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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국어 선생들이 말하는 ‘요즘 학교 어떤가요’③

 

이제껏 국어 시간에 만난 시인들을 한 명씩 불러보자.

윤동주, 백석, 이육사, 김소월, 한용운, 박목월, 박두진, 유치환, 이용악, 서정주….

익숙한 호명에 몇몇은 얼굴까지도 또렷이 떠오른다. 그들은 국어교육 내에서 더는 도전받지 않는 뚜렷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들의 위상은 너무도 확고하여 일견 깊은 해자와 웅장한 산세로 둘러싸인 견고한 성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문학사적 업적이나 지명도 외 그들의 공통점을 찾아보라고 하면 선뜻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숨 쉬듯 익숙한 것이라 그런지도 모른다. 바로 작가의 성별이다. 전부 남성인데, 왜 학창 시절에는 이러한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의아할 정도다.

 

▲ 학생들이 국어교육을 통해 만나게 되는 시인들의 성별 편향성을 보완하고, 문학의 더 넓은 세계를 탐험할 수 있게 돕기 위해, 여성 시인들의 작품을 발굴했다. (이미지 출처: pixabay)

 

2015년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현대 시 참고서의 목차(『해법 문학 현대 시 (2023년용)』 천재교육, 2019)를 보면, 여성 작가의 작품은 234편 중 38편뿐이다. 심지어 이 수치는 여태껏 보아온 것 중에서 가장 높다. 기존의 문학사가 성별 대표성을 고려하는 데에 이만큼 무심했다는 걸 구체적으로 확인하니 안타까움에 한숨이 절로 난다.

더군다나 이러한 성별 편향이 오랫동안 누적되어 온 결과임을 생각하면,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국어 교사로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해보기로 했다.

 

현재 근무 중인 중학교는 국어 수업 네 시간 중에서 세 시간은 교과서 수업을, 한 시간은 시 감상 수업을 한다. 1학년 자유학년제의 연장선 격으로, 학생들은 매주 한 편의 시를 읽고 이를 필사한 뒤 감상을 적고 자신이 이해한 바를 바탕으로 시화를 그린다. 전입 첫해에는 교과서 수업을 전담하기도 했고 새 학교에 적응하는 데 온 신경을 쏟느라 다른 수업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을 가질 여력이 없었다. 하지만 둘째 해에는 같은 학년을 지도하는 선생님과 절반씩 나눠 들어가게 되면서 비로소 시 감상 수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학교에서 업무 분장이 2월 셋째 주 정도에나 발표되기 때문에, 처음 맡는 업무일 때는 새로운 것을 시도하기보다 작년에 했던 것부터 숙지하고 그대로 하기 쉽다. 나 역시 그랬다. 동료 선생님이 준 시 목록을 그대로 인쇄해서 학생들과 수업 시간에 나누었다. 그 목록에서 열의 여덟은 남성 작가의 자리였다. 우선은 이미 정해진 목록을 충실히 하되, 2학기 평가계획을 수립할 때에는 반드시 개선하겠노라며 의지를 다지고 틈틈이 여성 작가의 좋은 작품을 수집했다.

 

 

그리하여 2학기를 시작하기 전에 교과 협의를 할 때는 지난 학기에 가졌던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시 목록을 정할 때 기계적인 성비 1:1은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어떨지 제안했다.

여성 작가의 좋은 작품이 없는 것도 아닌데 전체의 2할에 그치는 건 아쉬운 일이며, 학생들에게도 ‘잠재적 교육과정’(학교의 물리적 조건, 지도 및 행정적 조직, 사회 및 심리적 상황을 통하여 학교에서는 의도하고 계획 세운 바 없으나, 학교생활을 하는 동안에 은연중에 가지게 되는 경험을 뜻함. 『교육학용어사전』 1995)으로서 남성 작가의 작품이 더 가치 있다는 왜곡된 인식을 심어줄 우려도 있다. 그러니 우리에게 가능한 선에서 여성 작가의 작품을 발굴해 추가하는 편이 좋겠다고 말이다.

 

다행히 이런 의견을 동료 교사가 수긍해주어 목록을 선정하는 일은 나에게 맡겨졌다. 기대감과 책임감을 안고 부지런히 찾아보았다. 최근 교과서 또는 EBS 수능특강 등에 실린 작품 외에도 짬이 날 때마다 시집을 읽으며 학생들에게 울림을 줄 수 있을 시를 스크랩해두었다.

그리하여 2학기 시 수업에서 학생들은 고정희와 황인숙, 정끝별과 한강, 강은교와 같이 이전에 비해 높은 비중의 여성 작가들을 만나며 문학의 더 넓은 세계를 탐험할 수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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