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일다> 레인보우 도, 국경을 넘다(4)
[구한말 멕시코로 이주한 한인 4세이자, 미국 이주자인 레인보우 도(Rainbow Doe)가 말하는 ‘이주와 여성 그리고 국경’에 관한 이야기가 일다(www.ildaro.com)에 연재 중입니다. 분단된 한국사회에서 ‘국경’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시야를 넓혀줄 계기가 될 것입니다.]
활기를 띠는 ‘한국-멕시코’ 상업과 문화 교류
조선인 1천33명이 멕시코 유카탄에 도착한 지 10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한국과 멕시코 양국의 문화 교류가 점차 활발해졌고, 이를 통제하는 정부 차원의 다양한 방식 또한 새롭게 생겨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민자 세대가 겪어야 했던 폭력적인 문화 쇼크로 인한 후폭풍이 한인 가족이라는 폐쇄적인 공간에서 대를 이어 전염병처럼 번져왔다. 우리 가족만 해도 아이들이 부모로부터 신체적, 심리적인 폭력을 당하는 게 드문 일이 아니었다. 내 증조할머니는 큰 딸을 체벌할 때 가마니에 넣고 발로 찼다고 한다.
과거에는 나의 증조할머니들이 멕시코 사회에 융화되어 살아가기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이제 멕시코를 찾는 새로운 한인 이민자들은 멕시코 국수주의자들의 선동에 저항하기 위해 노력한다. 1997년까지 2천명이었던 멕시코 한인 이민자 수가 2001년에는 9배나 급증해 1만9천500명에 이르렀다. 2001년 아르헨티나가 경제 위기를 겪자, 당시 아르헨티나에 살던 한인들이 그곳을 ‘탈출’해 멕시코로 재이주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멕시코시티에서 손꼽히는 명문 중 하나인 콜맥스(COLMEX) 대학에 한국학이 개설될 정도로, 양국 국민들의 상업적, 문화적 교류가 뚜렷해졌다. 양쪽 정부는 각자 다른 계산에서 양국 교류의 경제적 측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관심은 한국 외교통상부의 후원을 받는 한국재단의 기금으로, 2003년에 아르헨티나에서 진행된 한 회의에서 비롯되었다. ‘한인 교포’들을 주제로 한 교류가 그 후 중남미에서 점차 확대되고 있다.
‘남미 공동시장’(MERCOSUR. 남미 자유 무역과 경제 협력을 위해 1995년 결성된 경제공동체) 회원국들처럼 신자유주의적 무역을 육성하며, 무역과 무역에 개입된 당사자들을 통제하길 원하는 멕시코 같은 국가들이 한국을 성공적 사례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한국의 정치와 경제를 학습하고 있다.
아시아인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유포
멕시코시티는 스페인이 중남미를 점령하기 이전부터 미국과 캐나다 등 북미 지역뿐 아니라 남미 지역까지 뻗어있는 교역로로 인해 국제 무역의 핵심지였다. 도시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시장이라는 의미에서 멕시코시티(Ciudad de Mexico)는 ‘시장 도시’(Ciudad Mercado)라고 불린다. 멕시코의 수도인 이곳에서는 여전히 상인들의 힘이 막강하며, 거리 공간과 상품의 운송을 두고 시 정부와 끊임없이 협상을 벌인다.
