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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록빠(Rogpa) 대표 빼마(33, 남현주)에게 듣다 
 
인도 북부 다람살라에 있는 티베트 난민촌에는, 티베트 사람들의 자립을 지원하는 시민단체 ‘록빠’(rogpa.com)를 찾는 여행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돕는 이’, ‘친구’라는 뜻을 가진 ‘록빠’는 한국인 여성 빼마(남현주)와 티베트인 남편 텐진 잠양이 2005년 티베트 난민을 위한 탁아소를 설립한 뒤, 여성들의 경제적 자립을 돕는 여성작업장과 어린이도서관 활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작년 5월에는 록빠에서 자원활동을 했던 한국여행자들이 국내에 돌아와서도 티베트 난민들과 인연을 이어갈 수 있도록, 록빠와 다리를 잇는 공간 <사직동, 그 가게>가 열렸다. 

티베트 여성들의 자립을 돕기 위해 2008년부터 활동을 시작한 록빠 여성작업장  

국경을 넘어 티베트 난민들의 나라를 잃은 아픔을 공유하며 그 삶을 지원하는 록빠. 특히 티베트 여성들의 자립을 돕기 위해 2008년부터 활동을 시작한 록빠 여성작업장(Rogpa Woman Craft Centre)의 실험은 주목할만하다.
 
여성작업장의 어제와 오늘을 ‘록빠’ 대표인 빼마(33)씨의 인터뷰를 통해 상세히 들어보았다. 인터뷰를 작성한 오은영씨는 오랜 기간 ‘록빠’ 자원활동가로 일해왔으며, 현재 인도에 체류 중이다. 이 인터뷰는 2011년 9월 17일 인도 다람살라의 한 카페에서 진행되었고, 독자의 이해를 위해 문답 형식으로 재구성한 것임을 밝혀둔다. 

-록빠 여성작업장을 처음 시작하게 된 배경을 말해주세요.
 
“우선 여성작업장의 아이디어가 나오게 된 과정을 이야기해야겠네요. ‘록빠’는 티베트 난민들의 경제적, 문화적 자립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에요. 그래서 처음 탁아소의 문을 열면서, 부모님들이 일을 하는 동안 안심하고 아이들을 맡길 수 있도록 했던 것이고요. 그 때문에 탁아소에 아이를 맡기기 위한 조건 중 하나가, 반드시 부모님들이 일을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부모 모두가 있을 경우는 양쪽 다, 혹은 엄마가 혼자 아이를 키우는 경우는 엄마가 직업을 갖고 있어야 하는 거죠.
 
그런데 그 원칙을 지키려다 보니 어려운 문제가 생기더군요. 분명히 사정이 어렵고 탁아소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가정인데도, 부모님들이 일하려는 의지도 강했지만 정작 직업을 구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어요. 이곳 다람살라 라는 지역 사회의 문제인 거죠. 그렇다 보니 어떻게 하면 이 부모님들이 일을 할 수 있게 할지 자연스레 고민할 수밖에 없었죠.”
 
-직업이 필요한 부모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주자는 생각을 한 거군요. 그게 ‘여성작업장’이라는 형태로 만들어진 이유는 뭔가요?
 
“여성작업장에 대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한국에서도 후원을 위한 홍보를 시작한 지 1년쯤 지났을 때 2008년 티베트 봉기(티베트 독립운동 49주년을 기념하여, 중국과 인도 등에 있는 많은 티베트인들이 독립 시위를 벌였다)가 있었어요. 그때 다람살라에서도 연일 시위가 있었고, 또 고향의 가족들을 잃은 사람들을 위한 기도가 계속되고 있었죠. 그러다 보니 다람살라의 가게들이 한 달 이상 문을 닫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때 일자리를 갑자기 잃은 엄마들이 생겨났어요.
 
그 전에도 록빠에서는 싱글맘을 돕기 위해 평화의 팔찌를 만들거나 모자를 짜는 작은 일감을 만들어 나누곤 했는데, 이때 도움을 받았던 엄마들이 저를 찾아오기 시작했어요. 록빠에서 일거리를 줄 수 있는지를 문의하는 거였는데, 그때 아무래도 이 엄마들을 돕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게 여성작업장이었죠. 이때는 그냥 아무 구체적인 계획이 없이 이 엄마들과 일단 시작해 보자는 생각뿐이었어요. 그래서 뭘 만들지, 어디에 팔지, 이런 생각도 없이 재봉일을 할 줄 아는 탁아소 아빠에게 부탁을 해서 교육을 시작했죠.”
 
