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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V보균자 연인과의 삶 그린 만화 <푸른 알약>

2001년 스위스의 독립만화 출판사 아트라빌에서 출간된 프레데릭 페테르스의 자전적 만화 <푸른 알약>은 HIV양성보균자 연인과의 사랑을 담담하게 풀어가면서 ‘에이즈’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고 삶과 사랑에 대해 성찰하게 하는 수작이다.
 
HIV/AIDS에 대한 공포심 속에서
 
프레드와 카티의 사랑은 세상 무수한 연인들이 그래왔듯 평범한 일상 속에서 시작된다. 프레드는 한 파티에서 만난 카티에게 반한다. 그러나 카티에게는 따로 연인이 있었고 둘의 인연은 끝난 듯 보였다. 그러나 몇 년 후 프레드는 이혼하고 혼자 아이를 키우며 살고 있는 카티와 재회하고 둘은 점점 가까워지게 된다. 그리고 고백의 순간이 이어지고, 카티는 자신이 HIV 양성보균자임을 밝힌다.
 
HIV(Human Immunodeficiency Virus)는 ‘인체면역결핍 바이러스’로, 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증상이 진행되면 후천성면역결핍증, 즉 에이즈(AIDS)에 걸린다. 그러나 둘은 구분되지 않고 보통 바이러스 감염과 에이즈를 동일한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세간에는 에이즈에 걸리면 내일이라도 당장 온몸에 붉은 반점이 퍼져 흉측한 모습으로 죽어갈 것이라는 공포감이 가득하다. 손만 스쳐도 감염될 것 같은 공포감이 지배하는 속에서 HIV보균자와의 섹스는 금기 중의 금기다.

 
이런 극단적 공포감 때문에 매체들은 종종 선정적이거나 특별한 어떤 것을 노리며 ‘에이즈’를 끌어온다. 영화 ‘너는 내 운명’에서도 수많은 ‘불치병 멜로물’들과 차별화 하기 위해 특별한 소재로 ‘에이즈’를 다루며 ‘죽음도 극복한 사랑’이라는 신파적 태도로 일관하며 에이즈를 둘러싼 사람들의 현실적인 고민을 짚어내지는 못했다. ‘에이즈’는 있었으되 ‘에이즈에 걸린 사람들의 삶’은 없었던 것이다.

 
솔직하고 섬세한 시선

 
<푸른 알약>은 이러한 점에서 남다른 완성도를 보여준다. 이 책에는 세상에 편견에 맞선 투사도, 고통 속에 몸부림치는 연인들의 눈물도, 죽음을 극복하는 격정적 사랑도 없다. 대신 삶의 면면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입체적인 시선이 있다.
 
자신이 HIV 양성보균자임을 밝힌 카티가 돌아가려고 하자, 프레드는 ‘자고 가라’며 붙잡는다. ‘대범한 사내인 척’ 했지만 프레드는 섹스를 하는 내내 ‘솔직히 성적으로 흥분되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카티를 사랑하지만 그가 느끼는 불안감 또한 실재한다. 프레드는 자신의 부모에게 카티가 HIV 양성보균자라는 사실을 밝히지 못한다.

 
일상은 평탄한 길이 아니라 구비구비 긴 언덕이 이어진다. 이들의 삶도 마찬가지다. ‘콘돔’을 사용하고 “늘 건강을 유지하고 몸을 자세히 관찰하는 습관”을 들이면서 프레드와 카티는 섹스와 동거를 일반적인 연인들의 그것처럼 만들어간다. 그러나 관계 중 콘돔이 찢어지면서 프레드는와 카티는 불안과 죄책감으로 괴로워하게 되는데, 감염여부를 진단하기 위해 찾아간 프레드에게 의사 R은 이렇게 말한다.

 
“보다시피 부인의 건강 상태도 좋고, 혈액 속에 바이러스 농도도 약하고 또 선생의 성기도 양호한 걸로 보아 두 분이 에이즈에 걸릴 가능성은, 이 방을 나갔을 때 흰 코뿔소와 마주칠 가능성쯤으로 보시면 되겠네요.”

 
‘에이즈’에 대한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면서 프레드는 감염에 불안감을 일상에서 지워나간다. R박사는 편견 없는 전문가의 적절한 의료적 도움이 HIV/AIDS 감염인에게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삶과 사랑에 대한 성찰


삶과 사랑에 여러 가지 면들이 있다면, 에이즈 환자의 삶과 사랑도 그렇다. 카티와 프레드의 사랑은 ‘에이즈’에 국한된 문제만 이야기되지 않는다. 이들이 ‘푸른 알약’과 함께 해야 하는 조금 특별한 상황에 놓여 있다고 해서 본질적으로 ‘연인’이라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역시 HIV양성보균자라인 카티의 아들과의 관계에서 그려지는 고민도 단지 ‘에이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프레드는 아이와 관계 맺기, 아빠가 된다는 것에 대해 배워간다.

‘환자’인 카티에 대한 묘사도 전형성에서 벗어난다. 카티는 자신뿐만 아니라 어린 아들까지 에이즈 치료를 받게 되는 상황 속에서도 굳은 의지를 버리지 않는다. 부모에게 자신이 감염자라는 사실을 말하도록 프레드를 설득하기도 한다. 프레드는 카티에게 “존경을 불러일으키는 감탄”을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니고 있던 동정심까지도 모두 버린다.
 
이런 삶의 면면을 겪으면서 끌어올려지는 성찰은 보는 이의 가슴을 깊이 울리는 파장을 일으킨다.

 
“이제 우리는 처음의 흥분과 의심의 고비들을 모두 넘겼다. 이 과정을 통해 난 행복을 끌어내는 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우리의 삶이 완전히 ‘정상적’이 된 건 아니다. 하지만 순조로운 리듬을 타기 시작한 건 분명하다.”

 
“난 지금 느긋하고 편안하다. 또한 내 이해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들에 관해서도 마음이 열려있다.”

 
고통의 과정을 부딪혀 얻어낸 성찰과 담담한 어조가 빛난다. <푸른 알약> 통해 그 과정을 차분히 따라가다 보면, HIV양성보균자/에이즈 환자의 삶을 이해하게 되고 자연스레 편견을 수정할 기회를 가질 뿐만 아니라, 인생과 사랑의 의미에 대한 성찰로도 이끌어지는 경험 또한 가지게 될 것이다.
 
ⓒwww.ildaro.com [여성주의 저널 일다] 박희정

[다른 기사 보기 ☞ 에이즈보다 심각한 차별의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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