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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골라보기: 좋은 동화 vs. 나쁜 동화
<세상을 바라보는 건강한 생각 제공하는 동화들>
“동물원은 동물을 위한 곳일까?”
앤서니 브라운의 <동물원>은 기존의 책들이 문제의식 없이 동물을 사랑하는 한 기제로서 동물원을 바라보고 있었던 시각에 대해 진지하게 되묻고 있다. 동물들의 배설물로 냄새가 지독한 코끼리 우리, 사람들이 “아무리 고함을 지르고 유리문을 탕탕 두드려도” 구석에 웅크린 채 꼼짝도 하지 않는 오랑우탄 등, 여기에 등장하는 동물원의 동물들은 결코 행복하거나 보호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또한 이야기 속의 아이들은 끊임없이 서로 싸우고 소란을 떨며 동물들에게 집중하지 않는데, 그 모습 또한 참으로 사실적이다. 물끄러미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는 고릴라를 보면서 어머니는 “동물원은 동물을 위한 곳이 아닌 것 같아. 사람들을 위한 곳이지”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아이가 동물원 우리에 갇혀 있는 꿈을 꾸는 장면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이렇듯 이 책은 사람의 구경거리로 취급되고 동물원의 동물들의 현실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과연 동물원이 진정 동물들을 위한 것인지를 물으며, 또 우리가 이들처럼 우리에 갇혀 있다면 어떨까 하는 문제제기를 조심스럽게 하면서 끝맺고 있다. 적어도 이 동화책을 읽으면서 지금까지 마냥 즐거운 구경거리로 동물원의 동물들을 구경했던 어린이들이 그들의 처지가 되어 동물을 생각해 보게 되지 않을까?
장애, 삶의 다양성 차원에서 다뤄
두번째, J. W. 피터슨 글, D. K. 래이 그림의 <내게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여동생이 있습니다>는 장애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준다. 이 책의 화자인 ‘나’의 청각장애인 동생을 통해 청각장애인들의 불편을, 더 나아가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들을 수 없는 것들을 이해하는지를 보여 준다. 따라서 그들이 부족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 소리가 아니라 다른 감각으로 세상을 감지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책에서 가장 감동적인 점은 이들이 가진 장애가 결코 장애라고만은 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가르침이다.
예를 들어, “아주 작은 소리까지 들어내는 사람은 나예요. 풀밭의 아주 작은 움직임까지 보아내는 사람은 내 동생이고요.”라든지, “폭풍이 불어올 때, 갑자기 우르릉 천둥 소리가 울려도, 바람에 덧문이 덜컹덜컹 흔들려도, 내 동생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아요. 그 애는 색색 잘도 잔답니다. 무서워하는 사람은 바로 나고요.”라는 부분은 장애인을 특별히 불편을 지닌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일반인들과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느끼는 사람이라는 시각을 갖게 한다. 장애라는 것이 모든 상황이 그렇듯 단점도 있지만, 또 장점도 있다는 것, 그래서 우리들과 다르기도 하지만, 조금도 다르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 책은 장애를 시혜나 보호의 차원이 아니라 삶의 다양성의 관점에서 다루고 있는 보기 드문 좋은 책이다.
이 책들 외에도 요즘 점점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이혼문제를 다루고 있는 네레 마어의 <아빠는 지금 하인리히 거리에 산다>, 죽음의 문제를 진지하게 사색할 기회를 제공하는 미스카 마일즈의 <애니의 노래>, 마녀에 대한 편견을 깨뜨려 주는 패트리샤 폴라코의 <바바야가 할머니>, 또 가난과 개발의 문제를 생각하게 하는 국내 저자로는 보기 드문 한성옥, 김서정의 <나의 사직동>도 감동적이다.
<왜곡된 가치관을 주입시키는 위험한 동화들>
“동물원은 얼마나 살기 좋은 곳인지 몰라”
독일의 동화작가 한스 아우구스토 레이의 <아프리카여 안녕!>이라는 동화를 살펴보자. 이 책은 동물원을 찬양하고 있다. 아프리카의 밀림에서 즐겁게 뛰어 놀고 있던 호기심 많은 꼬마 원숭이 ‘조지’가 동물원에 오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조지는 호기심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여러 해프닝을 벌인 끝에 동물원에 무사히(?) 가게 된다.
