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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살할거야, 엄마”
마샤 노만의 연극 <잘자요, 엄마>
 
▲ 연극 <잘자요, 엄마> 마샤 노먼 작, 문삼화 연출
1947년생인 미국 여성극작가 마샤 노먼(Marsha Norman)의 대표작 <잘자요, 엄마>는 1983년에 쓰여진 작품으로, 2008년 현재까지 전 세계적으로 공연될 만큼 꾸준히 사랑 받고 있다. 엄마와 딸이라는 모녀 관계에 대해 깊이 천작하고 있는 이 희곡은 여성주의 연극으로 분류되나, 정작 서구 페미니즘계에서는 비난을 받으며 거부됐던 연극이라는 점에서 흥미로운 작품이기도 하다.

 
어떤 지점에서 평가가 갈라지는 것일까. <잘자요, 엄마>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마샤 노먼의 처녀작인 <Getting Out>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두 작품은 모두 여성의 자의식과 실존적 고민, 모녀 관계의 애증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연장선에 놓을 수 있는 희곡들이다.

 
국내 공연 연보 상으로도 의의를 지니는데, <Getting Out>의 경우 2005년 유씨어터에서 문삼화 연출로 공연된 바 있다. 2008년 연극열전으로 올라가는 <잘자요, 엄마> 역시 문삼화씨가 연출을 맡는다. 여성연출가와 여성배우의 입지가 상대적으로 좁은 국내 연극계에서, 여성극작가의 작품을 여성연출, 여성배우가 중심이 되어 올리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Getting out>과 <잘자요, 엄마>는 독특한 계보를 형성하고 있는 연극이기도 하다.

 
상처 입은 과거를 부정하고 싶은 현재의 나 <Getting out>

 
▲ 2005년 국내에서 공연된 <Getting Out>
<Getting out>은 과거의 자신을 부정하고 싶어 하는 한 여인의 이야기이다. 알린은 살인죄로 8년간 교도소 생활을 마친 20대 후반의 여자이다. 그녀는 본래 자신의 이름인 ‘알리’를 부정하며, 현재의 자신을 ‘알린’이라고 부른다. 알리를 죽여 없애고 새로운 ‘알리’로 태어났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상처투성이이며 인생 전체가 망가졌다고 믿는 여자가 과거의 자아를 부정하면서 새로 태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왜 그녀가 그런 결심을 하게 되었을까. 이 연극은 불안하고 예민한 한 여인의 현재와 과거를 동시에 보여준다. ‘알리’와 ‘알린’이 서로 다른 인물이라고 믿고 있는 주인공의 내면심리를 따라가기 위해, 공연에서는 알리와 알린이 서로 다른 두 여배우로 등장한다. 그들의 시간과 감정은 변주되고 교차되면서 울림을 형성한다.

 
이 작품은 다양한 층위의 문제의식을 함의하고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어머니와 딸의 관계이다. 딸은 어머니의 육체를 통해 세상에 태어났고, 어머니처럼 여성으로서 삶을 살게 되지만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이다. 서로 다른 두 명의 타인인 것이다. <Getting out>에서 어머니는 알린이 출옥하자 아파트에 찾아와 청소를 하고, 음식을 만들어 주려고 하지만 알린에 대한 신뢰를 보이고 있지는 않다.

 
알린은 미혼모로 아들 조이를 출산했고, 살인으로 형무소에서 복역했다. 그런 딸이 ‘새 출발하겠다’라는 의지를 표명해도, 어머니의 입장에서는 쉬이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이다. 또한 이미 입양된 조이를 되찾아 키우고 싶어 하는 알린의 소망에 대해서도 묵살한다. 어머니의 입장과 시선에서는 가장 합리적인 판단이지만 딸의 욕망과는 상충하는 것이다.

 
▲  연극 <Getting Out>의 한 장면
알린은 끊임없이 엄마에게 자신을 납득시키려고 설득하지만 번번히 차단된다. 대화는 허공에서 떠돌고, 결국 서로에 대한 짜증으로 귀결된다. 알린의 특수한 상황을 배제해도 아래와 같은 식의 충돌은 여타의 모녀 관계에서 쉽게 나타나는 대화이다.

