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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지영이라는 작가를 좋아한다. 처음부터 이 작가를 좋아했던 건 아니었다. 젊은 날 나는 그녀를 막연히 질시했다. 글도 잘 쓰고, 예쁘기까지 한 여자가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는 것이 내심 배가 아팠다.

오래전 한겨레신문의 열혈구독자였을 때 읽었던 <봉순이 언니>만 해도, 누구도 주목하지 않을 만한 인물을 참으로 잘 그려냈다 싶은 정도였지 큰 감동은 없었다. 그러다 몇 년 전 모 일간지에 연재되던 <즐거운 나의 집>을 꼬박꼬박 챙겨 읽으며 비로소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다. 삶 앞에서 어쩌면 그리도 치열할 수 있으며, 그토록 진솔한 작품세계를 구사할 수 있다니…. 비로소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한 여자를, 그 여자의 작품을 고깝게만 여겼던 내 안의 파시즘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뒤부터 작가 공지영이 좋아졌다.

그리고 2009년 여름을 뜨겁게 달군 작품 <도가니>를 통해 공지영의 소설과 다시 만났다. 일에 치여 사느라 이 작품이 인터넷에서 연재되고 있는 줄도 몰랐다가, 단행본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은 뒤 첫 느낌은 ‘아, 공지영이 또 해냈구나!’였다. 더구나 이 작품은 농아학생들을 대상으로 지속적으로 성폭력을 자행해온 특수학교와 시설의 문제를 다룬 것이라고 했다. 쇠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장애운동을 한다는 나는 속수무책인 채 이렇게 지쳐가고 있는데…’ 자괴감이 들었다.        

주인공 강인호가 자애학교에서의 첫 수업 날 어떻게 아이들에게 다가갔는지 디테일하게 묘사한 부분은 역시 압권이었다. 자끄 프레베르의 <밤의 피리>라는 시와 함께 그가 켠 세 개의 성냥불. 불의와 폭력 앞에 짓밟힌 채 누구의 도움도 기대하지 못하던 추운 영혼들에게 강인호는 강렬하지는 않지만 한 줄기 빛으로 다가간다. 그리고 서툴게나마 수화로 이야기하며 아이들에게 미소로 다가간다. 자애학교의 비장애교사 대부분은 수화를 전혀 구사하지 못하는 현실과 대비되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작가 공지영은 그렇게 외부 사람들에게 무조건적인 적의를 가질 법한 상처 입은 영혼들을 존중하고 배려하며 그토록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강인호란 인물을 살아있는 인물로 그려내는 데 성공했다. 강인호는 청각장애학생들에 대한 특별한 봉사정신이나 사명감도 없이 그저 먹고 살기 위해 오천만원의 기부금을 내고 교사가 된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보기에도 자애학교의 현실은 ‘너무 아닌’ 곳이었다.

그렇게 충분히 나약하고 비겁한 소시민인 강인호란 인물에 깊이 감정이입하면서도 <도가니>를 읽는 내내 나는 불편하고 불안했다. 소설을 다 읽고 나서도, 그 불편함과 불안감의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해 한참을 생각했다. 물론 현실과 문학을 혼동한 채 소설 속 주인공 강인호가 끝까지 싸우지 않은 것을 두고 비분강개했던 것은 아니다. 어떤 작가도 계몽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비판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다만, 왜 소설의 전반적인 정조(情調)가 ‘분노’가 아니고 ‘공포’였는지 나는 내내 의문이었다.

사실 소설 속 배경이 되고 있는 자애학교는 장애운동을 하는 내겐 낯선 공간과 사건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약자 중의 약자인 장애학생들을 짓밟으면서 축재한 재산으로 지역에서 떵떵거리고 잘 살아가는 이강석과 이강복 형제들, 그들과 유착해 세력을 유지해나가고 있는 지역사회와 종교계, 법조계의 거대한 거짓 시스템은 유효하다. 끔찍한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거짓은 잘도 은폐되거나 사람들 뇌리에서 잊혀져가고 제2, 제3의 사건이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현실을 잊을 래야 잊을 수 없는 현장의 한복판에서 살아가고 있는 나로서도 이 소설은 공포스러웠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는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이 장애를 공포스럽게 기억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더욱 공포스러워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장애는 공포, 혹은 불행의 상징으로 이미 각인되어 있다. 거기에다 이 소설 속 자애학교와 그곳의 아이들은 보통사람들과는 완전히 구분되는 공간에서 끔찍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문제는 그 끔찍한 상황에 처해 있는 아이들과 그것을 가까이서, 혹은 멀리서 바라보는 사람들 사이의 거리감에 있는 듯싶다.

그러한 공포는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자들의 감정이지, 바로 그 치열한 공간 한가운데 몸담고 있는 자들의 감정이 아니다. 때문에 이 소설을 읽는 독자에게, 거짓과 협잡과 폭력이 난무하는 안개로 뒤덮인 무진(霧津)의 현실은 그들 자신이 몸담고 있는 현실과는 거리가 있다. 소설 속 주인공 강인호의 공포와 작가 공지영의 공포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성폭력과 구타, 살인을 당한 농아학생들에게는 자신들에게 고통을 가하는 악의 무리들에 대한 미움과 분노, 어떻게든 그들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절박감이 더 큰 진실일 것이다. 그러므로 아이들은 분노하고 절규하지만 강인호는 공포를 느꼈던 것이고, 강인호의 공포가 소설을 읽는 이들에게 흡입력 있게 전달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소설에선 선배 서유진이 끝내 아이들과 함께하지 못하고 아내 곁으로 돌아간 강인호를 애써 품어주기 위해, 아이들이 그룹홉에서 지내며 많이 행복해한다는 소식을 전해주는 것으로 결말이 난다. 그 아이들은 적어도 자애학교에서보다는 조금 나아졌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다시 학교로 돌아온 이강석과 이강복 형제들, 지금도 버젓이 교육기관 노릇을 하고 있는 자애학교의 새로운 학생들과 성폭력과 비리의 온상인 제2, 제3의 자애학교 학생들은 잊어도 되는 현실이 아니다. 과연, 지금도 현재진행형인 이 광란의 도가니 앞에서 분노와 눈물 없이 진실을 끝까지 응시하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 걸까.

이 소설은 적어도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쉽게 분노하다가는 금세 잊어버리곤 하는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각인될 수 있다는 점에서 수작(秀作)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나는 이 작품이, 소설 속 배경이 되고 있는 자애학교를 공포스런 사건의 현장으로 각인시켜줌으로써 그곳이 지금 우리가 몸담고 있는 현실의 한복판임을 잊게 해주지나 않을까 오히려 우려된다.

그것이 내가 영웅화된 인물이 아니라 상처받은 소시민의 자리로 돌아간 주인공 강인호에게 끝내 공감하지 못하는 이유이며, 이 소설에 열광하는 수많은 독자들과 깊이 있게 교감하지 못하는 이유인 듯싶다. 그들은 이 거짓과 폭력 앞에서 공포를 느끼지만 나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 역시 스스로 진실임을 자처하면서도 게으른 탓에 보다 부지런을 떠는 거짓 앞에 자주 무릎 꿇곤 하지만, 끝내 다시 일어서곤 하는 것은 바로 그 분노의 힘인 것 같다.

김효진님은 <오늘도 난, 외출한다>의 저자이며, 장애여성네트워크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필자의 다른 기사] 장애가 뭐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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