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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은 ‘프라이드 먼스’(Pride Month), 성소수자 자긍심의 달이다. 벌써 6월 하순이라 ‘특집’이라는 이름을 붙이긴 애매하지만, 자긍심의 달을 기념하는 마음으로 추천 영상 콘텐츠를 골라봤다. 국내 서비스 중인 OTT플랫폼에서 볼 수 있는 세 작품, 영화 <크러쉬>, TV드라마 시리즈 <나의 직장상사는 코미디언>과 <옐로우재킷>이다.

 

▲ 영화 <크러쉬> 중 페이지와 AJ가 운동장 위에서 이야기하는 모습 ©Hulu

 

영화 <크러쉬>(새미 코헨 감독, 2022, 디즈니플러스)는 일찌감치 레즈비언으로 정체화한 고등학생 페이지의 꿈과 사랑을 다룬 하이틴 로맨스 드라마다. 많은 로맨스 장르가 그러하듯, 예기치 못한 삼각관계 속에서 자신의 진짜 감정을 깨닫는 주인공과 더불어 어떤 성장을 하게 되는 과정이 사랑스럽게 담겨 있다.

 

코미디 시리즈 <나의 직장상사는 코미디언>(원제 Hacks, 왓챠)는 라스베이거스의 여왕이라 불리던 스탠드 업 코미디 계의 전설 데보라 벤스가 공연 중단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SNS에 글 하나 잘못 썼다가 업계에서 내쳐지기 직전의 20대 여성 작가와 같이 일하게 되면서 일어나는 좌충우돌이다.

 

드라마 시리즈 <옐로우재킷>(Yellowjacket, 티빙)은 1996년 뉴저지의 한 고등학교 여성 축구 선수들이 전국대회를 나가기 위해 탄 비행기가 외딴 곳에 떨어진 이후, 19개월 동안 야생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현재(2021년)를 기반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25년이 지난 후에도 끝까지 지난 일을 숨기고자 하는 생존자들의 비밀과 복잡한 관계가 극을 휘몰아친다.

 

이렇듯 장르도, 타깃도, 주요 플롯도 다른 세 작품이지만 모두 다 매력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잘 살펴보면 발견할 수 있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퀴어 배우가 퀴어 캐릭터를!

 

이제는 어떤 작품 속 퀴어 캐릭터를 퀴어로 정체화한, 그러니까 커밍아웃한 배우가 연기하는 걸 보는 건 그다지 드문 일이 아니다. 드라마 시리즈 <포즈>(Pose, 디즈니플러스)에선 다수의 트랜스젠더/퀴어 캐릭터를 트랜스젠더 배우들이 연기했다. <유포리아>(euphoria, 웨이브)에서도, <스타트랙 디스커버리>(Star Trek Discovery, 티빙)에서도, <별나도 괜찮아>(Atypical, 넷플릭스)에서도 퀴어 캐릭터를 퀴어인 배우가 연기했다. 이 리스트에 올라갈 작품은 이제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런 흐름은 <크러쉬>, <나의 직장상사는 코미디언>, <옐로우재킷>에서도 마찬가지다. <크러쉬>는 각본가 크리스틴 킹과 케이시 래컴의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시나리오가 쓰여졌으며, 주인공 페이지를 연기한 로완 브랜차드(Rowan Blanchard)는 ‘오픈리 퀴어’(Openly Queer, 커밍아웃한 성소수자)이며 상대역인 AJ를 연기한 아우이 크라발호(Auli’i Cravalho) 또한 오픈리 퀴어다.

 

배우 로완 브랜차드는 2014년부터 2017년까지 디즈니 채널에서 방영된 <걸 밋츠 월드>(Girl Meets World)의 주인공 라일리 역으로 인지도를 쌓아 올린 일명 ‘디즈니 출신 아역 스타’ 중 한 명이고, 아우이 크라발호는 디즈니 영화 <모아나>의 주인공 모아나를 연기한 또 한 명의 디즈니 스타라는 점도 흥미롭다.