 
알린: 난 더 이상 그런 짓은 안해요.
어머니: 그래, 안 하겠지. 나는 네 엄마다. 네가 뭘 할지를 알아.
알린: 하지 않을 거라고 말하잖아요.
어머니: 알겠다. 또 형편없는 한 녀석을 만나 울면서 나한테 오는 일이 없도록 해라. 난 너한테 이미 말했다.
알린: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니: 네 남자친구가 돌아오기 전에 이곳에서 나가야겠구나.
알린: (화를 더 내며) 그는 내 남자친구가 아니예요.
어머니: 나는 많은 일을 겪었지만 멍청하지는 않다, 알린. (‘알린’이라는 말이 냉소적이다.)
알린: 엄마가 그렇다고 하지 않았어요. (이 대화가 어떻게 끝나게 될지 알기 시작한다.)

 
어머니와 말다툼을 하면서 알린은 마음속으로 외친다. ‘그러지마, 엄마야. 엄마에게 상처 입히지마.’

 
사실은 세상에서 가장 이해 받고 싶고 잘해주고 싶은 사람인데, 항상 의견이 충돌하고 대립하게 된다. 뻔히 상처받을 걸 알면서도 독설을 내뱉고, 상대방이 상처받는 걸 보면서 스스로 자책한다. 서로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있기에 전부 안다고 착각하고, 이해 받긴 어려워도 상처 입히는 건 쉬운 아이러니. 이것이 세상의 모든 엄마와 딸이 가진 오랜 딜레마이다.

 
자살 직전의 순간 솔직해지기 <잘자요, 엄마>

 
▲ 연극 <잘자요, 엄마> 포스터
무대의 시계는 8시 15분. 80분 뒤에 제시는 자살한다. 80분간 엄마인 델마와 제시의 대화가 연극의 내용이다. 막이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제시는 권총을 찾기 위해 다락을 뒤지고, 권총이 왜 필요하냐는 델마의 물음에 대답한다. ‘나 자살할거야, 엄마.’

 
자살 선언을 들은 델마는 제시의 죽음을 막기 위해 대화를 시도하고, 제시 역시 자신을 엄마에게 납득시키기 위해서 대화를 시도한다. 그러나 모녀간의 대화는 애초부터 서로 다른 곳을 지향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딸이 죽는 것을 방치하고 있을 수 없는 엄마와, 자살에 대해 이해시키고 싶어하는 딸. 이들의 팽팽한 긴장과 소통되지 못하는 감정이 연극의 핵심이다.

 
제시: 엄마, 푹푹 찌는 여름에 만원버스를 타 본 적이 있을 거야. 버스 안은 찜통 같은데다 콩나물 시루처럼 들어찬 사람들은 또 어찌나 시끄럽고 북적대는지 당장 내려버리고 싶은 마음뿐일 거야. 하지만 그대로 내려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엄마가 내려야 할 곳이 아직 50블럭이나 남았기 때문 아냐? 하지만 난 달라. 난 당장에 내려버릴 수 있어. 왜냐하면 그렇게 50블럭을 더 가서 내린대야 어차피 내려서는 곳은 마찬가질 테니까. 마음만 내키면 난 언제든 내릴 수 있어. 이만하면 충분하다 싶을 때가 바로 내 정류장이 되는 거야. 그리고 이제 모든 게 충분해.
 
제시의 삶에 대한 자포자기적 태도는 서구 페미니스트들에게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녀는 삶에 대해 저항하고 투쟁하기를 포기하고 수동적인 태도로 죽음을 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엄마’ 앞에서.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던 제시가 능동적으로 택하는 행위가 하필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서 찬반의 의견이 나뉠 법하다. 자살을 비겁한 자기합리화로 보는가, 아니면 인간이 자기 삶과 생명을 스스로 통제하는 적극적인 행위로 보는가는 가치관에 따라 갈릴 부분이다. 기독교 문화가 지배하기 이전의 서양의 로마 시대만 해도 자살은 죄악시되지 않았고, 누군가가 생명 행위를 중단하기로 결심했다면 그것은 존중 받을 만한 결정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동서양의 수많은 위인들이 비겁하고, 누추한 삶을 영위하는 것을 거부하고 죽음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것이 한결같이 ‘패배주의’로 해석되었던 것만도 아니다. 곡기를 끊고 열반에 들어서기로 결심한 수행자와, 안식을 위해 자살을 결심한 제시의 행위가 행위 자체로서의 차별성을 갖는 것일까. 그러므로 제시의 자살을 오롯이 한 방향에서만 단죄하는 것은 위험한 것이다.

