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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티 턴스탈과 케렌 앤의 음악세계
사람들에게 있어 음악 앨범은 여전히 문화 체험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더이상 씨디플레이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해도, 음악 마니아들에게 있어 “그 사람의 ‘앨범’을 들어보았느냐”라는 질문이 “그 ‘노래’를 들어보았느냐”는 질문보다 어딘가 더 익숙한 것처럼요.
서양에서 ‘정식으로’ 대중음악이 탄생한 이래, 앨범형식으로 전달된 음반에서 특정 뮤지션의 완성도를 파악하는 것은 일종의 ‘상식적인’ 감상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음악을 만드는 사람들 역시 새로운 음악기술(전자악기와 증폭장치 및 녹음 스튜디오 등)의 영향 하에서 표현법을 개발하고 그 창작과정을 체험하게 되었고요.
그런데 테크놀로지가 매개되지 않은 (‘원본’의) 연주가 있을 수 있거나 있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즉 ‘실제’연주에 음악적 우위를 두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대중음악의 앨범은 종종 연주를 녹음한 판본 정도로 인식되기도 합니다. 혹은 앨범과 라이브 연주가 어떤 뮤지션의 고유성을 증명해주는 동일한 두 가지로 이해되기도 하고요.
하지만 음악기술들이 앨범에 들어갈 곡을 만드는 데 있어 생각보다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점과, 라이브 연주에서도 그러한 사운드 장치들이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공한다는 것을 부정한다면, 음악에 대한 해석은 다시금 ‘천재적 예술가의 순수한 예술’이라는 이데올로기에 눌러앉게 되죠.
테크놀로지 자체가 예술행위가 될 수는 없지만, 창작의 기술과 음악적 모티프를 따로 떼어놓을 수 없는 현대의 대중음악에서 테크놀로지를 배제하고 감상하는 건 어려운 일이에요. 귀로 ‘직접’ 연주를 들을 때조차 그것을 그런 형태의 사운드로 만들어주는 필터들이 반드시 개입되니까요. 대중음악이 ‘순수’음악과 무엇보다도 변별되는 지점이 여기이기도 하고요.
스튜디오 아티스트와 라이브 전문가의 구별을 넘어 ‘창작과정’을 상연하다
저도 ‘훌륭한’ 연주를 좋아합니다. (여기서 연주는 목소리 연주까지 포괄하는 넓은 개념입니다.) 그런데 멋진 연주라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규정되는 건지 가끔은 혼란스러워요. 복잡한 패턴의 어려운 악보를 ‘틀리지 않고’ 연주하는 걸까요? 아니면 첨단 이펙터 장치들을 배제하고서 ‘아무 것에도’ 도움 받지 않고 연주하는 걸까요?
만약 앞의 경우들에서 훌륭한 연주의 명확한 예를 찾아야 한다면, 왠지 음악에서 ‘진기명기’ 이상의 느낌을 받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기본적으로 음악은 소리의 집합이 스타일의 내용과 상황적 맥락을 가지고 감성에 전달될 때 반응을 생성하니까요.
반갑게도 최근에는 그 둘 각각의 영역화를 시도하거나 접점을 모색하는 작업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음향을 섞고 편집하는 기술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발달해가고 있으니, 노래 자체에만 매달리기보다는 그것을 상황에 따라 어떤 모습으로 펼칠 것인지에 관심을 갖게 되겠죠.
2005년 솔로 아티스트로 데뷔한 스코틀랜드 출신 뮤지션 케이티 턴스탈(KT Tunstall)의 정규음반들은 공통적으로 매끈하게 빠진 얼터너티브락 사운드를 표방합니다. 사실 그렇게 들릴 만하죠. 첫 앨범부터 최근 앨범까지 함께했던 프로듀서 스티브 오스본(Steve Osbourne)은 그녀의 시원스러운 리듬과 깔끔한 선율을 정제된 볼륨으로 뽑아내곤 했으니까요.
