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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조선을 사랑한 일본 제국의 아나키스트. 일본인이자 조선인 독립운동가를 사랑했으며, 천황제에 반대하기 위해 황태자에게 폭탄을 던지려 했다는 죄목으로 사형언도를 받은 여자 가네코 후미코를 소개하는 말이다. 그녀는 일본 내에서는 천황제를 반대했다는 전력 때문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나, 한국에서는 식민지 조선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공동투쟁을 계획했다는 점 때문에 상당한 관심을 받아왔다.

가네코 후미코는 어떻게 일본인이라는 선험적 조건을 뛰어넘어 식민지 조선에 공감하게 되었을까. <가네코 후미코>의 저자 야마다 쇼지는 가네코 후미코의 험난한 삶의 여정에서 원인을 찾는다. 가네코 후미코는 비록 일본인이었지만 “일본의 식민지화 첨병집단으로부터 소외”된, “억압하는 쪽으로부터 버림받은 자”였다.

야마다 쇼지는 가네코 후미코가 감옥에서 자살하기 직전 남긴 자서전과 재판기록, 후미코의 친척 및 친구 인터뷰를 통해 가네코 후미코의 삶과 사상적 변화를 생생하게 그려냈다.

지은이는 후미코의 양친 체험이 그녀의 사상을 형성하는 데 기초가 된 가장 기본적인 원체험이라고 말한다. 아버지 사에키 분이치는 후미코를 낳은 후에도 어머니 가네코 기쿠노를 호적에 올리지 않았으며, 유곽에 출입하는 등 가정을 등한시하다가 결국 기쿠노와 딸 후미코를 버렸다. 어머니 또한 딸 후미코를 “창녀”로 파는 것을 고려하는 등 무방비 상태로 내버려두었다.

후미코는 그 충격에 대해 “아버지는 나에게서 도망쳤으며 어머니 또한 이렇게 나를 버렸다. 어린 나이기긴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자신의 신세를 슬프도록 저주했다”고 술회한다.

또한 그녀는 호적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학교에 어렵게 입학했으며 입학 후에도 차별 받아야 했다. 이는 불합리한 국가질서에 대한 비판의 출발점이 된다. “엄연히 현실에 존재하고 있는데도 무적자라는 이유로 그 현실에서 살고 있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게 법률입니다.”

후미코는 양녀가 되어 친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조선으로 떠난다. 할머니 사에키 무쓰는 후미코가 가난한 친구들과 어울리거나 농사일을 배우는 것을 반대하는 등 권위적이고 인정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할머니에게 고집이 센 후미코가 마음에 들 리 없었다. 후미코는 부엌일을 도맡아서 했지만 용돈 한번 받지 못했으며 일상적으로, 별 이유 없이 학대를 당했다.

한때 후미코는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지만
“나처럼 고통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고통을 가하는 사람들에게 복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 죽어서는 아니 된다”고 생각하고 자살을 포기한다. 이후 일본으로 돌아와서도 아버지가 그녀를 제멋대로 돈이 많은 외삼촌에게 시집을 보내려고 하는 등 후미코의 고난은 그치지 않았다.

이처럼 고단한 유년을 보냈기 때문에 후미코는 가족으로부터의 독립을 꿈꾸었다. 그녀는 집을 뛰쳐나와 고학을 하면서 당대 일본사회를 풍미하던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과 교류하게 된다. 그러나 후미코가 사귀게 된 남자들은 대체로 무책임했으며 그 결과 후미코는 인간성 자체를 불신하게 된다. “나는 지금껏 너무나 많은 사람의 노예로 살아왔다. 너무나 많은 남자들의 장난감이기도 했다.”

자신의 ‘자아’를 확립하기를 갈구하던 후미코는 조선인 활동가 박열을 만나게 된다. 박열은 약육강식 관계가 사라지기 위해서는 일본의 제국주의뿐만 아니라 사회 자체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던 허무주의자였다. 그녀는 일본인 사회주의자들보다 훨씬 진지했던 조선인 박열이 근대의 제국주의적 세계관 자체를 제거할 수 있는 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박열과 동거생활을 시작하면서 “동지로서 함께 살 것이며 자신이 여성이라는 관념을 제거할 것”을 약속 받는다. 그녀는 ‘연약한’ 여성으로 간주되는 것을 거부했으며, 종속적인 관계 또한 벗어나고자 했다.

후미코와 박열은 조선인의 투쟁을 널리 알리는 잡지 <흑도>, <뻔뻔스러운 조선인> 등을 발행하고, 당시의 사회에 ‘반역’하는 사람들의 대중조직 ‘불령사’를 결성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친다. 물론 이들의 나이가 젊은 만큼 조직은 탄탄하지 못한 편이었으며, 특히 박열의 활동은 자기과시적인 혁명적 로맨티시즘의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었다.

박열은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을 통해 폭탄을 입수할 계획을 짰으나 실패로 돌아가는데, 이 폭탄입수 모의는 박열과 후미코를 파국으로 몰고 간다. 1923년 관동대지진 때 관민이 합심하여 조선인들을 학살했는데, 이 어처구니없는 학살을 정당화하기 위한 희생양이 필요해진 것이다. 박열과 후미코는 황태자를 암살하여 한 ‘불령스런 조선인’으로 몰려 재판을 받게 된다.

당대 일본은 청일전쟁 이후 천황제가 문명개화를 선도했다는 이유로 천황의 권위가 매우 높았다. 또한 이 문명개화의식은 조선을 포함한 아시아에 대한 뿌리 깊은 차별의식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선인의 폭탄투척은 대역죄로, 사형이 확실했다. 그녀가 사형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천황제를 인정하는 ‘전향’을 해야 했다. 그러나 전향하는 것 자체가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것이라 생각한 후미코는 재판을 자신의 사상을 펼칠 장으로 삼기로 결심한다.

그녀는 2년여의 재판기간 동안 나는 안에서 타오르는 참된 질서 외에 국가나 정부의 간섭을 거절하고 싶다고 외쳤다. 사형언도 후 천황의 “은사”를 통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으나 그녀는 석 달 후 자살하고 만다. 아마도 형무소에서 계속되는 전향 권유와 심한 검열이 원인이었을 것이다.

“저는 일본인이긴 하지만 일본인이 너무 증오스러워 화가 치밀곤 합니다…. 저는 정말이지 이런 운동(조선독립운동)을 속 편하게 남의 일이라고만 치부할 수 없습니다.”

가네코 후미코처럼 식민지 조선의 상황에 공감하고 독립운동에 함께하려 한 일본인은 거의 없었다. 또한 여성으로서 ‘조선사람과 결혼해서 불쌍하다’는 세간의 인식을 무릅쓰고 박열을 사랑하였으며, 가부장적인 당대 사회의 관습을 벗어나서 평등한 관계를 유지했다는 점 또한 그녀를 돋보이게 한다.

비록 그녀가 일찍 죽은 까닭에 그녀의 아나키즘적 사상은 이론적으로 확실하게 정립되지 못했으나, 한 명의 실천가이자 억압받은 여성으로서 부단히 자신의 삶을 점검하여 내면에서 우러나는 참된 자아를 따라 살고자 한 그녀의 삶은 여전히 많은 점들을 시사한다.
www.ildaro.com [일다] 김윤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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