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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의 비밀을 안고 사는 아이들: 영화 <그르바비차>

전쟁의 고통은 비단 죽음과 부상의 아픔에서만 비롯되지 않는다. 삶의 터전의 파괴, 기아,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 익숙한 것들과의 작별. 이 모든 슬픔과 공포, 충격이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력으로부터 비롯된다.

전쟁 기계에 살해당한 자들의 고통은 비록 읽어낼 수 없는 무형이지만, 고스란히 남아있는 사람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전쟁은 인간이 창조해낸 가장 극악하고 극대화된 폭력의 정점이기 때문에, 살아남은 인간들이 떠맡아야 하는 상흔은 종종 한계 이상으로 넘어버리곤 한다.

영화는 한 무리의 여성들이 눈을 감은 채 서로에게 기대고 포개어진 채로 누워 있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카메라는 이 군상들을 담담하게 훑고 지나간다. 왜 그들이 거기에 그렇게 무력하게 겹쳐져 있는지 다소 의아한 채 우리는 그들을 관찰한다. 완벽히 수동적인 피사체로서 늘어져있는 그들 사이로 한 여인이 똑바로 정면을 응시하며 관객들과 눈을 맞춘다. 에스마. 이 영화는 그녀와 그녀의 비밀, 딸에 관한 이야기다.

소위 ‘20세기 최악의 인종청소가 자행된’ 보스니아 내전 이후, 에스마는 ‘전사한 남편’의 부재에는 아랑곳없이 딸과의 삶에 하루하루 소진해간다. 전쟁으로 인한 비극의 그림자는 전혀 보이지 않는 듯한 댄스클럽에 웨이트리스로 취직한 그녀는 고된 일과를 묵묵히 견뎌 나간다. 아마 그건 그녀의 귀엽고 당돌한 딸 사라 때문일 것이다.

전장의 포화 못지않은 댄스클럽의 강한 비트음악과 밀려오는 사람들의 물결에 쟁반 위 술병들을 쏟을 듯 위태위태하면서도 그녀의 표정은 폐허처럼 고요하다. 아니, 단 한 번 그녀는 일터에서 터져 나오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탈의실에 쭈그려 통곡했다. 그것은 같이 고용된 동료여성이 술 취한 군인의 품에 안겨 웃음을 터뜨릴 때였다.

그녀의 폐쇄된 마음이 더 굳게 닫혀버린 표정을 뚫고 나온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에스마의 개인적 경험이, 비밀이 풀려 나오고, 그럴 때마다 전쟁이 그녀의 영혼에 얼마나 큰 생채기를 내었는지 관객들은 서서히 다가가게 된다.

그녀는 정신치료 목적인 모임에 나가 다른 피해자 여성들과 단체상담을 받지만 그저 무심히 바라볼 뿐이다. 눈물을 흘리며 내면적 상처를 고백하는 여인과 전쟁의 고통을 견뎌내지 못하고 정신을 놓아버린 탓에 끊임없이 웃어대는 여인, 이들의 정확한 정체는 영화 후반부에 보여진다. 카운셀러는 에스마에게도 솔직하게 털어놓으라고 권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말고 일자리나 만들어주지 그래요?” 하며 냉담할 뿐이다.

그렇게 조용히 살아가는 에스마에게도 몇 가지 사건이 생긴다. 하나는 남자. 모두가 거리낌없이 노출을 즐기는 나이트클럽에서도 웨이트리스 제복 블라우스의 앞 단추를 끝까지 꼭꼭 여미는 그녀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젊은 남자와의 관계에서 계속 뒷걸음치기만 한다. 그에 대한 태도가 변하는 것은 그 역시 보스니아 전쟁의 피해자이고, 학살된 유해가 파묻힌 장소를 돌아다니며 아버지 유해를 찾아 헤맨다는 것을 들은 후다.

