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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박적인 삶’ 조장하는 무한경쟁체계
성공신화에 억눌려온 사람들의 분노와 불안감 커

이십 대 초반부터 놀 생각 하지 않고 일만 열심히 해왔던, 이제는 중년이 된 분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일만하다 보니 살림은 제법 꾸려나가게 되고, 주위에서 일 잘한다는 소리도 꽤 듣는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미칠듯한 불안과 가슴통증이 시작되었습니다. 인사 조정이 있은 뒤에 인력이 턱없이 부족해진 직장에서 전전긍긍하며 과중한 업무를 떠맡고부터였습니다.

 
애초에 혼자서 버틸 수 없는 상황이었건만 그는 그걸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일이 완벽하게 처리되어야 직성이 풀리는데, 예전만큼 성과를 낼 수 없게 된 현실 속에서 그에게 견딜 수 없는 불안이 들이닥쳤습니다. 결국 잠도 못 자고 밥숟가락도 제대로 뜨지 못할 정도로 불안해하다가, 얼마 안 있어 자기 업무에 결국 책임을 지지 못했다는 우울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인력이 턱없이 부족한데도 사람을 몰아가는 직장환경이 물론 문제였습니다. 아마도 자신을 채찍질하지 않으면 직장을 잃을 염려가 크니, 스스로를 몰아가지 않을 수 없었을 터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모든 일을 완벽하게 처리하고자 하는 그분의 과한 추진력이 조금만 덜 했어도… 싶은 마음도 들었습니다.
 
허나 미칠듯한 불안감에 쓰러질 정도로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그 분의 성격은, 무언가가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을 암시합니다.
 
개인의 강박을 추진력 삼아 작동되는 신자유주의
 
이렇듯 즐거움과 괴로움을 포함하여 인생의 다양한 감정경험을 외면한 채, 일과 책임감에 완벽주의적으로 집착하여 도리어 마음의 건강을 해칠 정도가 될 때, 그 성격이 ‘강박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강박 성격이란 개인의 심리를 지칭하는 말로서, 심리학에서는 주로 양육환경에 의해서 형성된다고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개인적인 환경이 강박 성격을 탄생시키는 작동원리를 살펴보면, 그 위로 우리 사회의 체계가 겹쳐져 보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심리학의 일부 학파에서는 지나치게 사람을 ‘통제하려는’ 양육 환경이 그러한 성격을 만들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프로이트라는 학자는 배변훈련이라는 과제를 떠안은 아이를 통해서 설명합니다. 배변훈련은 아이로서 처음으로 사회적 규범을 습득하는 과정으로, 이 때 아이는 때맞춰 변을 깨끗하게 처리하지 못하면 양육자에게 몹시 혼나게 되는 지배와 복종의 관계를 경험하게 된다고 합니다.
 
사람의 성격이 강박적인 기원에는 너무나 호되었던 배변훈련 경험이 있다고 프로이트는 말합니다. 가혹한 배변훈련에 지배되었던 사람 마음에는 항상 정확하고, 깨끗하고, 스스로를 이성적으로 통제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자리잡게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무지하게 혼나고 비난 받았기 때문에,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나 죄책감으로 스스로를 규제할 수 밖에 없습니다.
 
또 다른 학자들은 성장하면서 꽉 짜인 규율과 시간표에 지나치게 얽매였던 경험, 자연스러운 감정이나 욕구가 억압되는 경험, 압제적이고 권위주의적인 환경에서 자란 경험이 강박성의 기원에 있다고 보기도 합니다.
 
한편, 맥윌리엄스라는 심리학자는 현대 사회에서는 수치심을 주는 방식으로 “반드시 무엇을 해야 한다”는 내면의 압력을 주입한다고 봅니다. “뚱뚱하면 따돌림 당한다”, “그런 식으로 하면 좋은 대학에 가지 못해”하는 식으로 말이지요. 스스로를 규제하지 않으면 수치심을 느끼게 되므로 사람은 자동적으로 그 규제에 복종하게 된다고 하는데, 맥윌리엄스는 이것이 새로운 유형의 강박을 낳는다고 말했습니다.
 
