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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에는 없는 머시기마을 이야기⑥ 2021 ‘글파티’-우리가 이어 말한다

 

H에게. 안녕? 잘 지내니. 쌀쌀한 날씨에 내복은 두툼하게 잘 입고 다니는지 궁금하다. 너는 자주 추위가 싫어서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말했잖아. 우리 집 앞 내리막에 빙판이 얼어 있을 때마다 나는 너희 집 앞 골목의 자주 어는 계단을 생각해. 조심조심 몸을 틀어서 내려가고 있을 너의 발걸음도. 너는 커피도 자주 흘리고 넘어지기도 잘하지. 혼자 밤에 길을 걷다가 골목에서 넘어졌을 때, 그 밤이 그렇게 서럽고 외로웠다는 말이 떠올라서 네 생각이 났어.

 

지방의 퀴어로 살면서 안전한 동료들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네 말도 덩달아서 기억났어. 네가 사는 고장의 교회 앞 버스정류장에 서 있으면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차별금지법 제정되면 모두 에이즈에 걸린다”는 말을 한다고, 쉽게 하는 말들이 마음에 박혀서 집에 가는 버스 안에서 울컥했다고 했지. 전화로 그 말을 들었을 때 마침 나는 작년 11월 7일에 열린 머시기마을 글파티에 너를 초대하고 싶었어. 너에게 머시기마을 사람들을 소개해주고 싶었어. 아마도 머시기마을 사람들은 너를 “젊은이”, “○○지역 사람”, “퀴어”가 아니라 네 이름을 물어본 뒤 있는 그대로 불러줄 것 같았거든.

 

▲ 2021년 11월 7일 광주시 송정마을카페 ‘이공’에서 열린 머시기마을 ‘2021 글파티- 우리가 이어 말한다’ 현장. 사진만 봐도 에너지가 넘치고 웃음이 나지 않니?   ©기은

 

아쉽게도 너는 직장 때문에 글파티에 오지 못했지만 나는 너에게 당시 현장의 기운을 전해주고 싶었어. 특파원처럼 사진도 여러 장 찍었고 이렇게 편지도 썼어. 머시기마을 글파티 소식이 너에게 흥미롭게 들렸으면 좋겠다.

 

‘2021 글파티-우리가 이어 말한다’는 광주에서 진행됐어. 원래는 나와 기획팀 친구들이 이길보라 감독의 책 『당신을 이어 말한다』(동아시아, 2021)를 가지고 북토크를 기획했는데, 기존의 독자/작가로 나뉘는 북토크 방식 대신 새로운 방식을 실험해보고 싶었어. 고민 끝에 ‘글파티’를 생각해냈지. 글방이나 글쓰기 수업에서 쓰는 과제든, 현업으로 쓰는 기사나 칼럼이든, 매일 쓰는 일기든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언어를 글로 쓰는 사람인 것 같았거든. 너는 지방에 사는 청년의 이야기를 쓸 수 있고 나는 비진학 청년의 이야기를 쓸 수 있잖아. 기획팀에서는 그 가능성이 타인과 타인을 연결하는 실마리처럼 보였어. 각자의 글을 들고 모여서 나누자는 초대장을 사람들에게 보냈어.

 

두 가지 원칙을 더 정했어. 첫 번째는 좀 더 배리어컨셔스(barrier conscious: 사회적 소수자에게 물리적, 제도적, 심리적 장벽이 존재함을 인지하고, 그것을 허무는 노력)한 행사를 기획하자. 두 번째는 탈서울, 탈중심주의를 시도하자. 청년허브에서 진행한 2021 청년팝 지원사업에서 예산을 받아서 수어 통역사를 섭외했고 서울 대신 광주로 장소를 정했어. 광주의 송정마을카페 이공은 비건 메뉴와 음료가 있고 휠체어가 들어올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어. 성중립 화장실도 있지. 감사하게도 송정마을카페 이공 공간을 대관할 수 있었고 그 장소를 기반으로 행사를 준비했어.

 

페미니즘 행사나 북토크 행사를 전에도 기획해본 적 있지만, 배리어컨셔스를 중점으로 둔 행사를 기획해본 적은 없어서 애를 먹었어. 사업 예산에서는 수어가 언어로 인정되지 않아 통역비가 아닌 기타 전문가 비용으로 기재해야 했고, 인스타그램에서 시각 대체 텍스트를 입력하기 위해 처음 보는 기능을 공부했어. 덕분에 행사를 다양한 각도로 고민하며 준비할 수 있었어. ‘청인과 농인 모두 얼굴을 볼 수 있도록 둘러앉는 구도로 의자를 배치하면 어떨까? 음성언어뿐만 아니라 필담을 나눌 수 있게 종이와 펜을 나눠주면 어떨까? 모니터를 뒤에 설치해서 글자를 읽을 수 있도록 하면 어때? 비건 쿠키와 음료를 준비하자!’ 그런 의견을 활발하게 나눴어. 낯설고 긴장도 있었지만, 이 모든 시도가 꼭 필요했던 일이었구나 생각해.