멕시코 수도인 멕시코시티의 소노라 시장 © 레인보우 도
2005년부터 멕시코 정부는 멕시코시티 내 한국 상인들을 비난하는 내용을 담은 부정적인 언론 보도를 확산시키고 있다. 한국 상인들이 중국에서 들여온 저가 상품들로 인해, 멕시코의 상업이 타격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오랜 역사를 지닌 멕시코 토착 경제가 나이 어린 중국 여성노동자들을 착취해 만든 플라스틱 상품들로 대체되고 있다. 저가의 도매 상품을 중국에서 들여오는 한국 상인들은 멕시코시티 시내에서 창고의 규모를 점점 키워가고 있으며, 멕시코 기업들을 장악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 상인들의 발을 묶으려는 멕시코 정부의 목적은 자국 고유의 경제를 지켜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이러한 무역에서 자신들의 몫을 좀더 챙기려는 데 있다. 이는 또 멕시코 무역 당국이 어떻게 이민자들(이 경우에는 한인들)에게 자신의 책무를 전가하는지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언론에서는 한국 조직폭력배 때문에 저가 상품들이 불법으로 수입되고 있으며, 이로 인해 멕시코 상점들이 연이어 문을 닫고 있다고 주장한다.
일부 한인 이민자들이 규제를 피해 상품을 들여오는 것이 사실일 수는 있지만, 이런 식의 여론몰이는 외국인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멕시코 정부가 해결해야 할 무역 상의 결함을 덮어씌우려는 방편이기도 하다.
이민자들을 여론의 희생양으로 만든 또 다른 예는 1930년대에도 있었다. 멕시코 정부가 소노라 주(州) 카나네아 시(市)에서 중국인 이민자들이 일궈놓은 사업과 돈을 서서히 가로챈 뒤, 이 지역에 거주하는 모든 중국인들을 추방시켜 버렸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멕시코 사회에는 반(反)중국 정서가 전략적으로 유포되었다.
이는 멕시코인들로 하여금 멕시코-아시아 혼혈인을 포함하여 모든 아시아인에 대해 부정적인 고정관념을 갖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고정관념으로 인해 멕시코에 거주하는 아시아인들은 ‘자기 혐오’를 내면화하게 되고, 그로 인해 ‘가족 내 폭력’의 악순환이 강화되었다.
기업들의 이해에 편승하지 않는 ‘뿌리찾기’ 필요
한인 도매업자들이 멕시코에서 비약적으로 성장하며 엄청난 상업적, 경제적 이득을 챙기자 이는 양국 정부의 이목을 끌었다.
삼성이나 LG 같은 한국 대기업들의 공장과 한인 소유의 ‘마킬라도라’(외국에서 부품과 원자재를 수입한 뒤 멕시코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하여 조립, 제조한 후 재수출하는 외국계 공장)들이 멕시코 북부에 들어서면서, 멕시코에서 한국의 위상이 매우 높아졌다.
이런 공장들은 여성노동자들에게 값싼 임금을 주고 노동력을 착취해 생산비를 절감한다. 또한 미국 바로 옆이라는 지역적 이점 덕분에 운송비도 절감한다. 절감된 생산비에 힘입어 무역이 증가하는 가운데 한국과 멕시코 양국이 주고 받는 것들을 보면, 이들의 관계가 정부 차원에서도, 연구 차원에서도 점점 더 공고해져 가는 이유를 쉽게 알 수 있다.
2005년 멕시코 한인 이민 100주년 기념행사를 계기로, 한국과 멕시코 양국 간에는 프로젝트와 교류가 많이 생겨났다. 같은 해 한국 정부는 이민 1세대의 첫 정착지였던 유카탄 주 메리다 시에 한인 후손들을 위한 병원을 세웠다. 한국 무용과 멕시코 무용 공연이 같은 무대에서 연달아 펼쳐졌고, 미술관 전시도 열렸으며, 한인 후손들이 일했던 옛 대농장 터 방문도 이루어졌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교류는 젊은 한인 후손 30명이 한국산업인력공단 국제HRD센터(SIVAT)에서 ‘멕시코 한인 후손 직업훈련 초청 연수’를 받은 것이다. 이는 한국 정부와 멕시코 한인회의 노력으로 추진되었다.
▲ 루벤 리 전 한인회 부회장의 아들 결혼식에 참석한 가족들 모습. 좌측부터 루벤 리, 루벤 리 사우시(루벤의 아버지), 신랑 알버토 리(루벤의 아들)와 루벤 리 주니어.