책은 “동물원은 얼마나 살기 좋은 곳인지 몰라!”라고 끝맺고 있다. 아무런 문제 의식 없이 이 책을 읽는 어린이들은 마치 동물원이 동물들을 잘 살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곳이라는 인상을 받을 것이 뻔하다. 오늘날 많은 이들에 의해 ‘동물원’ 의 존폐에 대해서 문제 제기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책은 구태의연하게 느껴진다.
이언 포크너의 <서커스 곡예사 올리비아>는 서커스를 그저 동물들에게 즐거운 곳으로 다루고 있어 안타깝다. 상상력 뛰어난 돼지 ‘올리비아’는 서커스단에서 여러 동물들과 함께 묘기를 보여 주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다. 서커스에서 묘기를 펼치고 있는 상상이 주요 내용인 이 책은 동물들이 즐겁게 서커스 쇼를 할 거라는 생각들을 심어준다. 오히려 오늘날에는 사람들의 볼거리들을 위해 혹사당하고 있는 서커스 동물들의 생존권에 대해 함께 생각할 수 있는 동화가 필요하지 않나 생각한다.
장애인 나름의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 무시
한편, <장님 꼬끼리 제드>라는 동화책은 ‘장애’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시각장애인 코끼리, ‘제드’와 흰쥐, ‘아나벨’의 우정을 보여주면서, 장애인은 놀림의 대상이 아니라 도움을 주면서 함께 살아야 한 존재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어 교육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각 장애인의 세계를 인정해 주기보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불편함만을 부각시키고 있다.
아나벨은 제드에게 색깔들에 대해 설명해 준다.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색들이 얼마나 곱고 아름다운지를 느낄 수 있게 도와준다. 그리고 제드를 괴롭히는 못된 흰쥐들에게 마치 볼 줄 아는 것처럼 속여 혼을 내준다.
이런 태도 속에 시각장애인에 대한 차별을 더욱 강고히 한다고 생각되는데, 그것은 시각장애인 나름의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전혀 인정해 주지 않으면서, 눈으로 인식할 수 있는 세상만을 이해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또한 제드가 시각장애인이 아니라야만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양, 못된 친구들을 속여서 골탕을 먹이는 부분은 장애인을 결핍된 존재로 바라보고 있는 고전적인 생각을 그대로 담고 있다.
아이를 유괴하는 지구, 맹목적인 모성 찬양
또한, <지구에서 사는 것이 즐거워요>라는 책은 환경오염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지구가, 지구의 미래가 위협에 처해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어른들을 깨우치게 하기 위해 그들의 아이들을 유괴해 간다. 자기의 사랑하는 아이들이 없어진 뒤에야 반성을 하고 잘못을 깨달은 어른들은 지구를 살리기 위해 애쓴 결과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와 행복하게 산다는 이야기다.
이 책은 생명체로서 지구를 인식하게 하면서 우리의 과도한 개발과 유해한 물질의 방출이 지구를 병들게 하고 있고, 우리가 살기 위해서조차 지구를 보호하고 잘 가꾸어야 한다는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이유괴’와 같은 끔찍스럽고 폭력적인 행동을 정당화하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아이들에게 중요한 일을 위해서 폭력적인 수단을 사용해도 된다고 하는 생각을 은연중에 심어줄 수 있다.
좀 다른 관점에서 <너를 사랑해, 우리 아기 꼬질이>는 ‘모성의 신화’를 참으로 소름 끼치게 표현하고 있어,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사랑한다, 나의 사랑스러운 아기야”라고 아기를 감싸 안으며 말하는 엄마에게 아이는 자기가 ‘무서운 원숭이’라도 좋아할 거냐고 묻는다. 이러한 물음에 엄마는 변함없이 아이를 사랑한다고 하자,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악어’, ‘외눈박이 거인’ 등등 그 강도를 높여가며 묻지만, 엄마는 한결같이 그런 아이를 사랑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 속에 등장하는 어머니는 합리적인 판단이 결여되어 있고, 아이를 객관적으로 바라보지도 못한다. 오직 맹목적인 사랑의 존재로서 어머니를 묘사하는 책들을 통해 어린이들은 이런 왜곡된 모습을 진정한 어머니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일다] www.ildaro.com 윤하
“동물원은 동물을 위한 곳일까?”