 

▲ 이왕이면 행사 장소에선 필담을 사용하자고 했어. 종이 위 글자와 손짓, 몸짓에 집중하게 되는 시간이었어.   ©기은

 

행사 당일은 가을임에도 날이 더워서, 하필이면 두꺼운 니트를 입고 온 데다가 행사 준비로 이곳저곳 돌아다녔던 나는 땀을 무지 흘렸어. 초대장을 받은 머시기마을 친구들 혹은 그들의 친구들이 광주 송정에 도착했어. 광주에 처음 온 친구도 있었고 기차를 3시간 타고 온 친구도 있었어. 처음 만나는 친구들도 많았지만, 이미 글을 온라인에서 미리 공유한 채로 만났으니 내심 친밀한 마음도 있었던 것 같아.

 

광주 사람인 짱돌은 이런 피드백을 남겨줬어. <저는 광주에서 살고 있고, 늘 오가던 곳이라 편하게 도착했어요. 다른 분들이 전국각지에서 모였다는 걸 알고 놀랐어요. 다들 이런 만남을 원하고 있었을까 하는 상상으로 놀랍기도 했고요. 어떻게 알고 왔을까, 하는 궁금한 마음에서의 놀라움도 있었어요. 이 만남을 위해 다들 먼 길을 건너왔구나 싶은 마음과 저도 서울에서 진행되는 공연,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고생고생했던 장면이 거울처럼 비쳤어요. 제가 사는 지역에서 모이니까 생경하더라고요.>

 

행사 시작 시간이 되자 모여서 인사를 나눴어. 몸짓으로 오늘의 기분을 표현하고 이름표를 보여주며 자기소개를 했어. 이때 ‘밀링’을 했는데 반응이 좋았어. 밀링이란 공간을 천천히 걸어 다니면서 나의 발끝을 바라보고 서로의 눈을 마주보며 교감하는 것을 말해. 누군가와 마주치면 눈인사를 하고 눈빛을 주고받아. 오롯이 상대에 집중해야만 인사의 시작과 끝을 알아챌 수 있어.

 

쑥스럽고도 떨리는 순간이 다가왔어. 자신이 쓴 글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시간이었어. 발표하듯 전체 앞에서 한 사람의 글을 낭독하는 현장은 아니었고 2~3명씩 자연스럽게 편한 자리에 나눠 앉으면 준비한 글을 나머지 사람에게 소리 내어 읽어줬어. 이별에 관해서, 사랑과 우울감에 관해서, 동물권과 지구에 관한 이야기와 장애, 퀴어, 소수성에 관해 들을 수 있었어.

 

참가자 해랑은 이런 후기를 이렇게 남겨주었어. <글로 처음 만난 사람들을 실제로 만났다. 곳곳에서 모인 사람들이라 곳곳의 느낌이 났다. 각자가 특색있게 빛나는 모습이었다. 만나기 전에 읽은 글과 만나고 난 후의 글은 참 많이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겠다 싶었다. 나는 아직도 내 권리를 제대로 주장하지 못하는 사람인데, 이곳에서는 마음껏 연습할 수 있도록 해줘서 좋았다. 필담으로, 눈빛으로, 몸의 움직임으로, 음성으로. 우리는 잠깐 헤어졌다가 다시 마주치고는 했다. 안과 밖이 서로 다른 모양을 그리며 돌았다.

 

처음 이 마을이 생기도록 하게 된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지만 저마다의 방식으로 저마다의 몫을 들고 만났다. 우리는 기뻐할 수 있을 때 기뻐하고, 울고 싶을 때 울고, 가끔은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걸 참으며 서로와 함께했다. 이 공간과 이 만남과 이 감정들이 오래도록 그리울 것 같다. 건네받은 쪽지에 적힌 말처럼 우리는 언어로만 소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눈으로, 침묵으로 함께할 수 있는 방법을 배웠다. 정말로 우리가 이어 말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어 말하다보면 내가 한 말이 또 나에게로, 기쁨으로, 위로로, 타인의 언어로 돌아올 것이다.>

 

▲ 가운데 자리에서 발언하는 머시기마을 친구. 다양한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고 집중하느라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어.   ©기은

 

글을 깊이 읽는 시간을 마치고, 함께 둘러앉았어. 읽은 글을 바탕으로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도록 가운데 자리를 비워뒀어. 오늘 글파티에서 느낀 마음들을 이야기하거나 다른 사람의 글을 듣고 느낀 점, 글을 낭독할 때 들었던 생각들을 말할 수 있었어. 고백하자면 나도 가운데 자리에서 이야기했어. 오래된 이별에 대한 글을 써갔거든. 자연히 내 이야기를 하게 됐어. 원래 우는 일이 잘 없는데 사람들이 경청하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눈물이 나면서 목소리가 떨리더라.

