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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두 가지 재밌는 집 이야기 『네가 좋은 집에 살면 좋겠어』
코로나19 확산 이후, 네팔의 ‘일하는 아동’ 실태 르포 (하편)
2021년 12월 13일부터 올해 초까지 20여 일간, 네팔에서 70명의 아이들을 만났다.
나는 <바보들꽃>이라는 단체 소속으로, 네팔의 어린이노동자에게 학교에 다닐 권리를 보장하고 인권을 보호하는 ‘희망의 언덕’ 프로젝트를 진행해오고 있다.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은 아주 어릴 적부터 가사와 살림과 육아를 비롯해 각종 노동 현장에서 일한다. <바보들꽃>은 그들의 부모를 설득해 아이들이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돕고, 가정과 일터에서 학대나 성폭력 피해로부터 보호하는 활동을 해왔다.
코로나19 펜데믹으로 인해 해외 출장이 여의치 않게 되었으나, 점점 더 악화되는 네팔의 상황을 보며 아이들과의 만남을 더이상 늦출 수 없어 1년 11개월만에 네팔로 향한 것이었다. 현지 간사 두 사람과 함께, 우리는 마스크 30개~50개, 소독젤 2개, 책 3-5권, 사탕과 비스킷, 그리고 달걀 한 판으로 구성된 방문 키트를 만들고, 코로나19 여파가 큰 수도 카트만두와 위성도시인 랄릿뿌르, 벅다플 3개 지역 아이들과 그들의 가정을 방문했다.
▲ 돈을 벌기 위해 시골에서 도시로 온 여성들은 그나마 일자리를 내주는 건설 현장에서 일용직으로 일하는 경우가 많다. (사진은 코로나19가 시작되기 전에 찍은 것으로 기사에 등장하는 인물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바보들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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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딸을 데려가 주시겠어요?”
9살 우뻐쓰나의 아버지는 낮은 목소리로, 만난 지 채 10분도 되지 않은 우리 일행에게 말했다.
“우리 딸을 데려가 주시겠어요? 저는 아이를 돌봐줄 능력이 없어요.”
네팔에 방문할 때마다, 가끔 삶이 경각에 달렸다고 생각하는 가족들로부터 아이들을 데려가 달라는 부탁을 받곤 했기 때문에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다. 이 사람이 정말 힘든가 보다 짐작만 할 뿐이다.
우뻐스나의 아버지 샤얌 시레스타는 올해 34세로, 젊은 축에 속한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삶에 지친 피로감이 깊게 배어 있어, 한 50대 중반쯤으로 보였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왼쪽 눈을 볼 수 없었다고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오른쪽 눈으로는 사물의 형체를 어느 만큼 분간할 수 있었다. 대부분 소리로 많은 것을 알아채지만, 아른거리는 형체라도 알아볼 수 있다는 사실은 그에게는 천운에 가까웠다. 우리가 처음 방문한 그 날도 그는 방(월세 26,000원)의 열쇠 구멍을 찾지 못해 몇 번을 시도한 후에야 겨우 문을 열어젖혔다.
샤얌 씨는 10년 전쯤 아내 수니타 씨를 만났다. 두 사람이 결혼한 지 얼마 후, 딸 우뻐쓰나가 태어났다. 샤얌 씨는 장애가 있었으나 아내와 딸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계절에 따라 길거리에서 딸기도 팔고, 파란 잎채소들을 사다가 팔았다. 그가 노상에 펼쳐 놓고 파는 야채들은 다 합해야 5,000원을 넘지 않았다. 밑천이 없으므로 많은 야채를 내놓을 수도 없거니와, 좌판에서 경찰에라도 쫓길 때면 더이상 무거운 짐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걸 팔아서 하루 남은 돈은 고작해야 1,000원에서 많아야 2,000원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그는 가족의 일용할 양식을 마련하기 위해 일이 힘든 줄도 몰랐다고 했다.
▲ 카트만두 시내 모습. 코로나19 시기에 빈부 격차는 더욱 심화됐다. 일자리는 급격히 줄었는데, 물가는 계속 오르고 땅값도 치솟아 임대료를 부담하지 못하게 된 사람들이 외곽으로 밀려나고 있다.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온 가난한 사람들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아가기도 벅차다. ©바보들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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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몇 해 전, 아내 수니타 씨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병원에서 암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없는 살림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약을 써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2021년 봄부터 수니타 씨의 통증은 손 쓸 수 없는 정도가 되었고, 병원에 입원했다. 샤암 씨는 어린 딸을 친척에게 맡기고, 대부분의 시간을 아내 간병을 하며 병원에서 지냈다.
수니타 씨는 작년 11월 중순에 사망했다. 아내를 보내고 일주일이 지났을 때, 딸 우뻐쓰나는 지나가는 뺑소니 오토바이에 치여 어깨를 다치기도 했다.
우리가 방문했던 지난 12월 16일은, 수니타 씨가 세상을 떠난 지 겨우 한 달이 지난 때였다. 아내가 떠난 후 샤암 씨는 친척 집에 맡겨둔 우뻐쓰나에게 어머니가 사망했다는 말을 전하지도 못한 채 방황하고 있었다.
“엄마가 가버렸다고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침울한 얼굴로 샤암 씨가 말했다.
“저에게 쥐약을 주세요”
꾸마리 카플레 씨가 아이들과 함께 앉아 있는 모습은 마치 할머니와 손녀들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할머니가 아니라 아이들 엄마라고 말했다.
네팔에서 결혼연령은 낮다. 특히 여성의 경우 더더욱. 대부분의 여성들은 20대 초반이면 아이를 낳는다. 그런데, 그녀는 사십이 넘는 나이에 첫 아이를 낳았다고 했다. 정말 드문 경우였다.
