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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도 비밀은 있다

누구에게나 쉽게 말할 수 없어 마음에 숨겨둔 일이 하나쯤은 있다. 그들 중 어떤 비밀은 가까운 친구나 애인, 가족에게도 토로하기 힘든 감정으로 채워져 있을 수도 있다. 그것은 낫지 않는 상처처럼, 망상적인 자괴감처럼, 갑작스런 자각처럼 ‘버라이어티하게’ 우리의 깊숙한 곳에 불씨를 남겨 꺼지지 않는다. 하나의 감정으로 규정할 수 있다면 차라리 속이 편할 텐데, 우리는 다른 사람도 아닌 자기 자신이 겪고 느낀 일에서도 더러는 혼란을 느끼는 것이다. 왜 그래야만 하는 걸까?
 
몇 해 전 나는 떠올리기 싫었던 어떤 종류의 기억들을 말하고 들을 수 있는 생애 최초의 기회를 얻었다. 그것은 우연하게 나온 여자들 사이의 수다거리였는데, 크고 작은 성적 폭력들에 관한 것이었다. 알고 보니 우리에게는 집이나 학교 그리고 거리에서, 가족이나 친인척 그리고 동료 혹은 처음 본 사람에게서 받았던 갖가지 피해와 공격들이 있었다. 케이스들은 저마다 달랐지만 우리가 겪은 일들이 ‘존재에 대한 성적 위협’이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었으니, 이를 폭넓게 ‘성폭력’이라고 명명하기로 하자.
 

영화 "버라이어티 생존토크쇼"

깜짝 놀란 것은 그 자리에 있던 여성 모두가 그런 류의 일을 최소 한번 이상은 경험해보았다는 사실이었다. 아마도 우리는 그런 일은 소수만이, 혹은 나만이 겪은 일일 거라고 암암리에 생각해왔었나 보다. 그날 여자들은 그리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어조로 서로의 사연을 공유했다. 단 한번의 소통으로 오랫동안 홀로 품어왔던 불안이나 공포가 한번에 날아가는 건 아니었지만, 그 사실을 공개적으로 말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해방감을 느꼈다. 왜 그랬던 걸까?
 
내가 이 영화 <버라이어티 생존토크쇼>를 처음 보았던 건, 올해 유월 청계광장에서 열린 서울 인권영화제에서였다. 성폭력에 대한 다큐멘터리영화였다. 우리 주변에서 흔하디 흔하게 일어나는 사건이건만 여전히 여성 입장에서는 제대로 다뤄지지 않은, 바로 그 주제다. 나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장소에서 이런 영화가 상영된다는 것이 너무나 기뻤다.
 
어떻게 말할까 -그녀들이 입을 열다
 
영화는 성폭력을 경험한 이후 그에 대처하는 여성들의 모습을 다뤘다. 그리고 거기에 이 사회가 갖고 있는 성에 대한, 여성의 몸에 대한 시각들이 덧붙여졌다. 무엇보다도 좋았던 점은 개인의 경험이 사회적 줄기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그려진 이 영화의 퍼즐 같은 구체화 방법이었다.
 
초입에 등장한 ‘이프 안티페스티벌’에 참가한 한 여성미술가가 증언과 함께 선보인 퍼포먼스, “Body Knows” 때문에 벌써부터 가슴이 차오른다. 그녀의 작품은 다음과 같이 말문을 열었다: ‘나는 강간을 당했다. 하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이 단 두 개의 문장과 기호를 변형시킨 듯한 인상적인 그림만으로도 피해자들 안에 감추어져 있던 강요된 죄의식을 명확히 표현하였다.
 
곧 우리의 주인공 ‘미경’이 등장한다. 그녀는 그 일을 당한 후, 아니 겪은 후 ‘작은 말하기’라는 소모임을 알게 되었다. 모임의 여성들은 한 달에 한번 자발적으로 만나 자신의 성폭력 피해경험을 말한다. 그리고 서로에게 직간접적인 공감과 지지, 도움을 전해준다.
 
