는 10여년 전 내가 어학연수를 했던 곳이다.
 
몽쁠리에로 가기 위해 이른 새벽 기차를 타고 오전 내내 프랑스 내륙을 달렸다. 브르타뉴의 목초지와 밀밭 풍경은 어느새 해바라기 밭으로 바뀌고, 햇살이 완연히 다르다고 느껴질 즈음에는 포도밭과 올리브밭이 차창 밖으로 펼쳐졌다. 창 밖이 온통 이런 풍경이라면 남부 깊숙이 접어든 것이다. 그러다가 기차에서 내려 역을 빠져 나와 햇빛에 후끈 달아오른 남부의 공기에 휘감기자, 남불에 도착했다는 것이 실감나기 시작했다.
 
몽쁠리에 주인집 할아버지, 무슈 꾸르꾸
 
오늘은 지중해변으로 해수욕을 하러 갔다. 여름 지중해를 보니, 몽쁠리에에 살던 때 해수욕을 하러 왔던 것이 기억났다. 나는 당시 방 한 칸을 세내어 살았던 주인집 할머니, 할아버지와 여름 방학 내내 바닷가에 왔었다. 늦은 아침식사를 하고 잠시 빈둥거리고 있으면 방 밖에서 할머니가 소리쳤다.
 
“인진, 해변에 가자!”
“네~!”
 
큰 소리로 얼른 대답하고는 간단한 것을 주섬주섬 챙겨, 늘 우당탕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주인집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잊지 않고 해수욕을 갈 때마다 나를 챙기셨다. 그 해 여름, 그렇게 자주 해수욕장에 다닐 수 있었던 건 모두 집주인 할아버지와 할머니 덕분이다.
 

▲ 한 꼴롱바주 건물에 새겨진 브르타뉴의 부부 모습. (Vannes에서)  ©정인진 
 
생각해보니, 그때 주인 할아버지는 브르타뉴 출신이었다. 젊은 시절 내내 브르타뉴에서 살다가 따뜻하고 햇볕이 좋은 남부 프랑스로 이사를 온 것이 10여년 전이라고 했다. 할머니도 무척 상냥한 분이었지만, 60대 중반의 꾸르꾸(Courcou)씨는 더욱 다정한 분이었다.
 
저녁식사 때마다 시원한 로제(rose)포도주를 한 잔씩 주셨기 때문에 그를 더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할아버지가 한 잔 하겠냐고 내게 물을 때마다, 망설이지 않고 그러겠다고 늘 잔을 내밀었다.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나도 로제를 한잔 정도 마시는 건 참 좋았다. 할아버지는 포도주를 따를 때마다 우리나라 식으로 잔을 두 손으로 바쳐 들고 있는 나를 늘 재미있어 하였다.
 
몽쁠리에가 있는 랑그독-루시옹(Languedoc-Roussillon)지방은 적포도주나 백포도주가 아니라 ‘로제’라 불리는 분홍빛 포도주의 생산지로 유명하다. ‘로제’는 백포도주처럼 냉장고에 넣었다가 시원하게 마시는 것이 특징인데, 꾸르꾸 할아버지 덕분에 나는 지금도 포도주 중에서 ‘로제’를 가장 좋아한다.
 
할아버지는 가끔 포도나무 가지치기를 하러 다니셨는데, 크게 소용될 것 같지도 않은 작은 포도나무 토막과 향이 좋은 향나무 토막을 잘라 내게 가져다 주기도 하셨다. 물론, 나는 이것들을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한번도 이런 걸 내가 얼마나 좋아하는지 말씀 드린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알고 나무토막을 주실 생각을 했는지 신기할 뿐이었다. 나는 한국에서도 이미 가로수 가지치기를 하는 곳에서 잘려 뒹구는 은행나무 토막을 주워다 책꽂이 앞에 장식을 했던 애였다.
 
하루는 이런 일도 있었다. 프랑스에서 첫 해, 1월에도 내내 들꽃들이 피어있는 남부 프랑스에서 ‘여기는 언제 겨울이 오나’ 생각하며 매섭게 추운 겨울을 기다리고 있던 어느 날 저녁이었다. 꾸르꾸 할아버지가 내게 말씀하셨다.
 
“인진, 이제 겨울이 끝났다. 봄이 올 거다!”
 
나는 그 말을 듣고는 놀란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말도 안돼요, 겨울이 가다니! 매일 매일이 가을 같았는데…. 겨울이 가다니요! 나는 겨울이 필요해요! 아주 춥고 건조한 그런 겨울이요!”
“허허! 그럼, 내가 인진이를 위해 겨울을 주문하도록 하지.”
 
이렇듯 꾸르꾸 할아버지와 나는 장단이 잘 맞았다. 그러나 그 분의 고향이 구체적으로 브르타뉴 어디인지 나는 모른다. 그분의 고향 도시를 아는 것이 뭐 그리 중요할까마는 꾸르꾸 할아버지의 고향을 여쭈어보지 않은 것을 요즘처럼 안타깝게 생각한 적이 없다.
 
릴의 기숙사에서 만난 상냥한 청년, 에띠엔느
 
브르타뉴 지역 출신과의 인연이 꾸르꾸 할아버지에서 끝난 것은 아니다. 북부 릴에서 유학을 할 때, 8개월 간 기숙사에서 함께 생활했던 상냥한 에띠엔느가 요즘 들어 부쩍 생각나는 건 그가 바로 브르타뉴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에띠엔느한테도 브르타뉴 어느 도시 출신인지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다. 그러고 보면, 그의 성조차 모른다.
 
