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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을 올랐다. 배낭을 짊어지고 오른 것은 나였지만, 앞에서 뒤에서 끌어주고 밀어준 것은 함께한 사람들이었다. 함께함을 확인했지만 혼자임을 즐겼던 산행이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산을 찾았다.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산을 오르기 시작했고 산을 내려왔다.

그러나 함께 간 사람들은 저마다 달랐다. 산에게 기대를 하고 뭔가를 버리기 위해 오른 사람이 있었고, 그저 산이 좋아 오른 사람이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지리산 종주를 위해 6주간 산행연습을 했고 지리산 종주 이후에도 산악회는 지속되었다.

 
지리산 종주를 준비하며 도봉산에 오르다

산을 좋아해서 도봉산을 뒷동산 오르듯 하는 ‘지나지산’은 지리산을 1년에 2번은 종주한다 해서 나에게 부러운 존재였다. 언젠가 그녀와 함께 지리산 종주를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그런 그녀가 어느 날 가을 지리산 종주를 제안했다. 신이 났다.

지리산 종주는 만만치 않다 했다. 종주는 몇몇의 사람들로 구성될 것이라 했다. 햇볕이 땡땡거리는 8월 어느 날부터 도봉산 산행으로 지리산 종주를 대비했다. 도봉산을 처음 오른 날 우리는 서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짱가, 지나지산, 이영, 사포, 수내, 소인, 둘리, 종주에 대한 염원만 있고 가지 못하는 나의 친구 그리고 나.

그리 친하지 않은 우리들은 익히 이름들만 알고 있었던 지라, 산행을 하면서 이야기 꽃을 피울 사이는 되지 못했다. ‘흠, 사포가 헉헉대면서도 앞서서 참 잘 가네’, ‘짱가의 빨간 티는 죽여주는 구나’, ‘이영언니는 생각보다 완전 동안이네. 벌써 30대 후반이라…’ 등 뭐 이런 생각을 하면서 혼자서 사람들을 파악했다.

첫 산행을 지켜본 지나지산은 2~3번의 산행으로는 종주가 힘들 것(왜, 힘드냐고? 산을 못 타니깐!)이라 이야기했다. 그 말에 우리는 동의하며, 9월 초에 계획했던 종주를 10월로 미루고 일주일에 한 번씩 산행연습을 하기로 했다. 산행을 하지 않은 주는 각자 알아서 한강공원을 걷기도 하고, 집에 있는 스탭퍼를 1시간 동안 굴리기도 했다. 아침 7시 30분부터 오후 2시경쯤에 끝나는 산행은 힘들면서도 마음에 뿌듯함을 안겨줬다.
 
나는 6주간의 산행연습에 100%의 출석률을 기록하지 못했다. 8월과 9월을 넘기는 그 시기, 따박따박 주는 월급을 포기하고 내가 신나게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새로운 일터를 찾아 떠나는 중이었다.

3주간은 인수인계를 위해 산행은 할 수 없었지만, 혼자서 텔레비전을 보면서 스탭퍼로 종주를 준비했다. 스탭퍼의 위력인가? 4주 만에 오른 도봉산이 그리 힘들지 않은 이유는. 지리산을 가지 않는 사람들은 우리 산행팀을 “뭐 그렇게까지 연습 해가면서 지리산을 가냐”며 걱정 아닌 걱정을 하기도 했었다. 그래도 준비된 자여서 좋았다.

 
회계를 맡아, 대피소를 예약하다

내가 함께 하지 않은 산행연습 3번째 주부터는 동점과 초롱아빠가 합류했다. 동점은 짱가의 친구로 글을 읽고 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인데, 내가 원하는 글쓰기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혼자서 산을 잘 타는 초롱아빠는 우연히 지나지산을 도봉산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우리와 함께 종주를 하기로 했다. 동점은 말을 맛나게 하는 분이었고, 초롱아빠의 입담은 개그우먼 이경실, 김미선을 능가했다.

 
이즘부터 사포, 수내, 이영, 둘리, 소인은 따로 산행연습을 했다. 자동적으로 이들 5명이 한 팀으로 꾸려졌고 나를 비롯하여 지나지산, 동점, 초롱아빠, 짱가 5명이 한 팀으로 꾸려져 총 10명에 2팀으로 구성된 나름 조직적인 지리산 종주팀이 만들어졌다. 산행연습도 하고 종주를 위해 역할도 분담했다. 한 팀마다 대장, 도구담당, 회계담당, 식량담당 4가지의 역할분담으로 진행되었다.
 

우리 팀은 당연히 지나지산으로 다른 팀은 수내가 대장이 되었다. 나는 돈만 쥐고 있다 계산만 하면 되는 줄 알고서 회계를 맡았으나, 대장은 회계 역할의 중대함을 인지시켰다. 회계는 3박 4일간의 돈을 관리할 뿐만 아니라 대피소(산장)를 예약하고 버스까지 예매해야 했다. 노고단 대피소, 벽소령 대피소, 장터목 대피소를 14일전에 차례대로 예약해야 했다. 천왕봉을 오르기 위해 셋째 날은 장터목 대피소에서 자기로 한 것이었다.
 
예약을 위해서 필사적이었다. 종주가 10월 4일(토)에서 7일(화)의 3박 4일간이었는데 이 시기 많은 사람들이 지리산을 찾는다 했다. 그래서 대피소를 예약하는 3일 내내 예약 30분전부터 초고속으로 예약하기 위해 클릭연습을 했었다. 가슴 떨리던 순간이었다. 구례행 버스는 7일전 서부터미널 사이트에서 예약했다.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
 
본격적인 지리산행, 죽음의 계곡을 넘다

 
10월 4일 오전 7시 30분 우리는 구례로 출발했다. 4시간을 달려 화엄사에 도착. 화엄사 입구에서 점심을 알차게 먹고 각자의 식량과 음식도구 등을 나누어 배낭을 다시 만들었다. 우리 팀은 화엄사에서 성삼재를 산행하기로 했으나, 다른 팀은 성삼재까지 버스를 타고 노고단 대피소로 가기로 했다. 서로의 안전한 산행을 기약했다.