‘미경’은 처음 그 모임에 나갔을 때 “당신들 왜 이렇게 멀쩡하세요?”라고 했다 한다. 당사자인 그녀 자신에게도, 성폭력 피해여성이란 어둡고 피폐한 이미지였던 것이다. 하지만 실제의 그녀들은 자기 안에 감추어진 아픔을 들여다볼 용기를 가진 것 외에는 모든 것이 평범한 여성들이었다. 그녀 역시 편견의 눈으로 보면 도리어 신선하게 느껴질 정도로 시종일관 밝은 모습을 보인다. 나는 그녀가 영화에서 단순히 피해자가 아니라 삶을 살아내는 한 여성으로 비춰지는 면이 좋았다.
 
여성학 연구자인 ‘보짱’은 학생운동권 사회에서 성폭력을 경험했다. 그녀는 소속된 단체의 위신과 자신(을 포함한 여덟 명 이상의 여학생들)의 피해를 밝히는 것 사이에서 갈등했지만, 결국 행동했다. ‘집단의 대의’라는 명분 속에는 반복되는 폭력을 위한 변명이 스며 있다는 걸 알았을 터였다.
 
‘한새’는 애써 묻어 두었던 젊은 시절의 뼈아픈 기억이 성교육 강사 일을 하면서 점차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르는 걸 느꼈다. 성별분리교육을 통해 우리는 대부분 ‘놀이와 폭력이 구분되지 않는’ 학창시절을 보내왔다. 그녀는 청소년들을 가르치면서 진정한 존중이 깃든 자유로운 성문화를 고민하고 있었다. 함께 출연한 그녀의 아들은 흔히 볼 수 없이 의젓하고 유머러스한 소년이었다. 서로를 충실히 이해하고 있는 두 모자(母子)의 모습을 지켜보는 내내 웃음이 배어 나왔다.
 
피해 이후에 오는 것들 -온전히 내 경험을 이해 받을 수 없었다
 

"버라이어티 생존토크쇼" 포스터


가부장제 내에서 여성과 관련된 성범죄를 연구한 많은 학자들과 활동가들은 줄곧 시사해왔다. 성폭력은 절대 소수를 대상으로 한 범죄가 아니며, 인식의 문제가 개선되지 않는 한 그 발생 가능성은 도처에 널려 있다고. (통계에 비춰보더라도 피해자의 대다수가 아는 사람으로부터 폭력을 당했으며, 특정 나이, 옷차림, 시간대가 폭력의 원인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새삼스레 거론해야 할까.)

 
그러나 아직도 성폭력 특히 강간이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범죄이다. 그나마 최근에 ‘아동성폭력’에 대한 경각심이 일고는 있지만, 여전히 성인여성의 피해에 대해서는 등한시하려는 경향이 있다. 아이들을 위한 사회적 지침도 그저 ‘모르는 사람을 따라가지 마라’, ‘당신의 아이를 혼자 두지 마라’는 식의 전혀 근본적이지 못한 캠페인들뿐이다.
 
인간은 자신의 경험을 문화적 그물망에 넣어 규정하고 외부 기준에 의탁하여 해석하는 존재이다. 폭력의 원인으로 피해자를 지목하는 ‘성폭력’이라는 정의 앞에서 여성들은 자신이 피해자임을 밝힐 수도, 스스로를 오롯한 하나의 자아로 인정할 수도 없어 회복하는 데에 긴 시간이 걸린다. 사회적 대안이라는 것이 단지 “조심하고 또 조심해라”는 수준에서 그친다면 오히려 그 범죄에 대해서 보다 근본적인 차원의 대비는 하지 않는 셈이다.
 