그러나 한인회 전 회장인 루벤 리는 2005년 이민 100주년 기념행사 이후, 당시 기획된 대규모 프로젝트와 아이디어 거의 대부분이 중단된 상태라고 말한다. 윗세대가 겪었던 폭력적인 문화 충격의 잔재 때문에, 한인 후손들을 조직하는 일이 쉽지 않다고 한다. 기획에 참여한 멕시코 정부 측이 보여준 스페인 식민지 시대의 정치 관행도 프로젝트 실패 원인 중 하나로 지적된다.
루벤 리 전 회장이 생각하는 (한국과 멕시코 내 한인 사회 간의 교류의) 궁극적인 해결 방안은, 젊은 세대가 나서서 혁신적인 미래 프로젝트를 기획하는 것이다. 기성 세대는 윗세대에게서 물려받은 오래된 버릇을 버리지 못하는 경향이 있고, 고정된 사고방식에 너무 물들어 있다. 이러한 특성은 결국 진정한 교류를 방해한다.
젊은 세대는 자신들의 뿌리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할 몫이 있다. 하지만 이것이 신자유주의 상업의 이해 관계에 편승해서도 안되고 국수주의에 휘말려서도 안 된다. 인간 본성 그 자체를 살펴봐야 할 것이다. 멕시코 국기를 드느냐, 태극기를 드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지구, 자연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조화를 이루며 살던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가르침과 얼마나 교감하느냐의 문제다.
‘김치’를 통해 본 신자유주의 무역의 파괴력
‘다공메이’(打工妹, 도시에 취업한 농촌 출신의 나이 어린 중국인 여공)들이 착취 당하며 만든 저가의 중국 제품을 사와 멕시코에서 되파는 사업은 단기적으로는 매력적일지 모른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다음 세대뿐만 아니라, 상인들과 그들의 가족이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나도 크다. 미래 상인들과 공장 관리자들이 관행을 바꾸지 않는 한, 대규모 제조업으로 인한 ‘현지 시장의 파괴’는 돌이킬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파괴적인 현상은 한국에서 생산되는 현지 상품, 이를테면 ‘김치’의 예를 들면 더 잘 이해될 수 있다. 지금 전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김치의 사례에 비유하자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겠다. 한국 회사가 어느 때부터인가 중국 소녀들의 노동력을 착취하여 정말 값 싼 김치를 만들어 팔기 시작해서, 한국에서 만들어지는 김치의 반값에 한국 시장에 되파는 경우와 같다.
얼마 후면 전통적인 한국 방식으로 만든 진짜 김치는 찾아볼 수 없게 될 지 모른다. 중국산 김치가 더 저렴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전통의 가치는 급격히 떨어질 것이고 전통 김치는 질 낮은 김치로 대체될 것이다. 그 김치를 담그는 저임금 십대여성들의 정신과 육체 건강을 해치고, 이제 자신들의 음식과 문화의 뿌리에 대한 이해가 전무한 한국의 미래 세대의 정신과 육체 건강을 해치면서 말이다.
더 나아가 질 낮은 김치는 문화의 파괴로 이어진다. 그리고 내 생각에 문화란, 세상 그 어떤 금은보화와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글: 레인보우 도, 번역: 권이은정)
'국경을 넘는 사람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페요테 선인장’ 지키려는 윅사리카인들의 요청 (0) | 2011.12.10 |
---|---|
경쟁하는 대신 나누는 사회가 희망이다 (0) | 2011.10.29 |
토착민 땅을 황폐화하고 성지 파괴하는 다국적기업 (0) | 2011.10.24 |
멕시코 오아하카 시민들, 대중의회를 결성하다 (0) | 2011.10.14 |
티베트 난민촌의 ‘여성작업장’ 이야기 (1) | 2011.10.12 |
‘여성들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드러내다 (0) | 2011.10.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