▲ 일터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 시간에 아이를 달래는 엄마의 모습. 끼니를 잇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하고, 육아를 맡길 곳은 없기 때문에 아이를 데리고 일하러 다니는 여성들이 많다. (사진은 코로나19가 시작되기 전에 찍은 것으로 기사에 등장하는 인물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바보들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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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마리 씨는 올해 50세가 되었다. 사실 많은 네팔 사람들이 자신의 나이를 잘 모른다. 꾸마리 씨도 자신의 나이에 대해 확신할 수가 없지만 50세쯤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녀에게는 가족이 없다. 사실 가족이 있는지 없는지도 확실히 모른다고 했다. 그녀가 기억하기로는 5세인가 6세가 되었을 때 엄마와 함께 살았고, 일을 준다는 어떤 여자를 따라 버스를 탔던 기억이 있다고 했다.
아동 인신매매가 많이 일어나는 네팔에서는 경찰들이 아이와 함께 버스에 탄 사람들을 검문하는 경우가 있다. 버스에서 여자는 경찰에게 끌려갔고, 꾸마리 씨는 경찰들이 보낸 구호소에서 몇 년을 살았다고 한다. 8세인가 9세쯤 되었을 때 그곳을 도망 나와서 이후 거리에서 살았다. 그녀는 쓰레기를 뒤지거나, 작은 식당 등에서 그릇을 씻으며 살아남았다고 했다. 일하면서 주인에게 맞는 날도 많았다.
12살 무렵에는 처음 월 3,000원 하는 방을 마련해 살기도 했다. 그렇게 삶을 이어가다 마흔이 가까울 무렵에 한 남자를 만났다. 그는 자신에게 아내가 있다는 걸 말해주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꾸마리 씨가 아이를 가진 후였다. 기댈 곳이 없는 채 임신을 한 꾸마리 씨는 그래도 그 남자가 좋았고, 연이어 딸 둘을 낳았다. 아이들은 현재 일곱 살(꾸슘 카플레), 여섯 살(쿠시 카플레)이 되었다.
아이 아빠는 자주 볼 수 없었지만 꾸마리 씨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2021년 8월 어느 날, 그가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꾸마리 씨는 그 후 약간은 넋이 빠진듯한 상태에 이르렀다. 자주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그녀는 그것을 실행에 옮겨야겠다고 결심했고, 약방으로 갔다.
“쥐약을 주시겠어요?”
그녀는 약방 주인에게 말했다.
“지금 그 약 당신이 마시려고 그러는 거지요? 당신에게 쥐약을 팔 수는 없어요.”
약방 주인은 그녀를 유심히 쳐다보더니, 그녀에게는 쥐약을 팔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아무리 힘들어도 죽으면 안 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약을 사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에, 문득 자신에게 딸 둘이 있다는 것을 기억했다는 꾸마리 씨. 다시금 살아야겠다는 각오를 했다.
2021년은 그녀에게 너무 힘든 해였다. 아이들 아빠는 죽고, 의지할 데라곤 없이 어린아이 둘을 키우는데, 임대료는 높아지고 방값도 지불하지 못해 살던 곳에서 쫒겨났다. 지금 살고 있는 집도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최근에 겨우 일하기 시작한 식당에서는 새벽 5시부터 저녁 6시까지 일해도 고작 한 달에 30,000원만 주겠다고 한다. 꾸마리 씨는 어린 딸들을 학교에 보낼만한 돈도 없어서 항상 일터에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기 때문에 괜찮은 일자리를 얻을 수 없다고 했다. 거기다 그녀는 멍하게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자기도 모르게 정신이 나간 것처럼 앉아 있을 때가 있다고…. 기계처럼 일하기를 바라는 업주 입장에서는 이런 꾸마리 씨가 반가울 리 없을 것이다.
▲ 아침 일찍 물을 길어 동이를 이고 가는 여성. 물 부족 문제가 심각한 네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먹고 마시고 씻는 일상에도 품이 많이 갈 수밖에 없다. ©바보들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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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바닥 사람들이 겪는 굶주림의 전쟁
이번 겨울, 네팔을 방문해서 만난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은 흡사 전쟁을 겪는 것과 같아 보였다. 코로나 펜데믹이 장기화되면서 일자리는 확 줄어들었는데, 물가는 오르고 임대료마저 솟구쳐 자원이 없는 사람들의 삶은 주변으로 더 주변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거기에 몸이 아프거나 사고라도 당하면, 당장 굶주림의 늪에서 헤어날 길이 없게 된다. 생명이 경각에 달려있는 이들도 있었다.
우리가 만났던 70명의 아이들과 그 가족들은 모두가 상황은 각기 조금씩 달랐지만, 살아낸다는 것이 얼마나 고달픈 일인지 아이들은 몸으로 겪고 있었다. 언제 쫒겨날 지 모르는 도시의 한 구석에서 굶주림과 싸우고 있는 아이들과 그 가족들을 만나면서, 가난한 자들의 고통은 모두 소리 없이 외롭게 세상에서 방치되는 구나 싶어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러나 이들의 삶이 끝내 버려지지 않도록, 세상의 곳곳에서 연대의 손을 내밀어줄 사람들이 있으리라는 희망을 나는 아직 품고 있다.
[필자 소개] 김요한, 3세계의 일하는 어린이들의 실태를 조사하고 교육의 기회와 인권을 보호하는 단체 <바보들꽃> 간사. 재난 시 긴급구호가 필요한 이들을 현지 간사들이 방문, 지원하고 있다. 문의: 02-337-1978 이메일: merosathi@naver.com
후원계좌: 국민은행 438901-01-300620 (바보들꽃) 정기후원 약정: https://url.kr/yuts6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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