지인에게조차 온전히 이해 받지 못하는 이 고독은 숨 막히는 과정을 감내하길 요구 받는다. ‘보짱’은 ‘성폭력생존자말하기대회’에서 “(가해사실을 밝히면) 가해자 인생이 뭐가 되냐, 용서하고 넘어가라”고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다고 증언했다. 그녀는 그들에게 “내게는 용서하거나, 용서하지 않을 권리도 없는 것이냐”고 되묻고 싶었다 한다. 그리고 이어 떨리는 목소리로 ‘나야말로 가능한 빨리 용서해버리고 싶다’, ‘그에 대한 기억을 다 들어내고 행복하고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 했다.
 
괴로워하는 피해자에게 “삽입했건 안 했건, 칼 들고 있는 놈한테서 벗어나 살았으면 된 것 아니냐, 그만 좀 잊어버려라” 하는 사람이나, 장애여성인 피해자에게 “너 같은 애 건드리고 싶겠냐”고 말해 2차 폭력을 행사한 사람들은 과연 그녀들의 고통을 ‘고통’으로 인정하고 있을까?
 
심지어 같은 여성에게조차 그 감정 그대로, 그 경험 그대로 위로 받을 수 없는 불행이 바로 성범죄 피해이다. 그렇게 되면 피해여성들은 자기 자신조차 믿지 못하게 된다. ‘내가 뭘 착각한 걸까’, ‘이 모든 게 내 결국 잘못인가’, ‘그렇다면 나에게 남은 신체와 심리의 상처는?’……. 범죄에 대한 뒤틀린 시각은 피해자에게 스스로를 책망해야 할 무수한 이유만 남길 뿐이다.
 
공동의 문제 -단지 여성이 아니라 ‘생존자’다
 
이 영화의 중반부에는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성범죄에 대한 여성들과 남성들의 생각이 인터뷰 형식으로 교차되어 있다. 재미있게도 어린 시절의 기억들만 들추어 보아도 여성 쪽에서는 부끄러움이거나 괴로움이었던 것이 남성들에게는 그냥 소소한 추억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몇몇 남성들의 인터뷰에서는 어김없이 익숙한 대사들이 흘러나왔다.
 
“여자들의 노출이 문제다”, “충동 때문에 그렇다”, “그런 안 좋은 일들이 (남자보다) 여자 쪽에 무거웠던 게 억압은 아니잖아요?”…….
 
조세영 감독은 “이런 얘기를 듣다 보면 세상에는 남자와 여자가 아니라 남자와 생존자가 있을 뿐이고, 나 자신조차 생존자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고 말했다. 생존자라는 단어가 얼핏 극단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 말에 깊게 동감했다. 상대를 폭력으로 굴복시켜 내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은 충동을 실현하는 것이 남성의 어쩔 수 없는 ‘본능’으로 합의된 세상에서, 큰 일 당하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생존이 아닌가.
 
문득 몇 년 전의 일이 하나 생각난다. 계속 내 뒤를 몰래 쫓다가 택시에 따라 타려 했던 한 중년남자의 소름 끼치는 눈빛. 다행히 그 사람을 떼어 놓고 집으로 돌아갈 수는 있었지만, 지금은 그보다도 ‘저 사람 좀 못 타게 해달라’고 부탁하던 내게 “아가씨가 마음에 들었나 보지”라며 능글능글하게 말하던 택시기사의 태도가 더 분하게 남는다. 아마 그도 평소 지극히 ‘상식적인’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정상적인’ 사람이 성적 위협을 연애사건으로 취급하고, 상대 성의 공포에 무지할 수밖에 없다는 게 나는 슬프다.