그녀의 일생에 또 다른 중요한 일은 딸 사라와의 관계다. ‘유해도 찾지 못한 전사자’인 남편 없이 오로지 딸과 둘만 영위하는 에스마의 삶은 상당한 모성을 발휘하는 것 같아 보인다. 댄스클럽에서 고용주에게 압박을 당하면서도 딸을 수학여행 보내기 위해 발버둥치고, 딸이 좋아하는 생선을 사주기 위해 아낌없이 돈을 털어내는 에스마의 모습은 영락없이 딸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모습이다.

사라가 아버지의 모습을 그리워할 때, 그리고 어머니가 새로운 남자친구로 인해 자신을 버리고 떠나지 않을까 불안해할 때, 에스마는 사라를 품에 안고 “결코, 결코, 결코 너를 떠나지 않을 거야”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딸에 대한 애정은 그녀 마음속에 정반대의 불안이 존재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에스마가 딸 사라를 바라보는 눈길은 끈끈한 애정에 차있다기보다는 딸 너머의 무엇인가를 응시하는 듯, 오히려 메마르다.

이 영화에서 억눌렀던 에스마의 기억과 상처는 전쟁의 상징물이자 다름아닌 딸에 의해 겨누어진 총에 의해 비명처럼 터져 나온다. 사라가 남자친구 아버지의 유품인 총을 어머니에게 겨누며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의 모습(전장에서 죽은)을 증명하려 하고 자신의 결핍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는 극단의 상황까지 가서야 진실이 터져 나온 것이다.

어느 누구에게나 잔인한 상황이지만 전쟁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당한 이 희생은 전쟁이 끝나고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아물지 않는다. 더욱이 여성들은 전쟁 이후에도 피해사실을 공개할 수조차 없는 관습법 하에서 더 큰 고통을 겪는다. 이 영화는 전쟁을 겪은 여성들의 현실을 감정이 섞이지 않은 눈길로 재현해냈다.

감독 야스밀라 즈바니치는 이 데뷔작으로 베를린영화제에서 금곰상을 수상했는데 수상 소감에서 “보스니아에서 2만 명의 여성을 강간하고 10만 명을 살해한 전쟁범죄자들이 아직 체포되지 않고 있는데도 아무도 그들을 처벌하는데 관심이 없다. 이 영화가 보스니아에 대한 인식을 바꿀 수 있기를 바란다”고 밝힌 바 있다.

그르바비차는 보스니아 내전의 중심지였던 사라예보의 한 지구로,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보스니아 내전은 탈냉전 이후 보스니아 회교정부 및 크로아티아와 신유고연방의 지원을 받는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계 사이에서 발발한 분쟁으로, 내전 중 세르비아계는 ‘인종청소’라는 명목으로 보스니아의 7천여 이슬람 교도와 알바니아계 코소보 주민 1만 명 이상을 학살했다. 이 내전으로 인해 25만 명이 죽고 100만 여명의 난민이 발생했으며 2만여 명의 여성들이 수용되어 집단성폭행을 당하는 참상이 벌어졌다.

영화 초반부에 등장하던 여성들은 바로 그 피해자들인 것이다. 모든 여성들에게 마찬가지로 끔찍한 일이지만, 관습적으로 특히 무슬림 여성들에게 강간은 엄청난 치욕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죽음을 뜻하는 것이다.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러한 피해를 공개하지 못한 채 숨기고 아파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은, 여성들의 아픔을 그 사회가 받아들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보스니아 내전 이후 10년이 지난 지금, 강간으로 인해 출생한 아이들은 버려져 고아원에 보내지거나 입양되기도 하고, 이례적으로 생모에 의해 직접 키워진다 하더라도 출생과정은 비밀에 붙여져 자라고 있다 한다. 이렇듯 전쟁의 아픔은 그것을 직접 겪은 사람들에게는 물론 대물림 된 비극이 되어, 10년의 세월이 지난 후에도 지속되고 있다. 정작 전범들은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고 세상을 활보하고 있는데 말이다. [일다] 노조수연

       [관련 영화] 철책을 사이에 둔 두 여성의 삶 [관련 영화] 딸의 시선으로 본 어머니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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