 

▲ 티빙에서 볼 수 있는 <옐로우재킷> 예고편 중 타이사의 과거(고등학생) 모습 (https://youtu.be/YDK8j0Zjyzk)

 

<옐로우재킷>에도 퀴어 커플이 나온다. 비행기 추락과 19개월 간의 고립 속에서 살아남은 생존자 중 한 명인 타이사는 현재 시몬이라는 동성과 결혼을 한 상태이지만, 과거(추락 당시)엔 같은 팀원인 밴과 사귀고 있는 모습이 나온다. 과거의 고등학생 타이사를 연기하는 자스민 사보이 브라운(Jasmin Savoy Brown)과 밴을 연기하는 리브 휴슨(Liv Hewson) 모두 오픈리 퀴어이며, 리브 휴슨은 She나 He가 아니라 They 대명사를 쓰는 논바이너리(non-binary)이기도 하다.

 

<나의 직장상사는 코미디언>은 현재 ‘미국에서 가장 퀴어한 코미디 시리즈’라는 명성(?!)답게 퀴어 배우들로 가득하다. 스탠드 업 계의 전설 데보라 벤스와 함께 일하게 되는 주인공 에이바는 극 중 양성애자로 나오는데, 에이바를 연기하는 한나 아이바인더(Hannah Einbinder) 또한 오픈리 양성애자다. 데보라의 사업 파트너이자 동성애자로 나오는 마커스 역의 칼 클레몬스 홉킨스(Carl Clemons-Hopkins) 또한 오픈리 퀴어며, 마커스의 연애 상대로 등장하는 윌슨 역의 조니 시빌리(Johnny Sibilly), 데보라의 비서인 데미언 역의 마크 인델리카토(Mark Indelicato), 데보라의 블랙잭 딜러인 키키 역의 포피 리우(Poppy Liu), 데보라와 에이바의 에이전시 매니저인 지미의 비서인 케일라 역의 메건 스톨터(Megan Stalter) 모두 오픈리 퀴어다. 칼 클레몬스 홉킨스와 포피 리우는 They/he, They/she 대명사를 쓰는 논바이너리다.

 

키키와 케일라의 경우 극 중에서 섹슈얼리티에 대한 이야기가 명확하게 드러나거나 그려지지 않는다. 하지만 케일라를 연기하는 메건 스톨터는 Out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케일라는 나에게 너무 친숙하다. 케일라가 ‘난 양성애자’라고 하거나 아름다운 여성과 데이트하는 모습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고 말하며, 케일라의 성적지향에 대해 상상의 여지를 열어뒀다.

 

‘요즘 세대’ 여성 청소년/청년들

 

세 작품엔 모두 여성 청소년/청년들이 나온다. ‘너 밀레니얼 세대 아니냐’는 이야기에 발끈하며 “밀레니얼은 40대 아니에요? 전 Z세대!”라고 강조하는 <나의 직장상사는 코미디언>의 에이바도 그렇고, <크러쉬>의 캐릭터들 또한 Z세대다. <옐로우재킷>의 고등학생들은 1996년 배경이기 때문에 지금의 Z세대는 아니지만, 이 세 작품의 퀴어 청소년/청년 캐릭터들은 예전과 달리 커밍아웃에 큰 부담을 느끼거나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드라마 시리즈 <옐로우재킷>(상단), 코미디 시리즈 <나의 직장상사는 코미디언>(하단 왼쪽), 영화 <크러쉬>(하단 오른쪽)

 

<크러쉬>의 페이지는 일찍 자신의 성적지향을 인지했고, 싱글맘인 엄마에게도 이미 다 얘기했다는 설정이라, 오히려 엄마가 페이지에게 레즈비언을 위한 섹스 토이와 성병 예방 기구 등을 선물해 줄 정도다. <나의 직장상사는 코미디언>의 에이바는 데보라가 “너 레즈비언이냐” 묻자 “직장 상사면서 그런 질문하면 안 된다”고 버럭 할지언정 자신이 양성애자임을 숨기지 않고 당당하게 이야기한다. <옐로우재킷>의 경우 199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이 있다 보니 타이사와 밴이 친구들에게 둘의 관계를 드러내지 않으려 하지만, 그것을 엄청난 비밀로 취급하지 않으며 그들에게 크나큰 ‘시련’인 것도 아니다.