일반적인 포크락(folk-rock)으로 분류될 만하게 그 음반들은 어쿠스틱 기타에 의해 짜여지는 일련의 통합성을 갖추고 있어요. 멋 부리는 스타일의 음악들이 파트별 자율성을 강조하는 데 반해, 그녀의 음반은 개별적인 자유로움보다는 노래와 한 몸 되어 완결되는 연주를 들려줍니다.
가장 최근의 앨범인 [Drastic Fantastic](2007)의 경우 초반부에서는 전보다 활기 넘치게 펑크(punk)와 만났고, 후반부에서는 포크음악에 대한 잔잔한 애정을 보여주는 등 변화를 추구 했지만 그녀의 음반은 기본적으로 ‘하이-파이(Hi-Fi)’ 사운드에 주력합니다. 즉 안정된 조화 말입니다.
그녀는 영국의 한 TV 음악프로그램에 출연하여 ‘Black Horse And The Cherry Tree’를 선보이면서 유명해지게 되었는데요, 인터넷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그 영상은 제게도 정말 신선했답니다.
그녀는 음반과는 다른 관점에서 곡을 경험하게 했어요. 앨범과 거의 ‘똑같은’ 버전이었지만 전혀 다른 종류의 기쁨을 주었죠. 그녀는 기타 한 대와 몇 가지 도구들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녹음된 소리를 같은 간격으로 반복 재생해주는 기구인 ‘루프loop’를 이용해 네 박자 기본 위에 차례로 몇 개의 리듬을 올렸고, 이어 그 구간 안에 허스키한 노래와 호탕한 연주를 위치시키면서 하나의 노래를 완성해갔습니다.
앨범에서도 노랫소리와 어쿠스틱 기타의 스트로크가 부각되어 있지만 TV쇼에서는 목소리를 포함한 모든 요소들이 시간의 경과에 따라 어떻게 들고나는지, 서로 무엇을 주고받는지가 명확한 주제가 되었던 것이죠.
어떻게 보면 단순한 구성이었는데도 사람들이 그 모습에 크게 호응할 수 있었던 건 그녀가 완성된 곡을 단순 재연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이들을 창작 과정에 끌어들이며 흥을 나누었기 때문은 아닐까요?
몇몇 라이브를 보면 그녀는 음반버전과 최대한 비슷하게 혹은 그보다 뛰어나게 하려는 노력보다는 역으로 여러 음악적 요인들이 어떻게 하나의 음악이 되어 즐거움을 주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앨범음악의 자유로운 변형 가능성을 제시하는 듯 합니다.
앨범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또다른 가치를 발견하다
매체에 따라 다른 매력을 연출하는 아티스트라고 하면, 그 꿈결같은 분위기 때문에 영화와 광고의 배경음악으로 사랑받는 뮤지션 케렌 앤(Keren Ann)도 추천할 만합니다. 케이티 턴스탈처럼 혼혈인인 그녀는 이스라엘 출신인데요. 이곳 저곳으로 옮겨 다니며 살아왔기 때문인지 서양 팝 씬의 다양한 물줄기들을 함유한 음악을 하지요.
영어로 부른 앨범 [Not Going Anywhere](2003) 전까지 프랑스어로 노래한 그녀는 샹송과 포크의 따뜻하고 잔잔한, 회고적인 느낌들을 섬세하게 잘 살려냅니다. 뭉뚱그려 말하면 케렌 앤의 음반들은 대부분 감미롭다고 할 수 있어요.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그녀 음악의 매력은 숲길을 걷는 듯하다가 어느 샌가 심연 속으로 파고드는 듯 한 오묘함에 있지요. 테크닉적 측면에서도 공간감으로 너울지는 음향 구성을 트레이드마크로 삼고 있고요.
그런데 최근 앨범인 [Keren Ann](2007)은 첫 트랙부터 조금 달라졌습니다. 락기타의 존재감이 스며있다는 걸 느끼게 되거든요. 물론 그녀가 영미권에 진출한 만큼 락적인 요소를 강화시켰을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겠죠. 그렇지만 음반에서 락기타의 사운드는 프렌치팝을 락 버전으로 바꿔 놓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에요.
