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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조하고 쓰디 쓴, 소년의 성장기: 체스터 브라운의 <너 좋아한 적 없어>

체스터 브라운의 <너 좋아한 적 없어>는 상당히 보기 드문 스타일로 소년의 성장을 솔직하게 다룬 만화다.


체스터 브라운은 1980년대 등장한 캐나타의 얼터너티브 만화의 선두주가로 꼽히는 작가로, 언뜻 보기에도 판화처럼 검은 배경 위에 몇 개의 하얀 칸으로 전개하는 방식이나 가는 선으로 그려진 다소 그로테스크하고 힘없이 보이는 인물들의 모습은 영미계열의 인디만화라는 인상을 풍긴다. 괴기스럽고 특이한 상상력을 발휘하는 다른 작품과는 달리 <너 좋아한 적 없어>는 극도로 사실적인 상황을 절제미 있게 연출한다.


일상적 폭력과 의사소통의 단절 드러내

작가의 자전적인 경험임을 확실하게 표시하기 위해서일까, 작가와 주인공의 이름은 같다. 체스터는 지방의 중소도시로 여겨지는 어느 마을에서 살고 있다. 그는 키스와 레드 제플린의 음악을 좋아하고 그림을 그린다. 그는 ‘졸라’, ‘씨발’과 같은 욕은 모자라고 무식한 사람들이 쓰는 거라고 충고하는 어른스러운 이웃집 친구 코니의 말을 듣고, 그 말을 쓰지 않겠다고 학교에서 선언했다가 친구들에게 놀림 당할 정도로 소심하다.

코니의 동생 캐리는 이런 체스터가 좋아서 차고에 ‘체스터가 좋아’라고 쓰고, 설거지를 도와달라고 그를 부르는 등 적극적으로 나서지만 정작 체스터는 가슴이 크고 섹시해 보이는 캐리의 친구 스카이에게 빠져 어쩔 줄 모른다. 체스터의 엄마는 아파서 병원에 가야 하는데, 그 상황에서도 체스터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 채 무덤덤하게 엄마가 준 크리스마스 생일 선물을 뜯을 뿐이다.

체스터의 주변에 펼쳐지는 상황은 지극히 일상적인 동시에 적나라하다. 작가는 일상적인 폭력, 의사소통의 단절과 외로움을 드러낼 에피소드들을 적절하게 골라내어 차분하고 집요하게 그려낸다. 보기 싫은 부분들을 정면으로 보여주는 식이다. 그래서 남자나 여자 모두 직설적이고 왜곡 없이 그려진다. 예컨대 체스터의 엄마가 차를 몰면서 뒷자리에 앉아있는 체스터와 그의 동생에게 “난 패드를 넣은 브래지어를 한단다. 그러면 다른 여자 크기 정도는 돼 보이거든”이라며 남자들의 기대에 맞춰 ‘여성적’으로 보여야 하는 자신의 상황을 고백하지만, 자식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다.

검고 큰 여백, 헐렁한 그림체와 절제된 대사 때문에 그 효과는 더욱 증폭된다. 가끔 등장하는, 비스켓을 먹는 체스터의 모습은 영화적 연출을 연상케 하는데, 건조하고 쓰디 쓴 일상을 상징적으로 처리한다.


가족과 학교, 그리고 연애

가족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단란한 가족적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가정 안에서 엄마는 끊임없이 아들들과의 거리를 좁히려고 애쓰지만 실패하는 존재이며, 아빠는 아예 존재감마저 희미하다. 예를 들어 엄마가 심부름을 가달라고 부탁하면 아들은 그 부탁을 거절하는데 그 결과 엄마는 상처 받았다고 토로하고 아들은 상처를 주었다는 자의식은 있지만 죄책감이나 미안함 등의 감정을 느끼지 못한 채 그저 무덤덤하게 구는 식이다.

학교는 우월하다는 것을 표출하지 않으면 사정없이 무시당하는 공간이다. 체스터에게 몰려온 남자아이들은 “너도 쟤 먹고 싶지?”, “가슴도 만지고 싶지?”, “좋아. 그럼 ‘질’ 해봐” 등 소년들이 가질 법한 성적 판타지들을 쏟아내며 그런 판타지를 감히 발설하지 못하는 체스터를 은근히 따돌린다. 연애 또한 달콤한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 체스터는 겨우 스카이에게 고백하지만 정작 데이트 신청을 할 용기가 없다. 캐리는 질투하지 않는 척 체스터와 스카이 사이를 잘 되게 해주려는 듯 행동하지만 그 모습은 오히려 둘 사이에 끼어들고 싶어하는 그녀의 비굴한 상태를 드러낼 뿐이다.