 

또한, 이들은 단지 퀴어이기만 한 것도 아니고, 순수하고 때 묻지 않은 ‘어린’ 청소년/청년이기만 한 것도 아니다. <크러쉬>의 페이지는 예술대학에 진학하고 싶은 화가로, 예술의 영감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옐로우재킷>의 타이사는 축구를 통해 좋은 성과를 내고자 ‘정당하지 않은’ 방법을 선택하는 욕망을 드러내기도 한다. 비행기 추락 이후엔 크나큰 위험이 따르지만, 생존할 방법을 찾기 위한 모험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의 직장상사는 코미디언>의 에이바 또한 위기를 맞이한 사회초년생으로, 경력을 쌓기 위해서라면 막무가내로 돌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버니 샌더스(미국 상원의원으로, 2016년과 2020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도 참여. 사회주의자이며 급진적인 정책과 입장을 취함으로써 진보정치를 지지하는 청년들로부터 큰 지지를 얻고 있음)를 지지한다고 적힌 에코백을 들고 다니며, 사막 위에 지어진 카지노와 호텔로 가득한 라스베이거스를 떠나 ‘힙한’ 예술가들로 가득한 LA로 돌아가고 싶어 안달이 난 허세 있는 ‘도시 청년’의 모습도 가졌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때때로 크게 실패하거나 실수하더라도, 누군가에게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 선택하는 10~20대 여성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달콤하고 살벌한, 여성들의 복잡한 관계

 

<크러쉬>, <나의 직장상사는 코미디언>, <옐로우재킷>의 가장 큰 매력은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들 사이에 흐르는 사랑스럽고도 오묘하고 날카로운 긴장감이다. 로맨스 영화인 <크러쉬>엔 아무래도 로맨틱한 감정이 도드라지지만 페이지의 삼각관계 대상인 쌍둥이 자매 AJ와 개비와의 관계, 세 사람의 관계 변화의 포인트들이 흥미롭다. 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흐뭇한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감춰진 비밀과 미스터리를 쫓는 <옐로우재킷>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관계는 긴장감으로 가득하다. 현재까지 살아남은 여성들의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과거에서도 이들의 관계는 시시때때로 뒤틀린다. 누가 적이고 동지인지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서로 기대고 또 손을 잡는다. 자신의 삶, 자신이 가진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 이들은 두려울 게 없다.

 

▲ 코미디 시리즈 <나의 직장상사는 코미디언> 공식 예고편 중 에이바와 데보라의 모습 (https://youtu.be/1qIczW4sv6M)

 

서로 가지고 싶고, 놓칠 수 없는 것을 위해 뭉친 <나의 직장상사는 코미디언>의 데보라와 에이바의 관계도 다이내믹하다. ‘미투 운동’, ‘기후정의 운동’ 등을 경험한 Z세대 여성에게 지구온난화 따윈 관심 없이 자기가 만든 거대한 연못에서 낚시를 즐기며, 오래 전 겪은 성추행 경험을 친구와 웃으며 털어내는 70대 여성의 삶이 탐탁할 리 없다. 에이바와 데보라는 서로의 삶을 쉽게 판단한다. 그렇기에 비즈니스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지만, 이들은 점차 멘토, 멘티가 되기도 하고 세대를 뛰어넘어 우정을 쌓는 모습도 보여준다. 그런데 이 우정이 아름답기만 한 건 아니다. 둘의 관계는 여전히 시험대에 놓인다. 이들의 미래가 더 궁금해 질 수밖에 없다.

 

TV 시리즈인 <나의 직장상사는 코미디언>은 작년 에미상 어워즈에서 코미디 부문 극본상, 연출상, 여우주연상을 휩쓰는 등의 성과를 얻었다. <옐로우재킷> 또한 좋은 반응과 시청률로 후속 시즌 제작이 확정된 상태다. 국내에서도 이 두 작품의 후속 시즌을 계속 볼 수 있기를 바라며. 함께 “해피 프라이드!” (박주연 기자) 

 

[참고 자료]

미국 월간지 Out “안녕 게이들! 전세계의 무대는 <Hacks>의 메건 스톨터를 위한 것” (대니얼 레이놀즈, 2022년 5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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