지난 공연 영상들 속에는, 케렌 앤 음반의 미묘한 변화와 그녀의 라이브가 줄곧 추구했던 예술적 느낌 사이의 어떤 연결 고리들이 함축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녀는 음반에서 풍겼던 따뜻한 무드를 라이브에서는 밴드의 악기들이 만들어내는 노이즈로 확장합니다.
음반과 전혀 다르게 편곡된 것이 아님에도 한 곡을 사뭇 다른 관점에서 감상하게 되죠. 앨범에서는 어디까지나 감상적인 분위기를 ‘위하여’ 쓰였던 공간감 있는 필터들이 관객과 함께하는 공연에서는 그 자체로 풍성한 주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녀는 (프랜치 팝이나 포크라는) 장르보다는 흔들리며 떠도는 사운드를 자신의 독특성을 담아낼, 동시에 그 독특성의 주요 구성요소가 될 목소리로 여기지 않았나 싶어요. 그렇게 듣는다면 최근 앨범의 달라진 측면들도 아예 새로운 장르로의 전이가 아니라, 그녀의 트레이드마크가 내포하는 다른 차원이 건드려진 결과물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겠죠.
대중문화비평가 테오도어 그래칙의 말처럼 팝음악, 특히 밴드연주가 강화된 음악을 들을 때 우리는 단순히 그려진 ‘악보’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사운드의 덩어리와 그 뉘앙스에 매혹됩니다.
그렇다면 그 사운드라는 것은 시공간의 차이에 따라 이런 저런 변모를 만들어낼 수도 있을 테고, 각각의 연주장면들은 정확히 등질적인 하나로 파악되기보다는 개별적인 얼개들의 만남과 헤어짐의 교차로서 가치를 부여 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기타가 불러내는 노래를 가지고 유희하는 케이티 턴스탈이 라이브에서 기존 곡의 프로그램밍 과정을 연출할 때, 그리고 기타의 불안정한 소리에 심취하는 케렌 앤이 음반을 위한 도구를 하나의 어엿한 목소리로 환기시킬 때, 우리는 무엇이 더 가치 있다거나 어떤 정해진 체계를 채택할 것인지 고민하지 않고 음악적인 즐거움의 여러 가지 대안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좋은 음악’을 가려내려다 애매한 ‘순수혈통주의’로 빠져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 예술들을 정신적인 차원에 한정 지어서는 안될 것 같아요. 각 사람들이 처해있는 상황과 가능한 매체, 그리고 예술에 관계된 기술들이 창작자 및 제작자와 어떤 무수한 관계를 맺으며 그 의도를 실현하는지를 체험한다면, 상상적인 쾌감뿐 아니라 현실 맥락적인 쾌감도 얻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 [일다] 성지혜
▲ 그 남자 작곡, 그 여자 작사? ▲ 마돈나의 ‘버진’은 지금도 유효하다 ▲ 여름휴가는 ‘그녀’와 함께
사람들에게 있어 음악 앨범은 여전히 문화 체험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더이상 씨디플레이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해도, 음악 마니아들에게 있어 “그 사람의 ‘앨범’을 들어보았느냐”라는 질문이 “그 ‘노래’를 들어보았느냐”는 질문보다 어딘가 더 익숙한 것처럼요.
서양에서 ‘정식으로’ 대중음악이 탄생한 이래, 앨범형식으로 전달된 음반에서 특정 뮤지션의 완성도를 파악하는 것은 일종의 ‘상식적인’ 감상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음악을 만드는 사람들 역시 새로운 음악기술(전자악기와 증폭장치 및 녹음 스튜디오 등)의 영향 하에서 표현법을 개발하고 그 창작과정을 체험하게 되었고요.
KT Tunstall [Drastic Fantastic] 2007
하지만 음악기술들이 앨범에 들어갈 곡을 만드는 데 있어 생각보다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점과, 라이브 연주에서도 그러한 사운드 장치들이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공한다는 것을 부정한다면, 음악에 대한 해석은 다시금 ‘천재적 예술가의 순수한 예술’이라는 이데올로기에 눌러앉게 되죠.
