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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앞에서 만나] 김미조 감독 〈갈매기〉 _신승은 글

 

‘해일이 오는데 조개나 줍고 있다.’ 어떤 자가 말했다. 대의를 위해서 지금은 온 신경을 거기에 집중해야 할 때인데 페미니즘 같은 작은 조개를 줍고 있을 여력이 없다는 뜻이다. 여기서 말하는 ‘대의’는 과연 무엇일까. 페미니즘은, 여성의 일은 결코 ‘대의’가 될 수 없는 것일까. 위 발언은 수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래 마땅하다. 약자의 권리에서 우선순위를 나누기 시작하는 순간, 망하게 된다. 이 단순한 논리를 사회는 종종 잊는다.

 

가해자보다 피해자가 잘 사는 세상을 원해 (미디어일다)

 

한 씬 내에 서너 컷 이하로 촬영을 했다는 김미조 감독의 인터뷰에서 알 수 있듯, 영화는 서스펜스 대신 다소 지루할지라도 불안감을 자극하지 않고 카메라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방법으로 오복을 바라본다. 김미조 감독의 이 방식은 집안 구석구석을 보여주기도 하고, 시장의 면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롱테이크는 관객의 시선이 비교적 자유롭기 때문에 여기저기를 훑을 수 있다.

 

영화 초반 오복이 엄마와 통화하는 장면이 있다. 우연히 지나가다 들른 학교 운동장 스탠드에 앉아 오복은 엄마와 통화를 한다. 감독은 오복의 옆모습을 끈질기게 바라본다. 오복은 엄마에게 말한다. 학교를 왜 보내주지 않았냐고. 오복은 이 사건에 대응하지 못하는 자기 상황의 답답함을 여기서 풀어내듯 눈물을 보인다. 그러나 영화는 오복의 정면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생리대를 붙이고 투쟁하는 동료들을 바라볼 때도, 목욕탕에서 빨래를 하다가 사과할 때도, 중요한 감정의 씬마다 오복의 옆모습을 보여준다. 응시하되 정면에서 바라보지 않는 이 자세는 옆에서 묵묵히 바라보는 그것이지, 치근덕대며 따라붙는 끈질긴 샷이 아니다. 이 앵글의 선택으로 관객 또한 오복의 옆모습을 묵묵히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사건을 듣고 고소하자는 첫째의 말에 오복은 이렇게 대답한다. “이 나이에 망신살 뻗칠 일 있냐.” 하지만 오복은 점점 변화한다. 높은 건물 옥상에 올라가 1인 시위를 하는 사람을 보면서, 자기편이 아무도 되어주지 않는 시장 사람들을 보면서 오복은 점점 적극적으로 변해간다. 후반부 오복은 손톱을 깎고 글을 써 내려간다. 끝내 가장 최후의 방법을 택한 오복의 엔딩씬은 힘이 넘친다.

 

오복은 피켓을 들고 가해자의 수산 앞에 선다. 감독은 이때도 피켓의 내용을 보여주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오복의 표정이다. 드디어 오복의 정면이 가까이 보인다. 달리 인이 들어간다. 점점 가까워지는 결연한 눈빛의 오복, 그리고 영화 초반에만 잠깐 등장했던 음악이 비로소 다시 등장한다. 트로트다. 중노년을 대변하는 트로트 곡조는 힘이 넘치면서 우울하지 않다. 트로트가 커지면서 영화는 끝이 나고, 궁서체에 투박한 크레딧이 올라간다. 트로트와 어우러져 마치 이 음악의 크레딧인 듯 보인다. 이 투쟁을 지지하는 반주자들의 명단처럼 올라간다.

 

한 사람의 인권을 짓밟으면서 외치는 ‘대의’라는 것이 과연 정의일까. 여성의 인권은 그 말도 안 되는 ‘대의’ 타령 앞에서는 ‘소의’인 것일까. 어떤 것이 대의이며 정의일까. 피해자들이 고발하기 어려운 이유도 이 때문이다. 내가 대의를 해치는 사람인 양 취급하는 사회 때문이다. 갈매기는 육지를 맴돈다. 맴돌며 사람들의 과자를 먹기도 하고 조류 중 나름 친밀한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하지만 육지에 실망한 갈매기는 어디로 날아가야 할까. 우리가 새로운 육지를 만들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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