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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에 ‘위대한 사람’에 대한 위인전이나 평전을 읽으면서, 한번쯤은 그런 사람이 되는 상상도 했던 것 같다. 이제는 ‘과연 그럴까?’라고 의심해본다. 이 시대에 진정으로 필요한 사람이 그런 위대한 인물일까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사람이 누군가의 아픔을 대신하기 위해, 누구의 권익을 대변하기 위해, 권위와 위엄을 갖춘 높은 자리에 앉아 칭송 받는 게 옳은 일일까 의심되고, 과연 그런 사람이 ‘훌륭한’ 것일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진정 필요한 것은 스스로 자신의 권리와 존엄성에 대해 ‘용기 있게’ 얘기하도록, 스스로가 인생의 주인공으로 설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용기 있는 개인들이 많아지는 것이, 그런 얘기를 깊이 듣고 서로가 이해할 수 있을 때가, 위대한 ‘영웅’의 탄생보다 더 기쁠 것 같다.

“김효진의 솔직한 장애여성 이야기” <오늘도 난, 외출한다>라는 책을 읽으면서 사람들이 말하는 ‘위대한 일’이 사실은 우리네 삶이 행복해지도록 돕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남들에게는 당연한 일상이자 최소한의 권리에 해당하는 일들이 장애가 있는 우리들에게는 일생 동안 개인이 극복해야 할 과제로 주어지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았다.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내 어린 시절의 경험을 돌아보았다. 나 자신과 나를 둘러싼 세상을 이해하고 변화시키는 데 보둠이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안고서.”

이 책을 쓰는 과정에 대해 김효진씨는 ‘의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라며, “따스하고도 평화로웠던” 유년의 뜨락을 서성이기도 하고, 자신도 모르게 “설움이 복받쳐 ‘엉엉’ 소리 내서 울고 말았던” 시간으로 되돌아가 얘기를 풀어나가기도 한다.

“남의 속도 모르고”  

1부 “우리는 같다. 단지 내게 장애가 있을 뿐”의 첫 단편 제목은 “남의 속도 모르고”이다. 그걸 읽으면서 우리가 얼마나 ‘남의 속도 모르고’ 살아왔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엄마를 안심시키거나 비난 받지 않기 위해, 나의 여성성을 최대한 부정하거나 최소한 숨기는 쪽을 택했다. 예쁜 옷 따위엔 관심도 없는 것처럼.”

우리의 유년의 기억은 따스하고도 평화롭게 기억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이렇게 감춰진 상처들이 착하고 순종적인 여성으로 자라도록 길들이기도 한다. 특히 김효진씨는 “자신을 표현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우리 장애여성”들은 “내가 어떤 옷을 좋아하는지조차 모를 때가 많다”고 말한다.

어린 시절 “웃는 모습이 예뻤던” 아이는 하늘 같은 담임선생님과 같이 화장실에 갈 수 없어서 오줌을 싸고 친구들에게 ‘오줌싸개’라고 놀림을 당한다. 또, “언제까지 기다리고 참기만 해야 했던” 아이는 청소시간만 되면 화단에 가서 불편하게(몸도, 마음도) 앉아있는데, 친구들은 그 아이에게 “넌 좋겠다, 청소 안 해서”라고 말한다. ‘착한 아이’는 빙그레 웃기만 한다. 나이보다 속이 깊고 참을성이 많은 그 아이에 대해 엄마는 늘 “참을성이 많다”고 사람들에게 자랑한다.


장애여성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 사회는 확실히 ‘남의 속을 너 모르기도’ 하고, 또 어떨 때는 심지어 너무 ‘아는 척’, ‘친절한 척’ 한다. 장애여성은 느긋하게 거리에 핀 꽃들을 감상하며 산책할 수도 없다. 어디선가 다가온 한 남자가 “힘드실 텐데” 하며 뒤에서 휠체어를 밀면서 산책할 시간을 빼앗아버린다.

미용실에 가면 “머리가 길면 간수하기만 힘들고, 자기 몸도 추스르기 힘든데” 하며 물어보지도 않고 자기 멋대로 머리를 잘라버리기도 한다. 장애여성들은 이런 ‘극진한’ 친절에 대해 도와줘도 좋은지 “물어봐 달라”고 말한다.

장애여성들은 성폭력 위험에 심각하게 노출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얘기를 할 때면 “어쩌면 비난의 화살이 내게로 돌아올 수도 있었다”고 걱정도 해야 한다. 자주 성추행 당했다고 하소연하자, 친구의 남편이 “당신 친구가 그렇게 섹시해?” 하며 물었다고 한다. “예쁘지도 않고, 멀쩡한 여자도 많은데 어떤 남자가 건드릴 마음이 생기겠느냐”는 의미다. 그 여성은 실제로 지하철에서 “성추행범의 표적이 되어온” 경험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이 책은 어떻게 우리 일상이 차별적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보여준다. “장애여아였던 내가 어떻게 차별에 노출되고 길들여졌는가를 드러”냄으로써 말이다.

마흔이 조금 넘은 나이에 머리가 하얀 외모 때문인지, 김효진씨가 쓴 칼럼 명은 <백발마녀전>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이 책은 2003년부터 인터넷장애인신문 <에이블뉴스>에 연재해오던 칼럼을 뼈대로 해서 재구성하고 보완한 것이다.

“풍요로운 노년을 꿈꾼다”는 그는 “성공한 여자나 부자는 아니겠지만 ‘호호아줌마’라는 별명 그대로 지혜롭고 넉넉하며 주변 사람들과 무언가 나눌 수 있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www.ildaro.com [일다] 윤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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