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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부색깔=꿀색>(길찾기, 2008.01)의 작가 전정식은 다섯 살 때 벨기에로 입양됐다. 만화는 해외 입양된 작가의 자전적 삶을 토대로 한다. 노란색 앞표지에는 입양 당시의 서류가, 뒷표지에는 이름과 번호가 함께 박혀있는 그의 어린 시절 사진이 실려 있다.
만화는 전체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배고픔에 지쳐 서울의 어느 거리를 헤매던 다섯 살 어린 나이의 기억과 고아원에서 벨기에로 입양되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언어가 다르고 피부색이 다른 새로운 가족과의 만남이 섬세하게 나열된다. 2부에서는 입양인이라는 정체성 고민, 주변 입양인과의 관계, 친구들의 비극적인 자살, 한국에 대한 이끌림 등이 묘사되어 있다.
생모=‘한국전쟁+가부장제+모성’ 그리고 해외입양
어린 시절의 화자와 마흔 두 살이 된 화자의 목소리는 때때로 갈라지고 합쳐진다. 어린 시절의 화자는 그때그때 부닥치게 되는 상황에 대해 당시의 감정 이를 테면 흥분, 초조, 설렘, 기쁨, 분노 등을 토로한다. 반면 마흔 두 살의 화자는 차분하고 담담한 어조로 어린 시절 화자가 처하게 된 배경 즉 6.25 전쟁 등 한국의 거대 역사와 해외 입양에 대한 한국사회의 가부장적 구조, 그리고 벨기에의 입양 문화 등을 설명한다.
서사는 너무 무겁지도 너무 가볍지도 않게 전개된다. 어린 화자의 시각에서 입양 과정은 때로 유머러스하고 흥미진진한 모험이 되기까지 한다. 이야기의 말미에 이르러서는 어린 화자와 성장한 화자가 마주하게 되는데, 서로를 향해 이야기하면서 비로소 벨기에인과는 생물학적으로 다르고, 태어난 모국 한국에서는 버려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이야기는 입양에 대한 기억을 더듬고, 모국에 대한 그리움을 말로 표현함으로써 스스로를 치유할 힘을 갖게 되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전정식의 자전만화인 <피부색깔=꿀색>에서 조국은 어머니와 나란히 병치된다. 주인공 ‘정’은 입양 전 고아원에서 허락 없이 친구들과 밖에 나갔다가 고아원 선생님에게 커다란 야구방망이로 머리를 맞는다. 길거리 생활은 배고픔에 허덕여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어머니를 찾아 헤매는 순간이기도 하고, 어머니를 만나게 된다는 환상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정’은 다섯 살 때 이미 남대문 근처에서 우연히 길을 잃은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엄마에 의해 버려졌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엄마를 한번도 원망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엄마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늘 엄마에게 많은 애정을 갖고 있었다고 고백한다.
생모는 ‘정’의 생물학적 기원 즉 한국을 상징한다. 한국은 모성화되고 생모는 국가의 전통과 겹쳐져 흔히 한국적 모성이 상징하는 과보호 혹은 아이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지고지순한 이미지로 형상화되고 있다.
‘정’은 자신의 엄마가 미혼모였을 것 같다라고 추측한다. 반면 아빠에 대한 그리움은 없다고 딱 잘라 말한다. ‘생부라는 사람은 분명 경솔하면서도 무사태평한 성격의 소유자’로 부잣집 아들이거나 대학생일 거라고 생각한다.
이 추측은 한국 사회의 가부장제 구조의 견고함, 불평한 가족법 등으로 미혼모들이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버리게 되고, 이중 상당수가 해외입양을 한다는 사회학적 분석에 근거한 것이다. 한국 사회의 가부장제에 의해 ‘정’과 ‘정’의 생모는 피해자가 되어 한 편이 되고, 생부는 가해자가 되어 대척 지점에 서게 된다. 따라서 엄마와 아빠로부터 동시에 버림을 받았지만, 생모에 대한 그리움과 환상은 고아원에서도 무리 없이 연장된다.
입양아들의 자살…두 개의 조국 틈새에서 자란다는 것
한편 벨기에로 온 ‘정’은 정기적으로 악몽을 꾼다. 그럴 때마다 엄마의 품에 숨어버리고 싶지만, 양모는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정’은 양모로부터도 채워지지 않은 모성에 대한 그리움을 생모에 대한 환상으로 대체한다.
또 다른 한국인 입양아이자 동생인 이성숙 즉, 발레리도 어머니의 사랑에 굶주린 것으로 표현된다. 같은 고등학교에 다니던 입양아들의 자살은 엄마의 체온, 혹은 그와 같은 따뜻함 등에 대한 기억을 견뎌내지 못한 결과라고 토로하기까지 한다.
‘정’에게 있어 정체성에 대한 극복은 양모로부터 모성을 확인하는 순간에 이뤄진다. ‘정’이 열여덟 살 때 매운 타바스코 소스를 너무 많이 먹어 출혈성 위염으로 인해 죽을 뻔한 사건을 겪게 된다. 형이 ‘정’에게 수혈 때문에 부모님이 많은 돈을 쓰게 됐다는 비난을 하자 ‘정’은 소리 내어 우는데, 울고 있는 ‘정’의 등을 양모가 두드린다. 따스한 양모의 손길과 부드러운 음성을 듣게 되면서 ‘정’은 엄마의 아들로서 자신의 자리도 있었다는 것을 확인한다.
