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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소수자와 돌봄] 동성 파트너를 간병하며 경험하고 배운 것들
2년을 꽉 채워 투병하고, 파트너가 세상을 떠났다. 40대 초반이었던 동성 파트너의 투병 생활을 함께하며, 알고 싶지 않았던 것들이, 깨닫고 싶지 않았던 것들이 나에게 차곡차곡 쌓였다.
나의 파트너 력사는 튼튼한 편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심각하게 아픈 일도 많지 않았고, 그때의 우린, 건강을 걱정하기엔 젊기도 했던 것 같다. 그녀는 건강을 챙기기 위해 홍삼도 먹고 운동도 곧잘 했지만, 그 이상 뭔가를 더 하진 않았다. 아니, 뭘 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발병하기 2년 전, 파트너는 급작스러운 하혈을 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하혈은 꽤 오래 갔고, 응급실과 산부인과 진료를 여러 차례 받았다. 큰 질병이나 원인이 발견되지 않은 채 다행히 하혈은 멈추었고, 이후에는 다시 산부인과에 가지 않았다. 자주 병원에 가서 상태를 확인하라 하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 <돌봄의 시작은 종종 잔소리이다. 돌봄은 상대의 소소한 상태를 관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력사가 잠든 곳 ©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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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2년이 지났다. 언젠가부터, 배가 아프다는 말을 종종 하기 시작했다. 등을 톡톡 치면 배가 아프다는 말에 병원에 가라 했지만, 심하게 아픈 게 아니었기에 병원행은 하루하루 미뤄졌다. 그러던 5월, 작정하고 친구가 의사로 일하는 병원에 찾아갔다. 증상을 묻던 친구는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당장 초음파와 CT 등을 찍어보자고 했다. 집으로 돌아가 일차 의료기관에서 초음파 검사를 하고, 결과를 받고, 이러기까지 한 달여 시간이 걸렸다. 의사는 우리에게 큰 병원에 가볼 것을 권유했다. 큰 병원의 진단 결과도 다르지 않았다. 난소암 4기.
그때까지도 우리는 저 단어의 의미를 잘 알지 못했다. 이런 병을 앓아 본 적도, 간병을 해본 적도 없는 우리는 모든 것이 서툴렀다. 그나마 주변에 가족들의 큰 병을 겪어본 친구들이 몇 있어, 이런저런 조언을 받을 수 있었지만, 당연하게도 우리의 상황과 100% 일치할 수는 없었다.
동성 파트너 관계인 우리였지만, 일차 의료기관에서는 별 무리 없이 같이 들어가서 의사 선생님의 상담을 받곤 했다. 하지만, 대형병원에서는 약간 달랐다. 둘의 관계를 물었고, 가족을 데려오라고 했으며, 가족과 함께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 등본을 떼 가는 것도 아닌데, 친구라고 말한 내 입을 정말 꿰매버리고 싶은 순간이었다. <그냥 가족이라고 해도 된다.>
‘입원’은 익숙하지 않았다. 게다가 우린 응급실을 통해 입원하게 되었는데, 거기에 가서야 내가 ‘보호자’임을 알 수 있었다. ‘보호자’라니. 내가 이이의 보호자가 맞긴 한데, 내 명칭이 보호자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 ‘보호자’라는 타이틀을 나의 것으로 가져가야 한다는 커다란 의지와 확신을 했다. 그리고 그 결심은 이후 2년 동안 많은 것들에 영향을 미쳤다.
병원에서는 ‘법적 보호자’가 아닌 나를 크게 배척하지는 않았지만, 심각한 이야기를 할 때면 거듭거듭 어머니를 모셔올 것을 제안하곤 했다. 나는, 존재와 몸짓으로 내가 보호자임을 끊임없이 알렸다. 주도적으로 궁금한 것을 묻고, 방향을 묻곤 했다. 어차피 이 병원에 하루 이틀 다닐 것이 아니니, 내가 보호자임을 계속 주지시키는 것이 중요할 뿐이었다. 실제로 어느 순간 이후에 의사는 더 이상 어머님을 제안하지 않기도 했다. <병원이 ‘내가 보호자’임을 인식하게 하는 것은 다음 스텝을 논의하고 현재 상황을 알아야 할 때 정말 중요하다.>
‘보호자’의 일들, 시작도 끝도 없는
암으로 투병을 한다는 것은, 내가 생각했던 이상으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항암 약이 독하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머리카락이 숭덩숭덩 빠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어찌 말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가발을 맞추고 싶어 하는 그녀를 위해 적당한 업체들을 찾고 예약하는 것부터가 내 일의 시작이 되었다.
병원에 주기적으로 다니고, 치료를 위한 하루하루를 보내며, 이 돌봄이 대부분의 동성 커플에게는 정말 어렵거나 불가능한 일임을 깨달아 갔다. 병원 예약 시간은 내 마음대로 정할 수가 없었고, 환자의 상태는 예측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어느 날은 갑자기 열이 났고, 어느 날은 또 평소처럼 잘 움직이기도 했다. 이 모든 상황을 알고 대응하기 위해서는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하는 것이 필요했다. 나는 다행히 동료들이 상황을 이해해 줬고, 재택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도 가능했지만, 일반 회사에 다니는 이들이라면 절대 불가능할 일들이었다.
보호자가 1인이라면 더 어려우리라는 것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우리는 하루 세끼를 요리해 가며 살아왔던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아침에 일어나 음식을 만들고, 또 그것을 치우고, 또 새로운 음식을 만드는 그 행위만으로도 지쳤다. 병원에 가야 하는 날은 차가 없어 택시를 부르고 또 불렀고, 응급실에 가야 했던 날은 택시가 빨리 잡히지 않음을 원망하기도 했다...
[기사 전체 보기] 예상치 못했던 파트너 돌봄이 나에게 왔다 - 일다 - https://ildaro.com/9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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