어쩌면 ‘소년의 성장’이라는 말은 반쯤만 맞을지도 모른다. 체스터는 엄마의 죽음이나 연애 사건, 왕따 사건 등을 통해 육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변화하지만 정작 자신의 감정을 길러 낼 방법을 모르며 그냥 내버려둔다. 대신 무덤덤하고 건조한 상태를 상징해 줄 만한 사물들을 그려서 표현하는 방식을 익힐 뿐이다. 병원 침대에서 쪼그라든 끔찍한 형상을 한 채 엄마는 죽어가고 캐리는 체스터의 물건을 가지려다가 거부당하자 끝내 “너 좋아한 적 없어! 알아? 한 번도 좋아한 적 없다고!”라고 외치며 체스터와 싸운다.

이런 상황 앞에서 죄책감을 가질 법도 하며, 저항감이나 혐오를 느낄 수도 있을 테지만 그는 그저 잔디를 깎을 뿐이다. 그렇게 그의 소년시절은 일단락된다. 체스터의 수동적인 태도나 어쩔 줄 몰라서 감정적인 호의를 거부하는 모습은, 사회화 과정에서 감정적인 영역을 다루지 않는 남성들의 면면과 그에 대한 자의식을 엿보게 한다.

한국계 미국소년의 솔직한 성장담: 데릭 커크 김의 <다르면서 같은>

“오리엔탈 맛이란 게 도대체 뭐지? 동양 전체를 아우르는 어떤 맛이 있다는 거야?” 슈퍼마켓에서 음식을 고르면서 한국계 미국인 사이먼과 낸시가 대화를 나눈다. 사이먼의 질문에 대해 낸시는 “간단해. 여기 닭고기 맛과 소고기 맛이 있지? 연역법에 의하면, 이 속에는 아마 동양인을 갈아 넣을 꺼야”라며 냉소적이면서도 발랄하게 답한다.


사이먼과 낸시는 시종일관 이 같은 분위기로 일상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자연스러우면서도 마음 한구석을 건드리는 인상적인 장면들을 엮어나간다. 사이먼처럼 한국계 미국인 데릭 커크 김이 그린 만화 <다르면서 같은>은 미국 인디만화적인, 일상에 대한 세심한 관찰과 블랙코미디적인 상상력이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경계인적인 정체성과 배합된 성장만화다.

중편 <다르면서 같은>은 우연한 기회에 고향을 방문하여 사춘기의 실수를 회상하는 소년의 후회를 그려낸 만화다. 사이먼은 친구 낸시와 고등학교를 다닐 때까지 살았던 고향 패시피카로 떠나게 된다. 낸시의 방으로 ‘벤 리랜드’라는 남자가 낸시 방의 예전 입주자 ‘사라 리차슨’에게 수없이 지독한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보내왔는데, 낸시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벤의 마음을 받아들이겠다는 답장을 보내버린 것이다. 이들은 사이먼의 고향 패시피카에 밴 리랜드가 산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서 장난 삼아 패시피카로 향한다.

누구에게나 고향의 낯익은 거리와 동창들은 오래 지냈던 만큼 복잡한 감정을 유발한다. 사이먼은 패시피카를 “자기 고등학교에서 단 1마일도 떨어지기 싫어하는 비참한 교외거주 인생패배자들의 집합소”라며 비하한다. 학창시절 사이가 좋지 않았던 동창 에디는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은 상태로, 오랜만에 만난 사이먼에게 반갑게 인사한다. 사이먼은 “에디란 녀석은 학창시절 내내 나랑 내 친구들을 괴롭혔어… 이제는 오랫동안 헤어진 친구인 양…. 이해가 안 가”라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한다.

사이먼의 복잡한 감정은 슈퍼마켓에서 고등학교 때 친하게 지냈던 시각장애인 여자친구 아이린을 마주치면서 절정에 달한다. 사이먼은 아이린과 친하게 지냈지만 ‘자신이 다른 데이트 상대를 못 찾았다고 생각할까봐’ 속 보이는 거짓말을 해가면서 아이린의 데이트 신청을 거절한다. 하찮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친구에게 상처를 준 그 사건은 사이먼에게 지워지지 않는 얼룩처럼 남아있다.

