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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고생’이라는 단어에는 특정한 이미지와 의미가 붙어 있다. 깔끔한 교복 차림에 늘 청결함을 유지하며, 순진하고도 발랄한 성격인데다, 가슴과 엉덩이가 강조된 ‘섹시한’ 모습이 그것이다. 여자고등학교를 다니는 십대들의 실제 모습과는 상관없다. 남성들의 성적 판타지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고생’은 스팸 메일이나 포르노 사이트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이며, 남성용 만화에도 단골로 등장하는 캐릭터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실제 여고생들 사이에서도 비현실적이고 ‘섹시한’ ‘여고생’ 이미지가 행동이나 성격을 규정짓는 데 판단기준이 된다. 도시락에 목숨을 걸거나 머리를 감지 않을 경우, ‘여고생 같지 않다’고 표현하는 것이 그 예다.


<생생여고생>은 실제 여고생의 생활에 대해, 비현실적이고 ‘섹시한’ ‘여고생’ 이미지의 속성에 대해서도 잘 파악하고 있다. 오히려 실제 여고생과 ‘여고생’ 이미지가 다르다는 사실을 만화적 소재로 채택해 비현실적이고 ‘섹시한’ ‘여고생’의 이미지를 가볍게 비웃어준다.

표지에는 새빨간 색의 바탕에 귀여운 이미지의 여고생이 그려져 있는데, 소제목으로 “19금이 아님♡”이라고 적어 놓아 ‘여고생’을 소재로 한 일반적인 성인물들을 패러디하고 있다. 이 만화는 코믹 등지에서 동인지로 판매되다가 단행본으로 출시됐는데, 한국 여고생들의 생활을 자연스럽게 그려냈다는 점에서 ‘한국의 아즈망가’라는 평을 들으며 인기를 끈 바 있다.

앨리스의 만화 "생생여고생"

어느 학교든 마찬가지겠지만, <생생여고생>의 학교 또한 엄격한 규율과 입시 스트레스가 존재한다. 여고생들은 최대한 이를 농담과 유희로 소화해낸다. 순결서약이 진행되는 대강당에서 비웃음과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정작 한 학생이 ‘순결이 뭔가요?’라고 묻자 할 말을 잃은 강사는 순결서약을 더 이상 진행하지 못한다.

수업시간, 선생님은 ‘여러분은 공부보다 중요한 것을 찾아 여기(학교)에 왔어요’라며 꿈을 찾으라고 친절하게 권하지만, ‘성적 상위 5%는 유지하면서 찾으라’고 전제를 단다. 매니큐어를 바른 민지에게 선생님이 당장 지우라고 명령하자, 민지는 ‘최고급 네일아트 무료 시술권’을 건넨다. 당황한 선생님이 황금만능주의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충고하고, 민지는 왜 안 되느냐고 따진다. 아무튼 민지 덕분에 그날의 손톱검사는 중지된다.

한편, 네 컷 만화 사이로 삽입된 단편 만화엔 교장을 비롯하여 여고생 판타지를 지닌 남자와 그에 대적하는 여고생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자못 순진한 얼굴을 하면서 상대 남성들을 처리하여 여고생 판타지가 얼마나 어이없는 것인지 폭로한다. 학교 성폭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학생들은 선생님을 ‘변태’로 밀어붙이며, 선생님에 대한 분노와 적당한 비웃음을 드러낸다. 이는 여고생들이 스스로 자신들을 둘러싼 성적인 담론과, 성폭력에서 결코 안전하지 않은 환경에 대해 잘 알고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여성에게 위협적인 성적 판타지를 지닌 남성이나 성희롱을 가한 선생을 ‘변태’라고 규정하고 몰아내버리는 결론은, 학교 권력이나 억압과 최대한 타협하는 해석이라 할 수 있다. ‘변태’라는 규정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성적 행위를 하는 사람을 지칭한다는 것이기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생생여고생>은 여고생들의 일상 문화에 대한 관찰 또한 세심하여 웃음을 자아낸다. 담임 선생님의 부인이 아이를 낳자, 학생들은 선생님에게 아이 이름을 어떻게 지었냐고 묻는다. 선생님이 아이 이름을 설명하려고 하자, 학생들은 제대로 듣지도 않은 채 ‘삼식이’라고 지으라고 한 뒤, 다음부터 ‘삼식이’라고 계속 불러대서 동료 교사들까지 ‘삼식이’라고 부른다.

평소에는 머리를 잘 감는 여고생들이지만, 누군가가 머리를 감지 않은지 3일이 되었다고 말하고 나면 저마다 머리를 감지 않는 경쟁에 돌입한다. 급식시간, 학생들은 7반에서 바퀴벌레가 나왔다, 5반에서 바퀴벌레 반 마리가 나왔다며 너무 싫다고 비명을 지르면서도 즐겁게 밥을 먹는다.

<빗속의 여고생> 에피소드는, 이야기를 끌어가는 방식 자체가 학생들이 수다를 떨면서 대화를 이어가는 것과 비슷해서 재미있다. 모르는 여자 아이에게 우산을 씌워준 주인공의 이야기는 어느새 공포물로 바뀌어버린다.

다소 일관되지 못한 그림체나, 구성이 헐거운 듯한 느낌이 단점이긴 하되, 실제 여고생들의 생활이 ‘생생’하게 느껴진다는 점에서, 그리고 여고생을 둘러싼 담론을 유머러스하게 풀어냈다는 점에서 <생생여고생>은 유쾌한 만화다.
www.ildaro.com [일다] 김윤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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