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극장 앞에서 만나]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 <성냥공장 소녀>
임종린 화섬식품노조 파리바게뜨지회장의 단식이 53일 만에 중단되었다. 노동자의 외로운 단식투쟁은 끝내 시원한 대답 없이 마무리되었다. SPC 파리바게트 측은 아침식사로 노동자들에게 500원 상당의 해피포인트를 지급해 온 것을 비롯하여, 휴일과 휴게시간을 제대로 보장하지 않는 등 부당노동행위와 노동 착취를 해온 것이 드러났다. 임종린 지회장은 보식을 진행 중이며, 곳곳에서 릴레이 단식이 이어지고 있다.
▲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영화 <성냥공장 소녀> 포스터, 1990 |
핀란드 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 중 자본주의를 차갑게 다룬 3부작 <아리엘>(1998), <황혼의 빛>(2006), <성냥공장 소녀>(1990)가 있다. 이번에 다룰 영화 <성냥공장 소녀>에도 한 노동자 여성이 등장한다. 이름은 이리스.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카티 오우티넨 배우다. 카티 오우티넨은 감독의 말 없는 영화들에서 무표정으로 관객들에게 많은 대화를 걸었다.
카티 오우티넨이 연기한 이리스는 성냥공장에서 일을 한다. 영화가 시작하면 검은 화면에 글귀가 나온다. “사람들은 멀리 떨어진 숲속 한가운데서 추위와 배고픔으로 죽을 것 같다.”라는 세르기안 골론, 안젤리카 백작부인의 말이다.
조용하지만, 시끄럽게
이어지는 검은 화면에 크레딧이 뜨고 차가운 겨울바람 소리가 한참 이어진다. 그리고 화면이 켜지면 공장의 기계들이 등장한다. 감독은 성냥의 제조 과정을 길게 보여준다. 기계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컷이 롱테이크로 보인다. 마치 기계가 주인공인 것처럼 주인공 이리스는 한참 뒤에나 등장한다. 자본주의를 냉소적으로 표현하는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은 기계 앞이 아닌 기계 뒤에 사람이 있는, 자본 뒤에 사람이 있는 현실을 컷 연결로 표현했다.
모든 아키 카우리스마키 영화가 그렇듯 영화는 조용하나 시끄럽다. 대사는 20 마디가 채 안 될 정도지만 앰비언스(환경음)와 음악이 귀를 가득 메운다. <성냥공장 소녀>의 오프닝 기계 씬들에서는 기계들의 소음이 가득 찬다. 차가운 기계 소리만 연신 들리고 그렇게 듣고 싶은 주인공의 목소리는 영화 중반부에나 등장한다. 노동자의 목소리를 우리는 언제쯤 들을 수 있을지 영화를 지켜보지만 안타깝게도 이리스의 목소리를 들으려면 공장의 소음을 견뎌야만 한다.
영화 시작 3분 40초가 지나서야 우리는 이리스의 얼굴을 볼 수가 있다. 공장을 배경으로 일을 하고 있는 이리스의 바스트 샷, 원 샷이다. 이리스는 말이 없다. 듣고만 있으면 이리스가 있는 줄, 노동자가 존재하는 줄 모를 것이다. 그저 공장의 소리들뿐이다. (신승은)
[기사 전체 보기] 자본주의는 말을 걸지 않는다 - 일다 - https://ildaro.com/9362
'문화감성 충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달콤살벌한 사랑과 우정, ‘프라이드’ 가득한 영화/드라마 (0) | 2022.06.27 |
---|---|
추앙도 멸시도 아닌, 몸과 기억의 ‘퀴어링’ (0) | 2022.06.14 |
선별검사소 간호사 “우리 모두 역사의 현장에 있었다” (0) | 2022.06.11 |
내가 만난 최승자라는 우주 (0) | 2022.05.20 |
새로 태어난 어머니는 ‘모성’에 갇히지 않는다 (0) | 2022.05.11 |
톰보이는 금쪽이인가요? (0) | 2022.05.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