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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지리산 종주 이야기

천왕봉으로 가기 위해 첫날밤을 치렀다. 노고단 대피소에서 노고단으로 가는 길은 한 시간 정도 소요된다. 일출을 보기 위해서 새벽 4시에 일어나 더부룩한 속을 탄수화물로 채웠건만 끝끝내 햇발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어스름한 하늘이 몇 줄기 햇빛으로 찬란하게 갈라지는 풍경은 볼 수 있었다.

 
예상보다 몸이 가벼웠다. 다리는 땡땡하지 않았고 사뿐사뿐 걸을 수 있는 몸이었다. 단 배낭의 무게가 여전히 만만치 않았다. 첫날 화엄사 계곡을 오르던 것에 비해선 분명 길은 수월했다. 들판을 걷는 듯한 기분이랄까.
 
새빨간 단풍잎을 보며 감탄해 마지않는 그녀들 

지리산 세석평전

둘째날 코스는 노고단에서 돼지령, 임걸령 샘터, 반야봉, 노루목, 삼도봉, 화개재, 토끼봉, 총각샘, 명선봉을 거쳐 연하천 대피소에서 점심을 먹고 벽소령 대피소에서 묵을 예정이었다. 간단한 점심식사를 위해서 새벽부터 주먹밥을 만들어 각자의 배낭 속에 챙겨 넣었다.
 
노고단에서 벽소령까지 예상시간은 8시간. 험한 길을 걷지 않은 대신 노고단에서 벽소령까지 가는 길은 멀다고 했다. 일출을 보기 위해 들른 노고단 하늘은 흐렸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자 젖는 것을 막기 위해 옷과 배낭을 단장하였다. 밥을 든든하게 먹었는데도 너무 이른 아침에 먹어서인지 아침 8시부터 허기가 돌았다. 잠시 배낭을 내리고 평소에는 먹지 않는 열량 높은 초코바 두 개와 사탕, 말린 과일을 먹었다.
 
길은 험하지 않았지만 무릎과 발목이 시리고 아프기 시작했다. 나뿐만이 아니라 일행들도 증상이 같았기 때문에 1시간을 걷다 다시 자리를 잡고 무릎과 발목에 각자 보호대를 동여맸다. 걷다가 동여맨 것이 너무 조여서는 다시 주저앉아 동여맸다. 그러면 앞과 뒤에 있던 사람들이 기다려주곤 하였다.
 
노루목 길목에서 우리는 다른 일행이 오기를 기다리며 자리를 잡았다. 10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누군가 다쳤나’ 하며 은근히 마음을 졸이며 기다렸다. 그러나 멀리서부터 웃으며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다칠 리가 없어.’ ‘무슨 할 이야기가 저리도 많을까?’ 갑자기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연하천 산장으로 가는 길. 지리산이 물들었다

노루목 길목에서 물을 끓여 따뜻한 차 한 잔을 하며 지리산의 산새와 여기저기 울긋불긋한 단풍들을 즐겼다. 차를 마시면서 새벽에 싼 주먹밥을 먹었다. 어찌나 맛있던지 그러면서 연하천 대피소에서 뜨거운 라면을 끓여먹을 것을 약속했다. 산 속에 있어도 먹을 것은 잘 챙겨먹는 우리 팀이었다.

 
한없이 이어지는 내리막길을 보면 얼마나 오르려고 이렇게 길이 나 있는지 심통이 나기도 했지만 산길을 걷는 나는 여유로웠다. 묵묵히 걷는 나를 사람들이 받아들여 주는 것 같아 고마웠다. 때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나를 몇몇은 갈구기도 한다.

"야리, 말 좀 해라!"
"힘드니깐 말 시키지 마세요!"

산을 오를수록 단풍은 짙게 물들어 있었다. 새빨간 단풍잎을 보며 감탄해 마지않는 그녀들. 산은 그저 우리를 안아줬을 뿐이었는데 안긴 나는 참 많고도 복잡한 생각들을 했더랬다. 
 
나날이 가벼운 몸으로, 가뿐하게

연하천 대피소에 도착했다. 5명으로 구성된 다른 팀은 아직 오는 중이었다. 우리 팀은 먼저 라면을 끓여먹고 그녀들을 기다렸다. 점심을 먹는데 연하천 대피소의 관리인처럼 보이는 아저씨가 지나갔다. 일행 중 한 명이 아는 체 했다. 주인장 역시 반가워했다. 소주 한 병을 가져와서는 몇 잔씩 우리와 나눠 마셨다. 밥을 먹고 이야기를 하는데 두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다른 팀이 도착한 것을 확인하고 우리는 벽소령 대피소에서 기다림을 약속하고 출발했다.
 
푸르스름한 저녁, 드디어 벽소령 대피소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사람들을 기다리며 대피소의 잠자리를 마련했고 저녁도 준비했다. 늦은 점심으로 배가 고프지 않아도 저녁을 먹었다. 걸어야 했으니깐. 험하지 않은 길이라 해도 무거운 배낭을 메고 10시간 동안 산을 걷는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우리는 저녁을 먹고서 곧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대피소는 씻을 수 있는 장소가 전혀 없다. 먹을 수 있는 물만 있을 뿐이다. 치약은 당연히 사용하지 못한다. 물로 칫솔질 하는 것이 당연한 곳이다. 세수와 목욕은 전혀 할 수 없어 준비해 온 물티슈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 반드시 종주를 준비하는 사람은 물티슈를 챙겨야 한다.
 