그리고 비로소 본인과 나머지 벨기에 가족들과의 차이점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 후 실타래가 풀리는 것처럼 한국인과 벨기에인 사이에 정체성 혼란을 겪은 나의 몸과 뿌리는 하나로 통합된다. 그리고 버린 어머니와 기른 어머니 둘을 있는 그래도 인정하게 된다. 또한 자신이 두 개의 조국 사이 틈새에서 태어나고 자랐음도 인정하게 된다.
이야기의 화자이자 작가인 전정식은 만화가가 되어 자신의 이야기 주제로 주로 고아, 버려짐, 뿌리를 떠나온 것에 대한 느낌, 정체성 등을 다뤄왔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가 생모를 찾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우리 둘 중 죄책감의 무게로 더 힘들었을 사람이 엄마”일 것이라고 토로한다.
20만 해외입양인 배출한 한국, 그들에게 마련된 공간은?
스웨덴 입양인 이새돌(토비아스 휘비네트) 박사는 그의 박사논문인 <해외 입양과 한국민족주의>에서 아시아의 해외입양과 노예제도 사이의 유사성을 추적했다. 그리고 입양 한국인은 일본군‘위안부’ 여성들과 함께 가야트리 스피박이 말한 ‘하위주체’와 비슷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해외입양은 권력의 생물정치학적 기술이며, 한국의 가부장적 가족구조와 인구정책이 입양을 존재하게 만든 절대적 선결조건이 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현재 한국사회는 출산율이 가장 낮은 나라로 기록되고 있다. 경제적 활동과 육아부담을 동시에 짊어져야 하는 한국여성에게 아이를 낳고 기르기란 결코 녹록치 않은 현실이다. 하물며 혼자 낳아 혼자 기르기란 어떻겠는가. 해외입양의 숫자가 최근 줄어든다고는 해도 지속되고 있는 현실이다. 무엇보다도 아이를 버렸다는 묵직한 책임감 역시 아직도 여성인 엄마에게만 지워지고 있다.
한국은 이미 세계 각지에 20만 명이나 되는 해외 입양인을 배출했다. 그런데도 돌아올 그들을 위해 혹은 숫자를 불려나갈 미래의 또다른 그들을 위해 마련된 공간은, ‘저출산을 극복하자’는 구호 속에서도 턱없이 부족하기만 하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김은혜]
[입양 관련 기사보기] ‘입양인’ 정체성이 예술의 원동력 | 입양 활성화 이면…아이 포기하는 비혼모
만화는 전체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배고픔에 지쳐 서울의 어느 거리를 헤매던 다섯 살 어린 나이의 기억과 고아원에서 벨기에로 입양되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언어가 다르고 피부색이 다른 새로운 가족과의 만남이 섬세하게 나열된다. 2부에서는 입양인이라는 정체성 고민, 주변 입양인과의 관계, 친구들의 비극적인 자살, 한국에 대한 이끌림 등이 묘사되어 있다.
생모=‘한국전쟁+가부장제+모성’ 그리고 해외입양
어린 시절의 화자와 마흔 두 살이 된 화자의 목소리는 때때로 갈라지고 합쳐진다. 어린 시절의 화자는 그때그때 부닥치게 되는 상황에 대해 당시의 감정 이를 테면 흥분, 초조, 설렘, 기쁨, 분노 등을 토로한다. 반면 마흔 두 살의 화자는 차분하고 담담한 어조로 어린 시절 화자가 처하게 된 배경 즉 6.25 전쟁 등 한국의 거대 역사와 해외 입양에 대한 한국사회의 가부장적 구조, 그리고 벨기에의 입양 문화 등을 설명한다.
서사는 너무 무겁지도 너무 가볍지도 않게 전개된다. 어린 화자의 시각에서 입양 과정은 때로 유머러스하고 흥미진진한 모험이 되기까지 한다. 이야기의 말미에 이르러서는 어린 화자와 성장한 화자가 마주하게 되는데, 서로를 향해 이야기하면서 비로소 벨기에인과는 생물학적으로 다르고, 태어난 모국 한국에서는 버려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이야기는 입양에 대한 기억을 더듬고, 모국에 대한 그리움을 말로 표현함으로써 스스로를 치유할 힘을 갖게 되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전정식의 자전만화인 <피부색깔=꿀색>에서 조국은 어머니와 나란히 병치된다. 주인공 ‘정’은 입양 전 고아원에서 허락 없이 친구들과 밖에 나갔다가 고아원 선생님에게 커다란 야구방망이로 머리를 맞는다. 길거리 생활은 배고픔에 허덕여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어머니를 찾아 헤매는 순간이기도 하고, 어머니를 만나게 된다는 환상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정’은 다섯 살 때 이미 남대문 근처에서 우연히 길을 잃은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엄마에 의해 버려졌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엄마를 한번도 원망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엄마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늘 엄마에게 많은 애정을 갖고 있었다고 고백한다.