앤서니 브라운의 <동물원>은 기존의 책들이 문제의식 없이 동물을 사랑하는 한 기제로서 동물원을 바라보고 있었던 시각에 대해 진지하게 되묻고 있다. 동물들의 배설물로 냄새가 지독한 코끼리 우리, 사람들이 “아무리 고함을 지르고 유리문을 탕탕 두드려도” 구석에 웅크린 채 꼼짝도 하지 않는 오랑우탄 등, 여기에 등장하는 동물원의 동물들은 결코 행복하거나 보호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또한 이야기 속의 아이들은 끊임없이 서로 싸우고 소란을 떨며 동물들에게 집중하지 않는데, 그 모습 또한 참으로 사실적이다. 물끄러미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는 고릴라를 보면서 어머니는 “동물원은 동물을 위한 곳이 아닌 것 같아. 사람들을 위한 곳이지”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아이가 동물원 우리에 갇혀 있는 꿈을 꾸는 장면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이렇듯 이 책은 사람의 구경거리로 취급되고 동물원의 동물들의 현실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과연 동물원이 진정 동물들을 위한 것인지를 물으며, 또 우리가 이들처럼 우리에 갇혀 있다면 어떨까 하는 문제제기를 조심스럽게 하면서 끝맺고 있다. 적어도 이 동화책을 읽으면서 지금까지 마냥 즐거운 구경거리로 동물원의 동물들을 구경했던 어린이들이 그들의 처지가 되어 동물을 생각해 보게 되지 않을까?
장애, 삶의 다양성 차원에서 다뤄
두번째, J. W. 피터슨 글, D. K. 래이 그림의 <내게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여동생이 있습니다>는 장애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준다. 이 책의 화자인 ‘나’의 청각장애인 동생을 통해 청각장애인들의 불편을, 더 나아가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들을 수 없는 것들을 이해하는지를 보여 준다. 따라서 그들이 부족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 소리가 아니라 다른 감각으로 세상을 감지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책에서 가장 감동적인 점은 이들이 가진 장애가 결코 장애라고만은 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가르침이다.
예를 들어, “아주 작은 소리까지 들어내는 사람은 나예요. 풀밭의 아주 작은 움직임까지 보아내는 사람은 내 동생이고요.”라든지, “폭풍이 불어올 때, 갑자기 우르릉 천둥 소리가 울려도, 바람에 덧문이 덜컹덜컹 흔들려도, 내 동생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아요. 그 애는 색색 잘도 잔답니다. 무서워하는 사람은 바로 나고요.”라는 부분은 장애인을 특별히 불편을 지닌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일반인들과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느끼는 사람이라는 시각을 갖게 한다. 장애라는 것이 모든 상황이 그렇듯 단점도 있지만, 또 장점도 있다는 것, 그래서 우리들과 다르기도 하지만, 조금도 다르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 책은 장애를 시혜나 보호의 차원이 아니라 삶의 다양성의 관점에서 다루고 있는 보기 드문 좋은 책이다.
이 책들 외에도 요즘 점점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이혼문제를 다루고 있는 네레 마어의 <아빠는 지금 하인리히 거리에 산다>, 죽음의 문제를 진지하게 사색할 기회를 제공하는 미스카 마일즈의 <애니의 노래>, 마녀에 대한 편견을 깨뜨려 주는 패트리샤 폴라코의 <바바야가 할머니>, 또 가난과 개발의 문제를 생각하게 하는 국내 저자로는 보기 드문 한성옥, 김서정의 <나의 사직동>도 감동적이다.
<왜곡된 가치관을 주입시키는 위험한 동화들>
“동물원은 얼마나 살기 좋은 곳인지 몰라”
독일의 동화작가 한스 아우구스토 레이의 <아프리카여 안녕!>이라는 동화를 살펴보자. 이 책은 동물원을 찬양하고 있다. 아프리카의 밀림에서 즐겁게 뛰어 놀고 있던 호기심 많은 꼬마 원숭이 ‘조지’가 동물원에 오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조지는 호기심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여러 해프닝을 벌인 끝에 동물원에 무사히(?) 가게 된다.