-여성작업장이 만들어 진 게 2008년의 일인가요?
 
“네. 정확히는 4월이었고, 탁아소가 세 들어 있는 건물의 방 하나를 빼서 시작했어요. 제가 원래 패브릭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재봉틀 두 대를 들여서 기본 형태의 가방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사실 많이 어려웠어요.”
 
-어떤 점이 어려웠나요?
 
“한국 사람들은 아마 상상하기 힘들 텐데, 그때 작업장 엄마들에게 재봉틀로 반듯한 선을 하나 만들게 하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 왜 모든 선들이 가지런하고 길이가 같아야 하는지 이런 것조차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거든요. 그러다 보니 한국에서라면 절대 팔릴 수 없는 물건들을 5개월 동안 만들고 있었죠. 물론 인도에서도 팔 수는 없었고요. 그 동안은 교육기간이랄까, 시범기간이랄까, 계속 돈이 들어가기만 하고 수입이 전혀 없는 상태여서 좀 불안하기도 했죠.”
 
-경제적인 어려움은 짐작이 가네요. 지금도 후원으로 운영되는 록빠 탁아소나, 또 한국의 ‘사직동 그 가게’를 생각해 봐도 그런 것 같아요. 그밖에 다른 어려움은 없었나요?
 
“음… 뭐랄까, 탁아소를 운영하면서는 아이들을 잘 돌보기만 하면 되잖아요. 물론 아이들이 다 만족스러워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렇다고 직접 불만을 호소하는 것도 아니니까. (웃음) 어쨌든 우리가 생각하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하려고 하면 되죠. 그런데 여성작업장은 그게 다가 아니었어요. 엄마들이 갖고 있는 각자의 어려움, 집안 문제, 그리고 또 여성작업장 내에서의 갈등까지 모든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다 보니 일에만 신경 써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나름대로 이 곳도 사람들의 관계가 만들어지는 ‘공동체’더라고요. 또 당시엔 록빠 탁아소와 가까이 붙어있었고, 탁아소에 아이를 맡긴 엄마들도 있었기 때문에, 록빠에 대한 관심이나 이해도 높았던 것 같고요. 서로 배워가는 과정이기도 했던 것 같아요.” 
 

록빠 작업장은 탁아소가 세 들어 있는 건물 방 하나를 빼 재봉틀 두 대를 들여 시작했다.       
 
-그러다 록빠 샵(shop)을 열게 된 거네요?
 
“네. 사실 처음에는 한국에 조금씩 보내서 판매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었는데, 작업장 엄마들에게 자기 물건이 어떻게 팔리고, 어떤 반응을 받고 있는지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말하자면 정말 내 물건을 사서 쓰는 사람이 있다는 걸 실감하지 못하니까, 물건을 만들면서도 신이 나지도 않고, 또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고민도 안 되는 것 같았거든요.
 
그때 록빠의 장기 자원봉사자인 영국인 리치가 마침 다람살라에 왔죠. 록빠를 위해 영국에서 후원 파티를 해서 마련한 600유로를 갖고 왔는데, 그걸 계기로 해서 몇몇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으로 가게를 열게 되었어요.”
 
-어려움도 많고, 보람 있는 일도 많았을 것 같아요.
 
“우선은 가게 공사부터도 쉽지 않았어요. 한국처럼 기성 가구나 물품이 넉넉하게 있는 곳이 아니어서, 모든 걸 다 목수를 불러서 일일이 짜야 했어요. 심지어는 거기 들어가는 나무 원목까지 사러 다녀야 했으니까요. 하지만 그 과정을 모두 함께 겪으면서 록빠 탁아소의 식구들이나 여성작업장의 엄마들이 좀더 깊게 록빠를 이해하고 공감하게 되었다는 점이 가장 인상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죠.”
 
-가게를 열고 나서,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었나요?
 
“사실 처음에는 별로 그렇지 않았어요. 가게 월세도 매달 내야 하는 상황이었고, 가게 운영을 위한 인력이 따로 또 필요했거든요. 그러다가 2009년에 까르마파 존자님의 사원에서, 대만에서 열리는 법회에 기념품으로 나누어줄 가방 1천 개를 주문했어요. 이때는 정말 분위기가 고무되었죠.
 