생모는 ‘정’의 생물학적 기원 즉 한국을 상징한다. 한국은 모성화되고 생모는 국가의 전통과 겹쳐져 흔히 한국적 모성이 상징하는 과보호 혹은 아이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지고지순한 이미지로 형상화되고 있다.
‘정’은 자신의 엄마가 미혼모였을 것 같다라고 추측한다. 반면 아빠에 대한 그리움은 없다고 딱 잘라 말한다. ‘생부라는 사람은 분명 경솔하면서도 무사태평한 성격의 소유자’로 부잣집 아들이거나 대학생일 거라고 생각한다.
이 추측은 한국 사회의 가부장제 구조의 견고함, 불평한 가족법 등으로 미혼모들이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버리게 되고, 이중 상당수가 해외입양을 한다는 사회학적 분석에 근거한 것이다. 한국 사회의 가부장제에 의해 ‘정’과 ‘정’의 생모는 피해자가 되어 한 편이 되고, 생부는 가해자가 되어 대척 지점에 서게 된다. 따라서 엄마와 아빠로부터 동시에 버림을 받았지만, 생모에 대한 그리움과 환상은 고아원에서도 무리 없이 연장된다.
입양아들의 자살…두 개의 조국 틈새에서 자란다는 것
한편 벨기에로 온 ‘정’은 정기적으로 악몽을 꾼다. 그럴 때마다 엄마의 품에 숨어버리고 싶지만, 양모는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정’은 양모로부터도 채워지지 않은 모성에 대한 그리움을 생모에 대한 환상으로 대체한다.
또 다른 한국인 입양아이자 동생인 이성숙 즉, 발레리도 어머니의 사랑에 굶주린 것으로 표현된다. 같은 고등학교에 다니던 입양아들의 자살은 엄마의 체온, 혹은 그와 같은 따뜻함 등에 대한 기억을 견뎌내지 못한 결과라고 토로하기까지 한다.
‘정’에게 있어 정체성에 대한 극복은 양모로부터 모성을 확인하는 순간에 이뤄진다. ‘정’이 열여덟 살 때 매운 타바스코 소스를 너무 많이 먹어 출혈성 위염으로 인해 죽을 뻔한 사건을 겪게 된다. 형이 ‘정’에게 수혈 때문에 부모님이 많은 돈을 쓰게 됐다는 비난을 하자 ‘정’은 소리 내어 우는데, 울고 있는 ‘정’의 등을 양모가 두드린다. 따스한 양모의 손길과 부드러운 음성을 듣게 되면서 ‘정’은 엄마의 아들로서 자신의 자리도 있었다는 것을 확인한다.
그리고 비로소 본인과 나머지 벨기에 가족들과의 차이점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 후 실타래가 풀리는 것처럼 한국인과 벨기에인 사이에 정체성 혼란을 겪은 나의 몸과 뿌리는 하나로 통합된다. 그리고 버린 어머니와 기른 어머니 둘을 있는 그래도 인정하게 된다. 또한 자신이 두 개의 조국 사이 틈새에서 태어나고 자랐음도 인정하게 된다.
이야기의 화자이자 작가인 전정식은 만화가가 되어 자신의 이야기 주제로 주로 고아, 버려짐, 뿌리를 떠나온 것에 대한 느낌, 정체성 등을 다뤄왔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가 생모를 찾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우리 둘 중 죄책감의 무게로 더 힘들었을 사람이 엄마”일 것이라고 토로한다.
20만 해외입양인 배출한 한국, 그들에게 마련된 공간은?
스웨덴 입양인 이새돌(토비아스 휘비네트) 박사는 그의 박사논문인 <해외 입양과 한국민족주의>에서 아시아의 해외입양과 노예제도 사이의 유사성을 추적했다. 그리고 입양 한국인은 일본군‘위안부’ 여성들과 함께 가야트리 스피박이 말한 ‘하위주체’와 비슷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해외입양은 권력의 생물정치학적 기술이며, 한국의 가부장적 가족구조와 인구정책이 입양을 존재하게 만든 절대적 선결조건이 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현재 한국사회는 출산율이 가장 낮은 나라로 기록되고 있다. 경제적 활동과 육아부담을 동시에 짊어져야 하는 한국여성에게 아이를 낳고 기르기란 결코 녹록치 않은 현실이다. 하물며 혼자 낳아 혼자 기르기란 어떻겠는가. 해외입양의 숫자가 최근 줄어든다고는 해도 지속되고 있는 현실이다. 무엇보다도 아이를 버렸다는 묵직한 책임감 역시 아직도 여성인 엄마에게만 지워지고 있다.
한국은 이미 세계 각지에 20만 명이나 되는 해외 입양인을 배출했다. 그런데도 돌아올 그들을 위해 혹은 숫자를 불려나갈 미래의 또다른 그들을 위해 마련된 공간은, ‘저출산을 극복하자’는 구호 속에서도 턱없이 부족하기만 하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김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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