 
▲ 대학로에서 공연 중인 연극 <잘자요, 엄마>
제시와 대립선상에 서 있는 델마는 죽음이 가져오는 관계의 단절과 유족들의 슬픔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녀는 제시가 삶에 대해 조금만 더 낙관적으로 생각하면 행복해질 수 있으리라 믿고 있고, 그렇게 노력하기를 충고한다. 딸의 죽음을 덤덤히 견딜 수 있는 어머니가 세상에 몇이나 될까. 델마는 제시가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는 것뿐만 아니라 델마가 사랑하고, 함께 했던 딸로서의 생명 역시 앗아버리는 것이라는 점을 제시에게 납득시키려고 한다.

 
엄마: 죽음이 어떤 건지는 아무도 몰라. 전혀 조용한 게 아닐 수도 있어. 만약 그게 끝없이 울려대는 자명종 같은 거라면 어쩔래? 넌 이미 죽은 몸이니 일어나 그 소릴 멈추게 할 수도 없을 테고. 그것도 아주 영원히 말이다.
 
모녀는 생사를 앞둔 대화를 하면서 코코아를 끓여 마시고, 식기를 정리하고, 소파를 덮는 천을 씌우는 소소한 일상 행위를 한다. 부엌과 거실이라는 일상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상적 행위, 모녀 관계라는 지극히 평범한 관계 속에서 던져지는 극적인 질문은 연극이 가진 담론의 층위를 두텁게 만들어 준다. 모녀관객들이 유난히 많은 연극이라는 점도 이 연극을 통해 모처럼 엄마와 딸이 속 깊은 대화를 나눌 기회가 된다는 반증일 것이다.

 
관객에 따라서는 이런 어두운 내용을 엄마 혹은 딸과 보고 싶지 않다는 경우도 제법 있다. 간만에 모녀끼리 대학로 외출을 했다면 조금 더 밝고, 잔잔한 이야기를 보고 싶어 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갈 만하다. 즉, 어머니 혹은 딸과 무엇을 소통하고 싶으냐에 따라서 관람의 여부도 갈리는 것이다.

 
그러나 엄마와 딸이 표피적인 일상 대화를 하는 것을 넘어서 인생, 삶, 죽음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갖고 있는가를 질문해 볼 수 있는 드문 기회이기도 하다. 우리는 모두 엄마 혹은 딸에게 “오늘 뭘 먹었어?”라고 묻기는 쉬워도 “어떨 때 가장 절망스러워?”라고 묻기는 어렵지 않은가. 가족이기에 오히려 쉽게 물을 수 없는 질문들. 그 질문의 실타래가 될 수 있는 연극이라는 점은 대다수가 동의하는 지점일 것이다.

※ 공연 팁!
공연 일시: 2008년 8월 29일~11월 2일
공연 장소: 대학로 원더스페이스 네모극장 (구 사다리 아트센터)
연출: 문삼화
출연: 나문희, 손숙, 서주희, 황정민
관람등급: 15세 이상
관람시간: 80분
티켓가격: S석 4만원/ A석 3만원

 
※ 캐스팅
델마 역에 나문희, 손숙씨가, 제시 역에는 서주희, 황정민씨가 더블 캐스팅되었다. 주로 나문희-서주희 vs 손숙-황정민의 라인업이 되어있는 편이다. 기량이 뛰어난 중장년의 여배우들이 참여하고 있으므로 캐스팅은 어느 쪽을 봐도 후회가 없을 듯하다. 나문희씨와 손숙씨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어머니의 일상적이면서도 다급한 모습을 연기한다. 서주희씨가 제시의 정서불안적인 면을 포착한다면, 황정민씨는 제시의 어둡고 절망적인 슬픔-이른바 웃고 있어도 울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전달해준다.

 
※ 할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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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22 [01:16] ⓒ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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