일단 까르마파 존자님이 우리의 존재를 알고 도와주려고 하신다는 것도 엄마들에게는 큰 의미가 있고 자랑스러워할 만한 일이었고요. 같은 상품 1천 개를 한 번에 제작하는 것 자체도 좋은 경험이었어요. 심지어는 납품 전에 가방 1천 개를 세는 데도, 세는 사람마다 숫자가 달라서 한참 걸릴 정도였거든요. (웃음) 어쨌든 이 일로 처음으로 록빠 여성작업장에 목돈이 생기게 되었고, 이후 운영을 해나갈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죠.”
 
-현재 여성작업장의 운영 방식과 인원 구성은 어떻게 되나요?
 
“일단 여성작업장에 들어오면 2년 동안의 교육 기간을 거치게 돼요. 이때는 월급과 성과급을 받게 되는데, 2년이 지나서 과정을 마치면 계속 록빠 여성작업장의 멤버로 일하거나 혹은 독립해서 나가거나 자신의 선택에 맡기죠. 현재는 교육 과정을 마치고 재택으로 근무하는 1그룹 엄마들과, 과정 중에 있는 2그룹 엄마들이 있어요. 2그룹 엄마들도 거의 과정이 끝나가고 있어서 다음 그룹을 언제 어떻게 받아서 운영할 지 고민 중이에요. 그리고 초기 멤버인 델렉이 매니저로 일하고 있고, 남성 재단사가 한 명 있고요.”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려움을 많이 겪었겠다 싶으면서도, 또 이 정도면 잘 되가는 것 같은데 싶은 생각이 드는데요?
 
“물론 그렇긴 하죠. 하지만 어떻게 보면 지금 더 큰 어려움이 다가오고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처음부터 여성작업장을 생각했을 때는, 거대한 자본주의 시스템의 일부로 운영되는 공장 같은 곳은 아니었어요. 그런 시스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생산 방식과 관계를 고민했죠. 하지만 잘 아시는 것처럼 결국 여성작업장의 물품들은 이곳 인도에서나 한국에서나 또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자본주의의 체계 안에서 판매되고 있어요. 그러니까 가격 경쟁력이라든가, 품질 관리라던가 하는, 저 자신도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던 문제들이 중요하게 되는 거예요.”
 
-결국 우리가 자본주의 체계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생겨나는 문제군요?
 
“그렇죠. 그 때문에 소비자들의 요구에 맞춰서 좀 더 빨리, 좀 더 정확하게 물건을 만들도록 독려해야 하는 제 입장이 스스로도 낯설 때가 많아요. 상품들을 일정한 규격에 맞춰 만들어야 하고, 각자의 속도의 차이를 인정하기보다는 동일한 시간 안에 동일한 제품을 만들도록 자극을 줘야 하니까요.
 
예를 들어 지금 2그룹에서 교육을 받고 있는 체바라는 엄마는 일을 배우는 속도도, 하는 속도도 무척 느리더라고요. 지금이야 교육 기간이니까 일정한 월급이 지급되지만 과정을 마치고 1그룹 엄마들처럼 각자 만든 만큼 월급을 받게 되면 아마 힘들어질 거예요. 그런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체바를 어떻게 우리 여성작업장 안에서 받아들이고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지도 저에게는 큰 숙제에요. 여성작업장이 지향하는 관계에 대한 고민이 담겨있는 부분이기도 하구요.”
 
-네팔의 공정무역 생산자들도 더 이상 전통방식으로 염색을 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서구의 소비자들이 물이 빠지는 천연염색보다는 화학염색을 선호하기 때문에요. 또 거기서 일하는 생산자들 역시 좀더 나은 보상을 받는다는 것 말고는 관계나 가치에 있어서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도 하구요. 그런 것들도 원래의 공정무역 취지와 달리 자본주의 체계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변질되고 있기 때문이겠죠.
 
“그래서 저는 공정무역보다는 연대무역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처음 우리가 ‘사직동 그 가게’를 준비하면서 우리와 비슷한 고민과 지향을 갖고 있는 곳들과도 연계를 해보자는 얘길 했었잖아요? 그게 아직은 우리의 역량이 부족해서 실현되고 있지는 않지만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우리의 가치를 지키기 위한 다양한 노력이 필요한 것 같아요.” 
 