테크놀로지 자체가 예술행위가 될 수는 없지만, 창작의 기술과 음악적 모티프를 따로 떼어놓을 수 없는 현대의 대중음악에서 테크놀로지를 배제하고 감상하는 건 어려운 일이에요. 귀로 ‘직접’ 연주를 들을 때조차 그것을 그런 형태의 사운드로 만들어주는 필터들이 반드시 개입되니까요. 대중음악이 ‘순수’음악과 무엇보다도 변별되는 지점이 여기이기도 하고요.
스튜디오 아티스트와 라이브 전문가의 구별을 넘어 ‘창작과정’을 상연하다
저도 ‘훌륭한’ 연주를 좋아합니다. (여기서 연주는 목소리 연주까지 포괄하는 넓은 개념입니다.) 그런데 멋진 연주라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규정되는 건지 가끔은 혼란스러워요. 복잡한 패턴의 어려운 악보를 ‘틀리지 않고’ 연주하는 걸까요? 아니면 첨단 이펙터 장치들을 배제하고서 ‘아무 것에도’ 도움 받지 않고 연주하는 걸까요?
만약 앞의 경우들에서 훌륭한 연주의 명확한 예를 찾아야 한다면, 왠지 음악에서 ‘진기명기’ 이상의 느낌을 받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기본적으로 음악은 소리의 집합이 스타일의 내용과 상황적 맥락을 가지고 감성에 전달될 때 반응을 생성하니까요.
반갑게도 최근에는 그 둘 각각의 영역화를 시도하거나 접점을 모색하는 작업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음향을 섞고 편집하는 기술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발달해가고 있으니, 노래 자체에만 매달리기보다는 그것을 상황에 따라 어떤 모습으로 펼칠 것인지에 관심을 갖게 되겠죠.
KT Tunstall [Eye To The Telescope] 2005
일반적인 포크락(folk-rock)으로 분류될 만하게 그 음반들은 어쿠스틱 기타에 의해 짜여지는 일련의 통합성을 갖추고 있어요. 멋 부리는 스타일의 음악들이 파트별 자율성을 강조하는 데 반해, 그녀의 음반은 개별적인 자유로움보다는 노래와 한 몸 되어 완결되는 연주를 들려줍니다.
가장 최근의 앨범인 [Drastic Fantastic](2007)의 경우 초반부에서는 전보다 활기 넘치게 펑크(punk)와 만났고, 후반부에서는 포크음악에 대한 잔잔한 애정을 보여주는 등 변화를 추구 했지만 그녀의 음반은 기본적으로 ‘하이-파이(Hi-Fi)’ 사운드에 주력합니다. 즉 안정된 조화 말입니다.
그녀는 영국의 한 TV 음악프로그램에 출연하여 ‘Black Horse And The Cherry Tree’를 선보이면서 유명해지게 되었는데요, 인터넷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그 영상은 제게도 정말 신선했답니다.
그녀는 음반과는 다른 관점에서 곡을 경험하게 했어요. 앨범과 거의 ‘똑같은’ 버전이었지만 전혀 다른 종류의 기쁨을 주었죠. 그녀는 기타 한 대와 몇 가지 도구들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녹음된 소리를 같은 간격으로 반복 재생해주는 기구인 ‘루프loop’를 이용해 네 박자 기본 위에 차례로 몇 개의 리듬을 올렸고, 이어 그 구간 안에 허스키한 노래와 호탕한 연주를 위치시키면서 하나의 노래를 완성해갔습니다.
앨범에서도 노랫소리와 어쿠스틱 기타의 스트로크가 부각되어 있지만 TV쇼에서는 목소리를 포함한 모든 요소들이 시간의 경과에 따라 어떻게 들고나는지, 서로 무엇을 주고받는지가 명확한 주제가 되었던 것이죠.
어떻게 보면 단순한 구성이었는데도 사람들이 그 모습에 크게 호응할 수 있었던 건 그녀가 완성된 곡을 단순 재연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이들을 창작 과정에 끌어들이며 흥을 나누었기 때문은 아닐까요?