당시 내가 살았던 기숙사는 10여 명이 지낼 수 있는 작은 규모의 시설이었는데, 외국인과 프랑스인, 학생과 직장인, 또 여성과 남성이 비교적 골고루 섞여 있었다. 에띠엔느는 직장 때문에 브르타뉴보다 산업이 발달한 북부로 이주한 젊은 청년이었다. 그는 주말에는 종종 브르타뉴에 살고 계신 부모님 댁을 방문하고 릴로 돌아오곤 했다. 브르타뉴에 갔다가 돌아올 때면, 에띠엔느는 부모님 농장에서 직접 짠 우유나 그가 좋아하는 곰팡이가 잔뜩 핀, 냄새조차 고약한 치즈들을 한아름 가져왔다.
 
에띠엔느의 방에는 커다란 브르타뉴 깃발이 걸려 있었고, 그는 브르타뉴 출신이라는 걸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 브르타뉴 지방의 언어와 문자가 따로 존재했다는 사실을 안 것도 그를 통해서였다. 에띠엔느는 어렸을 때 학교에서 배워 그 언어를 조금 안다고 했다.
 
에띠엔느가 고향으로 가지 않는 주말에는 브르타뉴에 살고 있는 애인인 마리-앙드레가 가끔 놀러 오기도 했다. 기숙사에 사는 외국인이라야 네델란드나 벨기에처럼 근처 출신들이 대부분이어서 그들조차 가족들과 주말을 보내러 자기 나라로 떠나면, 주말에는 나 혼자 기숙사에 남을 때가 많았다. 그럴 때 마리-앙드레가 오면, 에띠엔느와 마리-앙드레는 내게 함께 여행을 가자고 제안했다. 벨기에의 ‘브뤼쥬’와 ‘투르네’를 다녀온 건 바로 그들 덕분이었다.
 
그러면 나는 한국요리를 해서 그들을 식사에 초대하기도 했고, 마리-앙드레도 특별한 프랑스 요리를 해서 나를 초대하였다. 애인과 떨어져 1년을 살았던 에띠엔느는 릴에 집을 구했고, 마리-앙드레도 북부로 이주해 기숙사를 떠났다. 그 당시 상냥한 에띠엔느가 아니었다면, 기숙사 생활을 그만큼 즐겁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도움이 필요하세요?” 묻는 브르타뉴 시민들 

 ▲ 우리 동네 빵집의 파타시에(patissier) 아저씨들.    © 정인진 

그리고 다시 지금 이곳 렌에서 상냥한 브르타뉴 사람들을 만나면서 산다. 나는 프랑스의 다른 지역에서 살아보기도 하고 여행도 많이 해보았지만, 브르타뉴인들만큼 친절한 사람들을 본 적이 없다. 길을 잘 확인하기 위해 거리에서 지도를 펼쳐 들기라도 하면 “도움이 필요하세요?” 라고 물으며 어디선가 바로 사람들이 나타나 먼저 친절을 베푸는 것을 경험한 곳은 브르타뉴가 유일했다. 그래서 이곳에 도착한 초창기에는 지도를 꺼내기조차 눈치가 보였다.
 
또 길을 건너기 위해 횡단보도 앞에 잠시 멈추면, 지나가던 차들이 바로 멈추는 곳도 브르타뉴가 처음이다. 다른 지역의 운전자들도 길을 건너려는 사람 앞에서 차를 멈추는 일은 많았지만, 브르타뉴 사람들은 길 가장자리에 서 있기만 해도 차를 멈추고 건너라는 손짓을 할 때가 많다. 한 번은 빨간 신호등에서조차 건너가라며 차를 멈추는 당혹스러운 상황을 경험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내가 감동하는 건, 시 정책에서도 친절한 면모를 보인다는 것이다. 내가 살아본 경험이 있는 도시인 몽쁠리에나 릴은 ‘꽁트롤레르’(controleur)라고 불리는 검사원들이 불시에 버스나 지하철에 들이닥쳐 차표를 검사할 때가 있다. 평소엔 자율적으로 차표를 기계에 찍게 되어 있어, 학생들 중에는 버스비를 내지 않고 타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 하지만 버스검사관이 들이닥쳤을 때 차표가 없는 사람은 차비의 2백~3백배를 벌금으로 지불해야 한다. 그 자리에서 수표를 쓰지 못하는 사람들은 경찰서로 끌려 간다.
 
렌 지역이라고 해서 버스검사관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렌은 불시에 차표를 검사하는 검사원은 없다. 젊은 아르바이트생들이 가끔 버스나 지하철 입구에서 차표를 검사할 때가 있을 뿐이다. 그러니 차비가 없는 사람은 차를 안 타면 되고, 또 차비를 내지 않으려고 생각했던 사람은 마음을 고쳐먹고 버스 운전사나 지하철 자판기에서 표를 사면 되니, 엄청난 벌금을 물을 일은 절대로 생기지 않는다. 나는 렌 시의 이런 교통정책에서조차 상냥한 브르타뉴의 모습을 읽는다. 

▲  브르타뉴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담은 작품. (브르타뉴 박물관)   © 정인진 
 
세월이 지나서는 그리운 사람이 되어 있는 몽쁠리에의 꾸르꾸 할아버지와 릴의 에띠엔느처럼, 다시 한참 세월이 지나면 브르타뉴를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내게 마을 주민이기도 하고 이웃이기도 했던 브르타뉴 사람들을 그리워할지도 모르겠다. (정인진)
 
        저널리스트들의 유쾌한 실험!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댓글
댓글쓰기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