일차적인 양육 환경과 문화적 환경이 강박 성격을 만드는데 어떻게 기여하는지는 제법 명쾌해 보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신자유주의도 새로운 유형의 강박을 초래하는 듯 보입니다. 신자유주의는 이 강박을 추진력 삼아 작동된다는 점에서 더욱 허탈합니다. 모두의 평안한 삶을 약속해주지 않는다는 체계 자체의 허술함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불안감이나 두려움을 어떻게 처리하는가에 관한 심리적인 작동법에 편승함으로써 무한경쟁 체계는 유지되고 있습니다.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밖에 전할 것이 없는 사회
 
한국 사회의 신자유주의 교육 환경은 대단히 권위주의적이고 성취지향적이라, 그 속에서 개개인의 창의성이나 희망은 억눌리기 쉽습니다. 우리는 근면 성실한 시민을 표상하고, 스스로 부단히 노력한 자에게 자본주의적 의미의 성공이 보장된다는 공익광고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성공 신화가 누군가에게 짐이었다면, 그것은 피눈물 나게 노력하면 성공이 보장된다는 메시지를 부각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지 못했을 때, 그 이유는 개인의 노력이 부진했기 때문이라는 논리가 자연스러운 사회입니다. 어느 유명한 정치가가 삶의 터전을 지켜달라는 학생에게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말 외에 달리 전할 수 있는 바가 없는 사회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암묵적인 규제는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지 못하거나 낙오자로 낙인 찍히는데 대한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시키면서, 사람으로 하여금 신자유주의의 원칙을 스스로 수행케 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 안에 우리는 마치 혹독한 배변훈련이라는 지배-복종 관계에 놓인 프로이트의 아이처럼, 더더욱 노력하지 않으면 내 삶을 지키지 못한다는 두려움과 실패자라는 수치심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를 채찍질해야 합니다. 체계의 허점이 마치 자신의 과오인 양, 체계의 짐을 짊어진 채 개인은 체계가 보장해주지 않는 인간다운 삶을 스스로 보장해야 합니다.
 
개인의 의지에 따라 자기 발전을 도모하는 것처럼 보이므로, 겉으로 보기에 이 체계는 상당히 합리적이고 안정적입니다. 그만큼 많은 분들이 삶을 억누르면서 묵묵히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빈곤을 겪으며 사람으로서 마땅한 삶을 살기 어렵게 되었고, 누군가는 무의미한 듯 느껴지는 노력 앞에서 허무함을 느끼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이를 자연스레 여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자기 삶을 지킬 수 없었던 사람들을 의문시한 채 말입니다. 개개인은 체계의 수행자로서 스스로를 몰아 부치고, 인생 구석구석에서 맞이할 수 있는 풍요로움을 모두 차단해버린 채, 있는 그대로의 자신보다는 성공하는 자신을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하며, 당연히 보장받아야 할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애쓰지 않으면 안됩니다.
 
프로이트는 강박 성격을 가진 사람의 내면에는 통제 당했던 것에 대한 강한 분노와 처벌받는데 대한 두려움이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때문에 강한 분노와 불안이라는 감정의 소용돌이로부터 벗어나고자 술에 의존하거나 반복적으로 폭식하고 구토하는 고통스러운 행동을 반복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들의 두려움을 안아주고 분노를 건강하게 해결하는 일이 몹시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강박적인 사회를 조장하는 오늘날의 체계 안에서 우리의 분노와 두려움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살펴야 하며, 빈곤과 양극화의 문제에 관해서는 어디에 대고 반문을 해야 하는지요. 서로의 분노와 두려움이 서로를 해치지 못하도록, 서로의 두려움은 기꺼이 안아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정당하게 분노하는 힘도 잃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일다] 최현정의 마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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