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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편에 서는 법[法] 무고죄 피의자가 된 피해자를 변론하다 下

※지난 몇 년간 한국 사회에서 첨예한 논쟁이 된 성폭력과 미투 사건들을 맡아 해결해 온 이은의 변호사의 기록, ‘피해자 편에 서는 법[法]’을 연재합니다. 

 

 

당신의 연애는 안전한가요

데이트 초기부터 헤어짐, 이별 후 과정까지 피해자의 눈으로 낱낱이 재해석하며, 데이트폭력이 일어나는 과정을 속 시원하게 보여주며 데이트폭력의 전모를 밝힌 책이다. 책의 전체 구성은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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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 끝에 국민참여재판이 결정되었지만 증인을 부르는 것도 쉽지 않았다. 피해자는 무고죄 혐의만으로 기소된 것이 아니라, 언론출판물에 의한 허위사실 적시 명예훼손죄로도 기소되었다. 무죄 입증을 위해 법정에 불러 심문해야 할 증인들이 여럿 있었다. 자기가 원하는 이득이 없는 이상, 수사기관이나 법정에 기껍게 출석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게다가 당시 이 사건은 언론에서 거의 유죄추정을 받는 수준의 상황이었다. 증인으로 나와주어야 할 사람들에게 무고죄와 명예훼손죄로 기소되어 피고인이 되어버린 피해자가 법정에 나와달라 부탁하고 설득할 상황이나 형편이 되지 못했다. 졸지에 피고인이 되어버린 피해자를 대신해 증인들을 직접 만나 법정에 나와 달라고 설득했다. 이렇게 녹록지 않은 날들이 지나 재판일이 되었다.

 

재판정에는 피고인이 된 피해자를 지지하기 위해 법원을 찾아준 여성단체 분들도 많았지만, 박유천이 억울하게 무고와 명예훼손을 당하였다며 그 주장에 힘을 싣기 위해 온 팬들도 많았다. 서울중앙지방법원 대법정이 자리가 부족할 정도였다. 사람으로 가득한 법정이었지만, 피해자와 단둘이 물 위에 떠 있는 것 같았다. 안면인식 장애가 있어서, 피해자를 지지하러 온 이들과 상대방을 지지하러 온 이들을 구분하지 못해, 쉬는 시간에 화장실 갈 때마다 아무나 보고 벙싯거렸다가 민망해지기도 했다. 사람들의 첨예한 관심과 믿음이 부딪히는 시공간이다 보니 변호사도 평정심을 유지하기 쉽지 않았지만, 피해자는 꿋꿋하게 잘 버텨냈다.

 

이날 증인으로는 박유천을 비롯해서 상담사나 언론종사자 등 여러 사람들이 출석했다. 박유천에 대해서만 4시간 가까운 증인신문이 있었다. 나는 한때 팬심으로 접했던 사람을 법정에서 상대방으로 만나 신문하게 되었다. 그런 소회를 전하며 증인신문을 시작했다. 이날 피해자의 무죄를 입증해 준 1등 공신은 단연 박유천이었다. 긴 질의응답 속에서 피해자가 고소한 성폭행 사건 당시 피해자가 이를 원하였거나 동의하에 성관계를 하였다고 보기 어려움은 진즉 소명되었다. 그에 대한 4시간의 증인신문을 마치고도 여타 절차가 남아있었지만 초조함이 가셨다. 변호사가 돼서 처음 경험하는 국민참여재판은 종일 당황스러운 일들 투성이었지만, 당연한 결론에 가닿을 것이란 믿음이 생겼다. 그 믿음은 몇 시간 지나지 않아 곧 실현됐다.

 

배심원들의 평결은 ‘피해자가 딱하니 그 정도는 봐주자’는 온정주의에 따른 것이 전혀 아니었다. 배심원들도 재판부도 ‘피해자가 무고를 하지도,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다’라는 취지를 분명히 하여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은 새벽에 끝났지만, 함께 연대했던 수많은 여성운동가분들이 법정에 남아있다가 판결을 들었고 도열하여 박수를 보내주셨다.

 

피해자에 대한 책임감으로 사건을 맡았던 날부터 내내 마음 한 켠이 먹먹했고,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며 이 사건이 당연한 끝을 못 보고 끝나면 어떡하나 어깨가 묵직했다. 처음 경험하는 절차 속에서 사건을 이고 지고 관통하느라 심신이 노곤했다. 그러나 무죄가 선고되고, 피해자와 함께 법정을 나와 연대해 준 이들이 보내주는 갈채를 받은 것은 평생 잊지 못할 감동의 순간이었다.

 

▲ 2017년 4월 3일 서울지방법원 앞, ‘유명연예인 박OO 성폭력 사건 공동대책위원회’가 사건 피해자에 대한 명예훼손 및 무고죄의 올바른 판결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성폭력 피해자를 입막음하는 가해자의 역고소를 비판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일다

 

1심에서 무죄가 판결됐다고 다 끝이 아니었다. 그간 피해자가 무고 범죄를 저질렀다는 누명과 낙인을 해소할 만큼의 보도가 부족했다.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되고 항소심으로 넘어가자, 우연인지 알 수 없으나 재판 관련 보도가 있는 날마다 박유천과 ‘재벌 3세’라는 여성 간의 스캔들 기사가 쏟아졌다. 항소심 결심일에 온 모 연예매체 기자들이 판결일에 박유천이 결혼을 할 거라며 무죄 선고 소식이 다시 한번 묻힐 수 있다고 언질을 줬다.

 

“우리 항소심 판결 선고일에 기자회견 할 건데요. 기자회견 한다고 보도해 주십시오.”

 

피해자에 대한 무죄 선고 보도가 또 묻히겠다는 다급함에 일단 이렇게 말했다. 피해자의 억울함에 대한 보도가 나는 날이면 박유천의 스캔들 기사로 묻혔는데, 이날 처음으로 피해자 측이 항소심 판결일에 기자회견을 한다는 보도가 스캔들 기사를 압도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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