슈퍼마켓에서 간신히 용기를 내어 아이린을 쫓아간 사이먼에게 아이린은 자신의 이야기를 해준다. 아이린은 어렸을 때 도자기를 깼는데 ‘물건을 깨는 애’로 보이고 싶지 않다는 자존심 때문에 엄마에게 자신이 깨지 않았다고 계속 우겼다. 아이린의 엄마는 아이린에게 ‘거짓말을 알아차리는 괴물이 있는 종이봉투’에 손을 넣어보라고 권한다. 아이린에게 겁을 주어서 잘못을 실토하게 만들 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이린은 손을 집어넣고서도 깨지 않았다고 우겼고 그녀의 엄마는 실망한다. 아이린은 사이먼에게 “그 이후 난 계속 정직하게 살았어”라고 말한다. 거짓말을 끝내 실토하지 않았던 그 경험이 오히려 그녀를 진실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한편 ‘괴물 혹은 변태’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벤 리랜드는 평범하고 친절한 아시아계 남자였다. 기대와는 다른, 자신의 초라함과 대면하는 경험을 겪은 후 사이먼과 낸시는 해가 저무는 해변가에서 현재의 불안한 심경을 나눈다. 물론 <다르면서 같은>은 지극히 현실감 나는 세계를 그리는 만화인 만큼, 사이먼과 낸시의 고민 또한 자신의 경험에 삶의 전 의미를 거는, 심각하고 진지한 수준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아이린의 거짓말 이야기에 충격을 받은 데다가 동창들의 결혼 소식까지 접한 사이먼은 “내가 7년 전에 사춘기적인 거짓말이나 늘어놓던 패배자 그대로일지 몰라서 두려워. 지금은 좀 달라졌을까?”라고 고민하고, 낸시는 이에 대해 “자아도취 호로자식 그 자체구나”라며 한 대 쏘아주고서는 ‘계속 친구가 되 주겠다’며 슬쩍 위로해준다.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일상의 순간들 가운데 인상적인 상황을 뽑아내어 담백하게 처리하는 데릭 커크 김의 탄탄한 솜씨는 다른 단편들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Pulling’은 친구와 잡초를 뽑는 일상적인 사건과 주인공이 애인과 헤어지게 되었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괴로운 심경을 오버랩 시켜서 담아냈다. ‘휘발유’는 주유소에 언제 들리는가의 문제로 미묘하게 다툰 부부의 모습을 통해 서로에게 바라는 것이 어긋나기 쉬운 인간관계의 불완전함을 포착해 낸 수작이다.

재치 넘치는 상상력이 돋보이는 만화들도 있다. 연애를 하지 못하는 불만족스러움부터 자살충동까지 심각한 감정들을 장난치듯이, 그러나 정확하게 다루는 ‘올리버 픽’은 21세기적 부조리극 같다. ‘똥침’은 작가가 느낀 한국과 미국의 문화 차를 잘 보여주는 만화인데, 한국에 와서 말이 통하지 않아서 괴로운 데다가 결정적으로 화장실이 미국과 너무 달라서 애먹었던 상황을 하느님에게 똥침을 당하는 코믹한 설정으로 그려냈다. 작가는 미국에서 한국인으로 살면서 오리엔탈리즘 때문에 겪게 되는 불쾌한 상황을 잘 그려내면서도 섣부른 민족주의로 빠지지 않는다.

<다르면서 같은>은 소년의 남성적 자의식을 감춤 없이 내보이는 만화이기도 하다. ‘아시아계 남자가 새천년의 섹스 심벌이 될 것이다’라며 떠벌리지만 집에서 홀로 포르노테이프를 보는 모습이나, 한국에서 마르고 왜소한 외모 때문에 여자들에게 인기 없어서 괴로웠다고 토로하는 장면들은 솔직 담백하다. 어른이 된 후에 고등학교 시절의 신문을 훑어보면서 자신의 글의 미숙함을 그제야 깨닫고 좌절하는 에피소드 또한 재미있다.

또래 여자아이들이 쓴 글이 감동적이고 진지했다는 점을 지금에서야 알았다고 후회하며 “내가 스파이더맨의 결혼생활이나 대중소설들의 섹스코드나 신경 쓰고 있는 동안, 진짜 삶, 진짜 사람들이 옆을 스쳐 지나간 것이다. 나는 정말 멍청이였다”라고 고백할 줄 아는 힘은 <다르면서 같은>을 매력적으로 만든다. 일다▣ 김윤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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