 
지금, 함께 한다면 ‘우리’의 일이 된다

영화 "버라이어티 생존토크쇼"

영화의 후반부에는 다시 ‘미경’의 사건이 이어지고 있다. 그녀의 가족들이 가해자와 합의해버렸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자기 하나 건사하기도 쉽지 않은 여건에서 그 일로 집안이 난리가 나고 부모님도 괴로워하니까, 그녀는 ‘이렇게까지 하는 내가 웃긴 건가’ 하고 흔들렸다. 그래서 순간적인 기분에 “마음대로 하시라”고 했는데 그날 당장 삼촌이 합의를 해버린 것이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는 자신의 의사는 조금도 반영되지 않은 기분이라며 울먹인다.

 
그때 ‘작은 말하기’의 친구들이 그녀와 그녀들 자신을 위한 결심을 한다.
“액션이 필요한 때야!”
 
얼마 후, 다시 재판장으로 향하는 ‘미경’의 얼굴에는 긴장이 역력하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벌떡이는 심장을 진정시켜줄 ‘우황청심환’과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그녀를 지켜줄 ‘선글라스’, 그리고 ‘그녀들’이 있었다.
 
물론 현실은 현실인 바, 재판과정의 일부와 그 결과를 녹음한 테이프를 들어보면 우리는 다시 한번 힘이 빠진다. 실소마저 흘러나온다.
 
“(칼을 미리 준비하고 가는 길에) 청 테이프를 구입했다고 하지만 며칠 전부터 준비해놓은 것도 아니니…… 이는 당일 야동을 보면서 순간적인 욕정이 발생한 것으로 보고…… 범행 장소가 집 근처인 것을 보더라도 우발적……”
 
하지만 내가 아는 바로 ‘미경’은 이후에도 자신의 사건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의 선택이 녹녹치 않은 현실에서 그 뜻을 완전히 실현하기는 어려웠을 테지만, ‘그녀들’과 함께이기에 사건은 조금은 그 빛깔을 바꾸었을 것이다.
 
올해 출간되어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모았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1Q84』에는 여주인공인 아오마메가 종교단체의 ‘리더’에 의해 철저히 유린당하다 구출된 어린 소녀를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종교적 도그마에 미친 부모 밑에서 성장한 그녀가 소녀에게서 발견한 것은 바로 “그랬을지도 모르는 자기 자신의 모습이었다.”
 
한 가지 시도로 세상사 모든 걸 해결 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이 원래 다 그런 것”이라는 말로 변화를 희구할 수 없게 만드는 잘못된 신념들로부터 우리자신을 해방시킬 수는 있다. 그리고 “나의 삶이 그녀들의 삶과도 맞닿아 있는 것”을 체험적으로 배울 수 있다. 소통을 향한 내면의 욕망은 실천의 계기나 여지들을 충분히 갖고 있다.
 
그렇게 되면 각자의 슬픔은 더 이상 개인적인 해결만을 요구하는 일도 아니요, 묻어두어야 할 불명예도 아니게 된다. 그래서 감독은 말한다: “그래, 나는 여자다. 그래서 도전해야 할 것들이 더 많다.”
 
이 영화의 소재 자체는 도저히 우울하지 않게 생각할 수가 없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버라이어티 생존토크쇼>는 발랄하고 따뜻한 리듬으로 희망을 말한다. 여성의 입에서 전해진 이 신선한 메시지가 굳어버린 현실에 청명한 파도를 일으키기를 기대한다.
 
마지막으로 영화 속에 등장하던 가두집회의 재치만점 구호들을 떠올려본다:
. 야한 옷이 무슨 상관 (술 마신 게 무슨 상관)? 성폭력은 가해자 탓!
. 보호가 아니라 자유를 원한다!
. 밤길이 위험하면 니들부터 들어가라!
 

자, 이제 우리도 “액션이 필요한 때!” [여성주의 저널 일다 / 성지혜]

※<버라이어티 생존토크쇼>:
blog.naver.com/vstalkshow 
(이곳에서 상영정보를 얻을 수 있다.)

[관련 기사] 성폭력 판례를 바꾸자 | 소녀를 죽인 건 당신들이다 | 성폭력 범죄는 멀리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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