몇몇 라이브를 보면 그녀는 음반버전과 최대한 비슷하게 혹은 그보다 뛰어나게 하려는 노력보다는 역으로 여러 음악적 요인들이 어떻게 하나의 음악이 되어 즐거움을 주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앨범음악의 자유로운 변형 가능성을 제시하는 듯 합니다.
앨범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또다른 가치를 발견하다
Keren Ann [La Disparition] 2004
영어로 부른 앨범 [Not Going Anywhere](2003) 전까지 프랑스어로 노래한 그녀는 샹송과 포크의 따뜻하고 잔잔한, 회고적인 느낌들을 섬세하게 잘 살려냅니다. 뭉뚱그려 말하면 케렌 앤의 음반들은 대부분 감미롭다고 할 수 있어요.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그녀 음악의 매력은 숲길을 걷는 듯하다가 어느 샌가 심연 속으로 파고드는 듯 한 오묘함에 있지요. 테크닉적 측면에서도 공간감으로 너울지는 음향 구성을 트레이드마크로 삼고 있고요.
그런데 최근 앨범인 [Keren Ann](2007)은 첫 트랙부터 조금 달라졌습니다. 락기타의 존재감이 스며있다는 걸 느끼게 되거든요. 물론 그녀가 영미권에 진출한 만큼 락적인 요소를 강화시켰을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겠죠. 그렇지만 음반에서 락기타의 사운드는 프렌치팝을 락 버전으로 바꿔 놓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에요.
지난 공연 영상들 속에는, 케렌 앤 음반의 미묘한 변화와 그녀의 라이브가 줄곧 추구했던 예술적 느낌 사이의 어떤 연결 고리들이 함축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녀는 음반에서 풍겼던 따뜻한 무드를 라이브에서는 밴드의 악기들이 만들어내는 노이즈로 확장합니다.
음반과 전혀 다르게 편곡된 것이 아님에도 한 곡을 사뭇 다른 관점에서 감상하게 되죠. 앨범에서는 어디까지나 감상적인 분위기를 ‘위하여’ 쓰였던 공간감 있는 필터들이 관객과 함께하는 공연에서는 그 자체로 풍성한 주제가 되는 것입니다.
Keren Ann [Keren Ann ] 2007
대중문화비평가 테오도어 그래칙의 말처럼 팝음악, 특히 밴드연주가 강화된 음악을 들을 때 우리는 단순히 그려진 ‘악보’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사운드의 덩어리와 그 뉘앙스에 매혹됩니다.
그렇다면 그 사운드라는 것은 시공간의 차이에 따라 이런 저런 변모를 만들어낼 수도 있을 테고, 각각의 연주장면들은 정확히 등질적인 하나로 파악되기보다는 개별적인 얼개들의 만남과 헤어짐의 교차로서 가치를 부여 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기타가 불러내는 노래를 가지고 유희하는 케이티 턴스탈이 라이브에서 기존 곡의 프로그램밍 과정을 연출할 때, 그리고 기타의 불안정한 소리에 심취하는 케렌 앤이 음반을 위한 도구를 하나의 어엿한 목소리로 환기시킬 때, 우리는 무엇이 더 가치 있다거나 어떤 정해진 체계를 채택할 것인지 고민하지 않고 음악적인 즐거움의 여러 가지 대안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좋은 음악’을 가려내려다 애매한 ‘순수혈통주의’로 빠져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 예술들을 정신적인 차원에 한정 지어서는 안될 것 같아요. 각 사람들이 처해있는 상황과 가능한 매체, 그리고 예술에 관계된 기술들이 창작자 및 제작자와 어떤 무수한 관계를 맺으며 그 의도를 실현하는지를 체험한다면, 상상적인 쾌감뿐 아니라 현실 맥락적인 쾌감도 얻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 그 남자 작곡, 그 여자 작사? ▲ 마돈나의 ‘버진’은 지금도 유효하다 ▲ 여름휴가는 ‘그녀’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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