흐린 날씨로 일출을 볼 수 없겠다 싶어 새벽에 일어나지 않기로 하고 잠을 길게 잤다. 그러나 아침을 준비하는 오전 7시경 햇볕은 뜨거웠다. 오늘은 덥겠다. 벽소령 대피소를 나섰다. 10분을 걸으니 땀이 나기 시작했다. 나는 다이어트 산행을 한답시고 윈드자캣을 벗지 않고서 걸었다.
 

지리산 천왕봉 가는 길목

셋째날을 맞이한 그녀들은 저마다 패션이 바뀌어 있었다. 도봉산행 연습 때부터 그녀들은 기능뿐만 아니라 패션도 중요함을 강조하곤 했다. 나름 새로 단장한 패션이었다. 산뜻한 느낌이었다. 떨어진 낙엽들이 많았고 그 낙엽들은 우리의 길을 폭신하게 만들어줬다. 오늘은 선비샘을 지나 세석대피소에서 점심을 먹고 장터목 대피소에서 묵을 예정이었다. 산행시간은 어제보다 두세 시간 줄어들 예정이었다.
 
산행길은 산책로처럼 편안해서 우리는 가을을 느낄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자리를 펴고 앉았다. 지리산은 평화로웠다. 그런데 셋째날부터의 산행은 내게 외로움이라는 걸 줬다. 여러 명이서 산행을 하는데도 나는 혼자만의 시간이 많았다. 사람들은 “야리 멍 때린다” 며 놀리기도 했다. “힘들어서 그러냐”, “배고파서 그러냐” 걱정하기도 했다. 나는 그런 걱정도 안 들렸다. 끊임없이 나 자신에 대해서, 관계에 대해서 생각했던 것 같다.
 
세석대피소에 도착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이른 점심을 먹은 사람들은 여기저기 누워 햇발을 받고 있었다. 첫째 날, 둘째 날 대피소에서 스쳐 지나간 사람들이 여기저기 모여 있었다. 모두들 천왕봉으로 가는 길이었다. 세석대피소는 분지 중앙에 위치해 있다. 넓고 푸르른 들판 한 가운데에 산장이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세석까지 길은 평탄했지만 이제부터 장터목까지 가는 길에 두세 번 정도는 긴 오르막길이 있다 했다.
 
여럿이 올라도 결국은 혼자였다 
 

지리산의 마지막 오솔길

대피소에서 길고 높은 오르막을 오르고 있는 사람들이 멀리서 보였다. 하늘이 예뻤고 바람은 시원했다. 나는 여전히 대장의 뒤를 따라 선두로 올랐다. 배가 불러서 삼십 분은 헉헉댔다. 배가 고프면 몸의 기운이 빠져 걷기가 힘들고 배가 부르면 몸이 무겁고 숨이 차서 걷기가 힘드니 몸이 참 애매모호하다 싶었다. 뒤처지면 안 될 것 같아 열심히 오르막길을 치고 올라갔다. 돌계단과 나무계단이 섞여 있는 오르막길로 30분을 계속해서 올라야 하는 길이었다. 같이 걷던 ‘지나지산’이 치고 가자며 나를 재촉했다.

 
치고 간다는 것은 오르막길을 오르는 동안 쉬지 않고 올라간다는 것이다. 치고 가는 재미가 솔솔함을 말하고 싶다. 나에게 주문을 건다. ‘이 오르막길이 끝날 때까지 가자. 그래, 가보자!’ 그리고 나는 끝까지 오른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아도 다 올랐다는 것에 스스로 대견하다.
 
삼일 동안 계속 걷기만 했건만 몸은 갈수록 가벼워졌고 산을 타는 요령이 생겼다. 발이 빨라졌고 산을 날아다닐 수 있는 힘이 생겼다. 혼자서 계속해서 오르다 문득 사람들이 생각나 뒤를 돌아보면 아무도 없거나 저 멀리서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대장도 가끔 내가 그렇게 걷는 것을 보면 길을 내어주고 뒤를 따르기도 했다. 산 속에 혼자 있다고 느껴질 때면 ‘반달곰 주의’ 라는 안내문이 생각나 새의 움직임에도 흠칫 놀라기도 했다.
 
그래도 한 번쯤은 혼자서 지리산을 종주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주에 오고 싶어 했던 친구를 떠올리며 그녀와 함께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산은 여러 명이서 함께 오르고 내리지만 걷는 것은, 보는 것은, 느끼는 것은 오롯이 혼자다. 이렇게 만감을 교차하도록 스스로를 관망하는 것은 나 자신이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육색찬란한 오솔길이 나 있다. 이 오솔길은 지리산의 숲 속을 느끼게 하는 마지막 길이라 대장은 말했다. 그래서 더욱 천천히 걸으며 낙엽과 단풍을 느끼며 걸었다. 푸르스름하게 하늘을 물들이고 있는 일몰이 연출되고 있는 장터목 대피소에 도착했다. 거대하다는 단어가 떠올랐다. 장터목 대피소는 하늘과 맞닿아 있었는데 그 맞닿아 있는 부분이 물들어 있으니 거대하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대피소에는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기다리고 있었다. 배낭을 풀고 옷을 갈아입고 우리는 마지막 저녁 만찬을 즐겼다. 남겨져 있던 모든 반찬을 먹었다. 아껴두었던 소주 한 병을 풀었다. 삼일 동안 고생했다고, 남은 하루도 무사히 종주하자며 축하주를 한 잔씩 했다. 어느 대피소보다 한 시간 빨리 소등한다 해서 우리는 삽시간에 정리하고서 잠자리에 들었다. 천왕봉에서 일출을 맞이한다는 것에 잠깐의 설레임을 느끼면서 그 어느 대피소보다 달콤하게 잠이 들었다. [일다] 안야리

이어지는 기사: 지리산 종주를 꿈꾸다, 오른다
다른 여행기사: 알래스카에서 사람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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