록빠 작업장의 유일한 남성 재단사. 
     

 
-결국은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는 자본주의가 아닌 관계, 혹은 대안적인 사회나 공동체 이런 것들이 아닐까요?
 
“그렇죠. 체바 아줌마가 경쟁에서 밀려나지 않고 살 수 있도록 배려할 수 있는 사회, 그런 관계를 만들 수 있다면 그게 바로 다른 의미의 공동체일 거라고 생각해요. 여성작업장을 처음 고민하면서 가졌던 생각도 그런 것 이었고요.”
 
-작은 록빠 여성작업장에서 대안공동체까지 꿈꾸고 있군요.
 
“여성작업장의 미래는 어떻게 될지, 저도 고민이 되고 궁금하기도 한 부분이에요. 어쩌면 록빠가 처음 탁아소를 열면서 지향했던 티베트 난민들의 경제적, 문화적 자립을 실현시켜줄 가장 핵심적인 곳이 될지도 몰라요. 물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에 편입되는 방식이 아니라 다른 관계와 방식이 필요하지요. 그러면서도 독립적일 수 있어야 하구요.
 
그래서 일종의 생산자 조합의 형태도 고민하고 있고, 공동체 방식의 생산지를 마련하고 2년의 교육 기간만이라도 엄마들이 함께 생활하면서 일을 배울 수 있도록 하는 방식도 생각 중이에요. 물론 아직은 시간이 좀 더 필요하겠지만요.”
 
-여성작업장의 미래가 기대돼요. 아마도 록빠의 미래도 거기에 함께 하겠죠? 혹시 왜 여성작업장만 있느냐, 남성보다 여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가 뭐냐 라는 질문이 있다면 어떻게 답하시겠어요?
 
“제가 탁아소를 열면서 록빠를 시작하고 나서 그 동안 몰랐던 많은 문제들이 보였어요. 물론 탁아소에 아이를 맡기러 오는 부모님들이 당연히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약자일 수밖에 없어서 더욱 그렇겠지만, 아이를 키우는 문제가 결코 쉽지 않더라고요. 한 아이를 몸과 마음이 모두 건강한 아이로 키우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까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엄마들이 우선 건강하고 편안해야겠더군요. 가장 아이와 밀접한 영향을 주고 받는 사람이고, 또 싱글맘의 경우 아이의 유일한 보호자이기도 하거든요. 그 때문에 우선 여성들에 대한 관심이 생겨났어요.
 
한국의 미혼모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이곳에서도 결혼이나 동거를 하다가 헤어지는 경우 아이를 양육하는 책임은 전적으로 여성이 지게 되죠. 그 경우 기존의 가족이나 친지 같은 사회적 관계에서 떨어져 나오게 되거나, 혹은 이미 티베트에서 넘어오면서부터 사회적 관계망에서 이탈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 여성들이 기대고 소통할 곳이 하나도 없는 거죠. 사회 안전망이랄까, 이런 것이 전무한 사회이기 때문에 더더욱 어려운 상황에 내몰리게 되고요. 이런 여성들이 건강한 엄마가 되어서 건강한 아이들을 키울 수 있도록 돕고 싶어요.”
 
-같은 여성으로서 참 중요한 일들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여성작업장을 통해 한걸음 성장하게 될 록빠의 다음 모습을 기대해 볼게요. 또 여성작업장을 기반으로 만들어질 공동체에도 관심이 많이 갑니다. 록빠 공동체라고 불러야 될까요?
 
“저는 이미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록빠는 공동체라고 생각해요. 정해진 공간에 모여 살지 않는다 뿐이죠. 그래도 언젠가는 좀 더 많은 생활을 공유할 수 있는 그런 공간이 있다면 좋겠죠. 어쨌든 그런 공동체로서의 록빠의 미래를 그리고 있고, 거기 함께 할 모든 친구들을 기다리고 있을게요.”
 
-생각만 해도 기대가 되네요. 나중에 제 자리도 꼭 마련해 주세요. 아 참, 스스로 만들어야 되는 거였죠? 저도 그럼 잘 만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웃음)  _작성: 오은영 (현지 활동가)
 
* 이 기사는 웹진 <따시델렉, 록빠!> vol. 10호에도 실렸습니다.
http://blog.naver.com/rogpa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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