 

“저는 제가 여성을 사랑하는 여성이라는 걸 경험하게 해준 친구에 대해 썼어요. 상대방도 저도 서로를 사랑하는데 퀴어임을 인정하기 무서워서 긴장하다 오히려 상처를 주고 끝냈어요. 그 친구가 사랑스러운 것을 세상에 자랑하고 싶었는데 어디 가서 말할 수 없어서 서러웠어요. 서로가 이성애자였으면 좀 달랐을까 싶고요. 2년이 되어가는 일이니까 다 지나간 사건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글로 쓰고 가져왔는데, 소리 내어 읽으면서 목이 멨어요. 나는 아직 슬프고 그 여자가 예뻐요. 이렇게 말하는 순간이 전에는 없었던 것 같아요. 그립다고 말하는 게 필요했어요.”

 

주위에서 훌쩍이는 소리와 손수건 꺼내는 소리를 들었던 것 같아. 하고 싶은 말을 무작위로 5분쯤 하고 나니 그제야 시야가 트이더라. 사람들의 얼굴이 보였어. 가장 인상적인 순간이었어.

 

다른 친구들도 이야기를 이어갔고 원래 마치기로 한 시간이 훌쩍 다가왔어. 각자 준비해 온 선물을 나누고 카페 이공 공간을 정리했어. 곧 예약한 열차 시간이 다가오는 친구들은 아쉬워하며 서로 인스타 아이디를 주고받았어. 포옹하고 인사를 나눴던 참가자 보말은 이런 후기를 남겨줬어.

 

<나는 이상한 사람들을 좋아한다. 그 이유는 아주 이기적인데, 그들 곁에선 안 이상한 척을 안 해도 돼서 그렇다. 거기에 한술 더 떠 자기의 이상함을 잔칫상처럼 차려놓고 나눠 먹는 그런 모임이 있다면 당장 가야 한다. 그 분위기를 먹고 오랫동안이나 든든해짐을 여러 차례 느꼈기 때문이다. 이상하면서도 진솔하고 다정한 모임, 한 장소에 묶이지 않은 데다 어떤 다양성도 소외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모임이라니. 그게 바로 머시기마을 글파티였다.

 

글파티에 다녀와서 달라진 것 중 하나는 나의 글을 더욱 기대하게 된 것. “글을 쓰고 있어...”라고 쭈뼛쭈뼛 말하지 않고 뻔뻔하게 “궁금하지? 읽어!” 말하게 됐다. 또 하나는 잘 보이지 않는 곳에 놓이는 존재들을 챙기는 힘이 한 뼘 자라난 것. 기억에 선명히 자리한, 내가 언제든 가서 비비대도 문제없을 것처럼 반짝거리는 친구들 말고, 아른아른 뒷걸음질 치는 이들에게 직접 만든 연말 선물을 보내 봤다. 그들이 자기 삶에서 실제로 그런지는 알 수 없다만. 나의 세계 가장자리에서 다양성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난잡하게 둘러 살펴야지, 다짐하며.>

 

▲ 머시기마을 글파티 현장. 글과 말을 통해, 서로의 다름을 마주할 수 있는 자리였어. 상기되고 다정한 분위기가 느껴지니? ©기은

 

글파티를 기획했던 친구들과도 인사를 나누고, 서울로 올라가는 기차를 탔어.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어. 오래된 슬픔을 다시 느끼고 돌아와서인지, 기획한 행사를 다 마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새로운 일을 시작해 볼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어. 다음 머시기마을 행보를 기획하고 싶단 생각도 들었고, 몇 년 전에 접었던 시 쓰기를 다시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네가 다음에 머시기마을을 만난다면 어떨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어떤 경험을 하게 될까?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속상한 이야기, 기쁜 이야기들을 실컷 하고 가지 않을까. 언제 어디서 다음 머시기마을 활동이 이어질지는 모르겠지만 금방 또 함께 할 수 있길 바라며, 머시기마을에 초대해. 글파티 이야기가 너에게 관심 있게 들렸길 바라. 좋은 저녁 보내. 동료 하윤이가. 

 

[필자 소개] 하윤: 글 쓰고 곡 쓰는 사람. 비진학 청년이다. 농담을 잘하고픈 퀴어.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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