드디어 죽음의 계곡(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삼재까지 버스노선이 생기면서 버스를 이용하고, 험하고 가파르다고 해서 오르지 않은 이 길을 죽음의 계곡이라 말했다)을 산행하기 시작했다. 5분을 걸었을까. 배낭의 무게가 만만치 않음을 실감했다. 입구부터 돌들이 무성한 길이었다. 돌을 안고 산을 탔다. 30분을 타다가 맛나는 냉커피를 마시기 위해 잠시 쉬기도 하고, 가파른 길을 다 오르면 성실했던 몸을 위해 잠시 쉬기도 했다.

그렇게 한 시간은 올랐다. 오를 만했다. 단 한 시간만. 길은 점점 더 가파르면서 험해지기 시작했다. 배낭을 던져 버리고 싶은 욕구는 격초로 생겼다. 배낭 속에 있는 8끼의 쌀이 싫었다. 정말 힘들었다. 온몸으로 산을 안아버렸다.

 

지나지산은 대장으로 선두를 맡았고, 초롱아빠는 사람들을 잘 몰아 오르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후미를 맡게 되었다. 짱가, 동점, 나는 두 사람 사이에서 올랐는데 1시간 정도 오르자 순서가 생겼다. 대장 뒤에 나, 동점, 짱가. 나는 힘들어 죽겠는데 말을 걸면 어떻게 하지 하는 걱정과 뒤쳐지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대장의 꽁무니만을 보며 올랐다.
 
그런 나를 사람들은 정말 산을 잘 탄다며 감탄하고 감동했다. 동점과 짱가는 10년 만에 만난 사람들처럼 쏟아지는 이야기들을 주고 받았다. 이 험한 산길에 농담과 박수를 쳐가는 두 사람이 그저 신기했다. 짱가는 내가 활동하고 있는 프러덕션 나인스토리의 대표다. 여성문화운동을 10년 동안 해오던 짱가였다. 함께 활동한다는 것에 설렘을 가진 만큼 첫 종주를 같이한다는 것에 기대감을 갖게 했다.
 
나는 열심히 대장의 뒷모습을 확인하며 산을 올랐다. 지나지산은 정말 스틱 한번 사용하지 않고 산을 잘 오르는 산악인이었다. 지쳐가는 나를 위해 힘을 주었지만, 나는 지나지산의 말이 점점 들리지 않았다. 지나지산의 물음에 대꾸할 힘도 없어졌다. 능선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했다. 능선이 보이는 부분을 가리키며 다 올랐다고 말했다.
 
“다 왔어. 야리”, “야리, 조금만 더 가면 돼.”, “야리 저기 보이지? 능선. 보이지?” 나는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다. '아예 말을 하지 말지 왜 자꾸 해서 기대감을 갖게 하는지, 정말 이 화엄사 싫다. 누가 도대체 오르자고 한 거지? 윽. 언니 밉다.' 하는 생각으로 나에게 갇혀 있던 순간. 다시 지나지산이 말했다.
 
“정말, 다왔어. 야리.” 나는 말했다. "언니, 구라쟁이야~~~!!" 눈물을 찔끔거렸다. 조용히 따라오던 세 여자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났나 싶어 합창을 했다. “뭐라고?”, “괜찮아, 야리?” 나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올랐다. ‘그래, 다 왔다는데 조금만 더 가자.’ 그렇게 한 시간을 오르자 성삼재 고갯길이 나왔다.
 
참 산은 영리하다. 도저히 못 가겠다 싶으면 이렇게 길을 내어주어 쉬게 만들어주다니. 그러다 몸이 쉬었다 싶으면 다시 길을 내어주니 말이다. 순간 다리가 풀렸다. 주저 앉아 산등성 너머로 저물어 가는 해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기쁨 마음으로 기념촬영을 했다. 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성삼재 고갯길에서 한 시간을 걸으면 대피소가 나온다 했다.
 
노고단 대피소에서 우릴 반겨주던 사람들

노고단 대피소에서는 수내, 소인, 이영, 둘리, 사포가 나타나 우리를 환영했다. ‘낯설은 대구’까지. 그들은 우리를 기다리며 저녁을 해놓았다 했다. 내가 저녁 당번이었는데 완전 감사했다. 어찌나 된장국과 미역국을 맛있게 끓여놨던지 5그릇은 먹었던 것 같다.


지리산 종주를 위해 각자 산행을 했지만 11명이 함께 모인 것은 처음이었다. 낯설은 대구는 지나지산의 친구로, 지금부터 함께 종주를 하기로 했다. 소개하는 자리. 소개는 항상 어색하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각자의 이름과 소속을 간략히 말했다. 나는 말했다. “산을 오를 때는 가급적 저에게 말을 걸지 마세요!” 그래서인가 3박 4일간 사람들은 나에게 말을 잘 걸지 않았다.

 
11명의 여자들은 신나는 종주를 약속하며 9시 뉴스를 볼 시간 잠자리에 들었다.
 
몇 십 명이 함께 산장에서 잔다는 것은 얼마나 고된 일인지.
100명이 넘게 함께 잔다는 산티아고의 그 수도원은 어찌할꼬.
첫날 밤, 초롱아빠의 우렁찬 코고는 소리로 나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www.ildaro.com  [여성주의 저널 일다] 안야리

알래스카에서 사람을 만나다 / 박민나  
달링하버항을 백조처럼 날다 / 김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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