책은 “동물원은 얼마나 살기 좋은 곳인지 몰라!”라고 끝맺고 있다. 아무런 문제 의식 없이 이 책을 읽는 어린이들은 마치 동물원이 동물들을 잘 살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곳이라는 인상을 받을 것이 뻔하다. 오늘날 많은 이들에 의해 ‘동물원’ 의 존폐에 대해서 문제 제기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책은 구태의연하게 느껴진다.
이언 포크너의 <서커스 곡예사 올리비아>는 서커스를 그저 동물들에게 즐거운 곳으로 다루고 있어 안타깝다. 상상력 뛰어난 돼지 ‘올리비아’는 서커스단에서 여러 동물들과 함께 묘기를 보여 주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다. 서커스에서 묘기를 펼치고 있는 상상이 주요 내용인 이 책은 동물들이 즐겁게 서커스 쇼를 할 거라는 생각들을 심어준다. 오히려 오늘날에는 사람들의 볼거리들을 위해 혹사당하고 있는 서커스 동물들의 생존권에 대해 함께 생각할 수 있는 동화가 필요하지 않나 생각한다.
장애인 나름의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 무시
한편, <장님 꼬끼리 제드>라는 동화책은 ‘장애’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시각장애인 코끼리, ‘제드’와 흰쥐, ‘아나벨’의 우정을 보여주면서, 장애인은 놀림의 대상이 아니라 도움을 주면서 함께 살아야 한 존재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어 교육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각 장애인의 세계를 인정해 주기보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불편함만을 부각시키고 있다.
아나벨은 제드에게 색깔들에 대해 설명해 준다.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색들이 얼마나 곱고 아름다운지를 느낄 수 있게 도와준다. 그리고 제드를 괴롭히는 못된 흰쥐들에게 마치 볼 줄 아는 것처럼 속여 혼을 내준다.
이런 태도 속에 시각장애인에 대한 차별을 더욱 강고히 한다고 생각되는데, 그것은 시각장애인 나름의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전혀 인정해 주지 않으면서, 눈으로 인식할 수 있는 세상만을 이해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또한 제드가 시각장애인이 아니라야만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양, 못된 친구들을 속여서 골탕을 먹이는 부분은 장애인을 결핍된 존재로 바라보고 있는 고전적인 생각을 그대로 담고 있다.
아이를 유괴하는 지구, 맹목적인 모성 찬양
또한, <지구에서 사는 것이 즐거워요>라는 책은 환경오염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지구가, 지구의 미래가 위협에 처해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어른들을 깨우치게 하기 위해 그들의 아이들을 유괴해 간다. 자기의 사랑하는 아이들이 없어진 뒤에야 반성을 하고 잘못을 깨달은 어른들은 지구를 살리기 위해 애쓴 결과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와 행복하게 산다는 이야기다.
이 책은 생명체로서 지구를 인식하게 하면서 우리의 과도한 개발과 유해한 물질의 방출이 지구를 병들게 하고 있고, 우리가 살기 위해서조차 지구를 보호하고 잘 가꾸어야 한다는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이유괴’와 같은 끔찍스럽고 폭력적인 행동을 정당화하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아이들에게 중요한 일을 위해서 폭력적인 수단을 사용해도 된다고 하는 생각을 은연중에 심어줄 수 있다.
좀 다른 관점에서 <너를 사랑해, 우리 아기 꼬질이>는 ‘모성의 신화’를 참으로 소름 끼치게 표현하고 있어,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사랑한다, 나의 사랑스러운 아기야”라고 아기를 감싸 안으며 말하는 엄마에게 아이는 자기가 ‘무서운 원숭이’라도 좋아할 거냐고 묻는다. 이러한 물음에 엄마는 변함없이 아이를 사랑한다고 하자,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악어’, ‘외눈박이 거인’ 등등 그 강도를 높여가며 묻지만, 엄마는 한결같이 그런 아이를 사랑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 속에 등장하는 어머니는 합리적인 판단이 결여되어 있고, 아이를 객관적으로 바라보지도 못한다. 오직 맹목적인 사랑의 존재로서 어머니를 묘사하는 책들을 통해 어린이들은 이런 왜곡된 모습을 진정한 어머니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어린이문학] 죽음을 수용하는 어린이들의 모습 | 김윤은미 | 2005/08/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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