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에 살고 있는 이숙희(가명, 32)씨는 1달 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대신 근처에 있는 병원으로 출퇴근을 하고 있다. 이직을 한 것이 아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교통사고를 당해 입원을 하게 되었는데, 주위에 간호해줄 사람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숙희씨는 어쩔 수 없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어야 했다.
홍미현(가명, 42)씨는 2년째 치매에 걸린 친정어머니를 간호하고 있다. 그 전에는 중풍에 걸린 시어머니를 3년 동안 간호했으니, 무려 5년째 간병생활을 해오고 있는 것이다. 홍미현씨는 “식사나 대소변, 목욕 수발은 말할 것도 없고, 마음 놓고 외출을 못해서 무척 괴롭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생판 남에게 아픈 혈육을 맡길 수 없다”
보통 출산, 육아, 간병은 개별 여성들이 마땅히 담당해야 할 ‘가사’로 분류되어 왔다. 하지만 ‘가사노동을 사회화해야 한다’는 이슈가 제기되면서, 출산과 육아를 정책적인 차원에서 지원하려는 움직임이 계속되고 있다. 아직은 미비하지만 출산휴가나 육아휴직은 이 같은 노력의 결실이다. 하지만 여전히 ‘간병노동의 사회화’에 대한 논의는 아동양육에 대한 사회적 관심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생판 남에게 아픈 혈육을 맡길 수 없다”는 정서는 여성들을 은근히 억압하기도 한다. 이때 아픈 가족을 돌보는 역할을 떠맡는 가족구성원은 대개가 여성들이기 때문이다. 가사노동을 하고 있는 여성들은 물론이거니와, 직장을 가지고 있는 여성들도 사표를 내고 혈육을 돌보는 일을 투신하는 것이 가족애를 지키는 순리다. 이 같은 정서에서 벗어난 경우라도 상황은 그리 나아지지 않는다. 간병료가 의료보험 적용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유료 간병인을 쓰게 되면 엄청난 의료비를 고스란히 감수해야 한다.
“어떨 때는 남편이 빨리 저 세상으로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런 말을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서글프죠. 처음에는 남편이 아프다는 사실 자체가 견디기 힘들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혼자 환자를 뒷바라지 하는 데에 힘이 다 빠져버렸어요.” 1년 동안 위암에 걸린 남편을 간호해온 서지혜(가명, 38)씨의 말이다.
어머니, 딸, 며느리, 아내의 역할
핵가족 제도가 전형인 현대사회에서 주위의 친지나 이웃의 도움 없이 환자를 간병하는 일은 거의 ‘도를 닦는 수행과정’과 다를 바가 없다. 간병노동으로 ‘득도’한 여성들을 심정적으로 보상하는 ‘효행상’이나 ‘장한 어머니상’와 같은 제도는 이미 약발이 떨어진 지 오래다. ‘착한 어머니’, ‘착한 며느리’의 판타지로 현실과 이상의 간극을 메우기에는 간병으로 여성이 짊어져야 할 고행의 짐이 너무도 무겁다.
‘착함’에 대한 강조가 ‘먹히지’ 않을 때에 등장하는 또 다른 전략은 여성을 ‘매정한 어머니, 딸, 며느리, 아내’라고 ‘사회적으로 비난’하는 것이다. 간병노동을 ‘게을리’하거나 ‘거부’하는 여성들은 인간미가 없는 성격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다고 눈총을 받는다. 여성들은 자기 자신의 욕구를 표출하는 이름보다 매정한 ‘어머니, 딸, 며느리, 아내’라는 타인의 욕구를 반영하는 이름에 반응하도록 강요 당할 때가 많다. 따라서 대부분의 여성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가족간병’이라는 표상에 어설프고 힘겹게 부응하고 있는 게 현 실태다.
물론 현재 사회정책의 체계 안에 간병을 지원하거나 보조하는 제도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원요건이 지극히 까다롭고 선별적이다. 예를 들어, 산재보험에는 입원 중에 소요된 간병료를 지원하는 ‘요양급여’와 퇴원 후의 간병비를 지급하는 ‘간병급여’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는 산업재해를 당한 노동자에게만 해당되는 지원일 뿐, 산재보험을 적용 받지 못하는 대부분의 환자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또한 ‘하반신마비’, ‘손가락을 모두 잃은 경우’ 등 타인의 조력이 없이는 거동이 ‘전혀’ 불가능할 때에만 이러한 혜택을 받을 수 있다. 고용보험에서도 “30일 이상 가족을 간병하기 위해서 사직을 할 경우”에 실업급여를 제공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 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일을 그만 두어야 하고’, ‘주위에 간병을 할 사람이 아무도 없어야 한다’는 항목을 충족시켜야 한다.
간병비 의료보험 추가 등 제도 마련돼야
이처럼 구멍이 숭숭 뚫리고 극단적인 간병지원제도를 보완하는 대안으로는 다음 세 가지 정책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간병휴직제도’를 시행하는 방안이다. 현재 여성이 가족을 간호하기 위해서는 ‘사직’ 외에 택할 수 있는 대안이 별로 없다. 그러나 사실 서구 복지국가에서 시행되고 있는 간병휴직은 아주 생경한 제도만은 아니다. 한국에서도 공무원들은 “부모, 배우자, 자녀 및 배우자 부모를 간병하는 목적으로 1회에 1년(재직기간 총 3년)까지 휴직하는 것”을 보장 받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반 남성과 여성 노동자에게도 간병휴직제도를 확대 적용하여 가족간병으로 인한 극단적인 희생을 줄일 필요가 있다.
둘째, 특정계층에게 제공되고 있는 무료 ‘간병인 서비스’를 확대하는 방안이다. 현재 자활후견기관에서는 ‘사회적 일자리’를 제공한다는 목표 하에 저소득층 여성을 대상으로 ‘간병인 교육’을 실시하고, 이들로 간병인 사업단을 구성하여 운영하고 있다. 이 같은 간병인 서비스는 독거노인, 장애인, 소년소녀가장에 한해서만 무료로 제공된다.
그러나 국가보조금 외에도 이용자가 일부 비용을 부담하도록 변환시키고, 대신 간병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대상자를 넓히는 방식을 고려해볼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간병 도우미 사업이 가지고 있는 한계가 꾸준히 제기되고 있지만, 이는 ‘여성고용창출’과 ‘가사노동의 사회화’라는 양 측면에서 눈여겨볼만한 대안이다.
마지막으로 ‘간병비를 의료보험 급여항목에 추가’하는 방안이다. 이는 간병인 서비스를 국가가 직접 지원하는 방법은 아니지만, 간병비로 인해 과도하게 짊어져야 하는 의료비의 자기부담율을 낮추는 대안이 될 수 있다.
물론 위에서 제시한 대안들은 하나가 다른 하나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총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제도개혁이다. 이제는 ‘간병노동의 사회화’를 구호를 넘어서, 이를 실현할 수 있는 단계적이고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 고민할 때이다. 간병노동은 개별여성이나 한 가족이 짊어져야 할 ‘개인적인 숙명’이 아니라, 정책적으로 충분히 조절될 수 있는 ‘정치적인 영역’이다. 사회화되어야 하는 것은 여성이 간병노동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지를 감시하는 시선이 아니라, 간병노동 자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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