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초고층 아파트에 대한 소유욕의 이면
미야베 미유키의 <이유>
[여성주의 저널 일다] 김윤은미
반다루 센주기타 뉴시티는 일본의 초고층 아파트 단지다. 한국의 경우라면 타워 팰리스와 같은 건물을 생각하면 되겠다. 한국이든 일본이든 초고층 아파트는 많은 이들이 한 번쯤 살고 싶어하는 부의 상징이다. 어떤 이는 초고층 아파트에 집을 사서 재산을 한몫 챙기고 싶어할 테고, 어떤 이는 초고층 아파트에 살면서 자신의 부유한 생활을 자랑하고 싶을 테다.
그런데 이 초고층 아파트에 어느 날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4인 가족이 모조리 살해된 것이다. 문제는 이 4인 가족이 아파트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들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일까? 진짜 아파트 주인은 왜 집을 비워야 했을까? 지은이는 이 살인사건의 정체를 밝혀나가며, 초고층 아파트에 대한 소유욕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어떤 문제를 남기는지를 탐구한다.
<이유>는 서술방식이 독특하다. 지은이로 짐작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화자가 마치 다큐멘터리의 화자처럼, 사건 시작부터 결말까지를 인터뷰 방식으로 차분하게 전개해나간다. 그래서 추리소설이되, 범인을 맞추는 재미보다는 오히려 사건과 연결되어 등장하는 많은 가족들의 이야기를 보는 재미가 톡톡하다.
반다루 센주기타 뉴시티는 외부에 아파트 단지의 통로를 개방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를 따질 정도로, 외부와는 분리된 섬과 같은 공간이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행복하고 부유한 가족생활을 하고 있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가족들을 개별적으로 따져보면, 그렇지 않다. 어떤 이는 이 초고층 아파트를 보며 다음과 같은 심정을 토로한다.
“나는요, 그 어지러울 정도로 높은 아파트 창문을 밑에서 이렇게 올려다보면서 생각을 했어요. 저 안에 사는 사람들은 당연히 갑부들이고 세련되고 교양도 있고 옛날 일본인의 감각으로는 상상도 못할 생활을 하고 있을 거라고. 하지만 그건 어쩌면 가짜인지도 몰라요. 물론 실제로 그런 영화 같은 인생을 사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 그것은 그것대로 점점 진짜가 되어가겠지요. 하지만 일본이라는 나라 전체가 거기에 다다르기까지는, 얇은 껍데기 바로 밑에는 예전의 생활 감각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 같은 위태로운 연극이 아직은 한참 동안 계속되지 않을까요?”
살인사건이 일어난 2025호의 주인 고이토 노부야스와 시즈코 부부는 아파트를 사기 위해 무리해서 돈을 끌어다 썼다가 실패한 전형적인 경우다. 이들은 반다루 센주기타 뉴시티를 사기 위해 부모의 재산을 미리 물려받고, 빚도 냈다. 겉으로 보기에 이들은 초고층 아파트에 살 사람 같다. 시즈코의 친구들은 부티크에 근무하는 시즈코가 사치스런 옷차림으로 모임에 나와 파트타임 직업을 무시하는 발언을 자주 해왔다고 증언한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렇지 않다. 시즈코는 사립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 노부히코의 학비가 부담이 되어서 선생님에게 상담을 요청할 정도로 재정상태가 좋지 않다. 남편 노부야스 또한 카드 빚을 상당히 많이 진 상태다. 일본의 버블경제가 붕괴하고 부동산 가격이 폭락하면서, 이들 부부는 탈출구를 찾지 못한다. 결국 2025호 또한 대출금을 갚을 여력이 없어서 차압 당하고, 경매에 부쳐진다.
경매에 부쳐진 집을 순순히 내줄 수 없다는 마음에 노부야스는 술수를 쓴다. 즉 2025호에 자신들이 아닌 딴 사람들을 대신 살게 하고, 이들에게 세를 준 것처럼 계약서를 작성해놓았던 것이다. 그 동안 가족, 친척들 간의 거리는 점점 멀어진다. 아들 노부히코는 어머니가 교양이 없고 마음이 좁다고 생각하며, 가족에서 늘 벗어나고 싶어한다.
시즈코는 여유 있는 동생이 돈을 빌려주지 않는 바람에 상처를 받는다. 또 평소에는 묵묵히 살던 남편이, 집이 경매에 부쳐지게 되자 시즈코의 사치스런 생활을 탓하는 바람에 배신감마저 느낀다. 노부야스는 ‘연줄’이나 ‘인맥’이 없어서 자신이 몰락했다고 생각한다. 그의 열등감은 점점 심해지고, 불법적인 방식을 택하게 된다. 경매, 차압, 빚과 같은 단어들이 생활을 조여 오면서, 삐걱거리며 유지되어왔던 가족생활은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한편 2025호를 경매에서 산 이시다 나오즈미의 가족 또한 안온한 핵가족은 아니다. 이시다 나오즈미는 부인이 일찍 죽은 후, 자식들에게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다’는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다. 한편 아들과 딸은 아버지를 대하기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다. 더욱이 아들은 명문대가 아닌 평범한 대학에 진학하겠다고 선언해서 아버지와 싸운 상태다.
자식에 대한 열등감과 부채의식에 시달리는 아버지는 엉뚱한 방식으로 문제를 풀려고 한다. 즉 반다루 센주기타 뉴시티와 같은 번듯한 아파트를 사면, 번듯한 가족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시다 나오즈미 또한, 고이토 일가와 비슷한 방식으로 빚을 내어 돈을 마련해서 경매에 나온 집을 산다. 그러나 고히토 노부야스의 술수로 인해, 2025호는 손쉽게 그의 손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초고층 아파트를 둘러싼 두 가족의 갈등은 결국 비극으로 끝이 난다. 지은이는 이 두 가족뿐만 아니라, 이들과 연결된 다양한 가족들을 등장시킨다. 그 가족들 가운데는 핵가족도 있고, 한부모 가족도 있고, 피가 섞이지 않았지만 공동생활을 하면서 가족처럼 되어버린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가족의 형태는 중요하지 않다. 타인에게 가족의 부유함을 자랑하고 싶은 허영심이나 서로 의사소통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감정적인 교류가 불가능한 상태 때문에, 인간 대 인간으로서 관계 맺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무심’한 인간들이 양산되는 사태가 가장 두려운 것이다.
반다루 센주기타 뉴시티가 상징하는 부유하고 안온한 가족생활의 이미지 뒤에는 소통하는 법을 잘 알지 못하는 억눌러진 현대인들의 마음이 도사리고 있다. ⓒ www.ildaro.com
관련 이슈 중년여성, 독립을 말하다 / 조이여울
관련 이슈 '건강한 자기애'가 부재한 사회 / 최현정
'문화감성 충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 나무는 빗물이 필요하지 않아” (2) | 2008.10.16 |
---|---|
그 남자 작곡, 그 여자 작사? (0) | 2008.10.14 |
성인물 아닌 실제 ‘여고생’ 이야기 (0) | 2008.10.12 |
페미니즘, 당신의 계급을 묻다 (4) | 2008.10.06 |
20대 여성의 일상을 다룬 만화들 (2) | 2008.10.05 |
소년의 성장을 다룬 만화들 (0) | 2008.10.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