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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만찮은 그녀들의 이야기] 호랑이와 곶감

 

옛이야기에서 <호랑이와 곶감>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옛날에 어떤 집 아이가 어찌나 우는지, 그치게 하려고 “애비 온다!”, “호랑이 온다!”며 겁을 줘도 소용없더니 “옛다, 곶감.” 한 마디에 울음을 뚝 그쳤다. 마침 방문 밖에 있던 호랑이가 이 소리를 듣고, 곶감이 자기보다 무서운 놈인 줄 알고 지레 달아났다는 이야기다.

 

‘한국구비문학대계’에만도 100편 넘게 실려 있고, 나도 어렸을 때 누군가에게 들었다. 무시무시한 호랑이가 아기 울음을 이렇게 무서워하다니 얼마나 안심이 되던지. 덕분에 지금까지도 문풍지 울던 한겨울밤이 두려움보다 아늑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 하얀 소의 해(辛丑年)가 가고 검은 호랑이의 해(壬寅年)가 왔다. 우리에게 너무도 친숙한 <호랑이와 곶감> 설화를 긴긴 겨울밤을 보내고 새봄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읽어보자. (이미지: pixabay)

 

그런데 여기까지는 아기 버전이며, 이야기의 프롤로그에 해당한다. 호랑이는 달아나지 않았고, 주인공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긴긴 겨울밤의 이야기는 울던 아기가 잠든 뒤에야 시작된다.

 

‘아, 저 내 카면(보다) 더 무서분 곶감이 있구나!’

카면서 호랑이가 인자 마, 착, 슬슬 가가지고 소막(외양간) 위에 가가지고 턱 누바 있으니까, 도둑놈이 도둑질을 하러 와가지고 그래 인자 소 있는가 싶어서 (...) 이래 더듬으니까 뭣이 번질번질 하거든요.

(한국구비문학대계, 2015년 경남 창녕군 우화자의 이야기)

 

진짜 이야기의 주인공은 소도둑이다. 소의 기운을 제압할 정도로 강인할 뿐 아니라 소가 뻗대지 않고 순순히 따를 만큼 유연하고 영리할 테지만, 도둑질로 먹고 사는 건달이다. 소를 노린다는 점에서 반갑잖기로는 호랑이와 매한가지 인물이다.

 

도둑놈언 (...) 그것이 송아진 줄 알고 그놈에게 올라타가지고 궁뎅이럴 탁 쌔려서 바깥으로 몰고 나갔다. 호랭이넌 저헌티 겁 없이 올라타넌 것이 아매도 꽂감인가보다 (...) 이놈한테 붙잡혔다가넌 큰일나겄다 하고서 이것얼 띠어 버릴라고 (...) 자꾸만 뛰었다. 뛰면 뛸수록 이 소도둑놈언 거기서 떨어지지 않을라고 그 잔등얼 꽉 붙잡고 안 떨어질라고 힜다.

(『한국구전설화: 전라북도편1』 임석재전집7, 1915년 전북 순창군 김영준 외의 이야기)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두 도둑은 한 몸이 되고 말았다. 호랑이는 곶감을 떨구려고 날뛰고, 소도둑은 훔친 소를 놓치지 않으려고 더욱 들러붙는다. 공포에 사로잡힌 호랑이는 정신줄을 놓고 밤새도록 사나운 북풍을 이끌며 내달린다. 아기가 잠든 방의 창호지 문 너머로 바람소리는 점점 거칠어지고, 한겨울밤은 깊어만 간다.

 

날이 새서 훤허게 됐다. 소도둑놈이 봉께 이때껏 지가 타고 있넌 것이 송아지가 아니고 생각지도 않은 호랭이럴 타고 있어서 (...) 겁이 나서 (...) 마침 호랭이가 큰 나무 밑이로 지내가서 그때에 나뭇가지를 붙잡고 (...) 뛰어내렸다. 그러고 그 나무으 홈통 속으로 들어가서 가만히 숨어 있었다.

 

긴 밤이 지나고 날이 밝았을 때 소도둑이 움켜쥔 것은 나뭇가지다. 날뛰는 호랑이가 사나운 겨울바람이라면 나뭇가지는 움트는 봄을 상징한다. 그러나 봄은 아직 어리고 위태로우므로 소도둑은 곧바로 구새 먹은 나무통 속에 들어가 웅크린다.

 

호랭이넌 무서운 꽂감얼 띠어 버려서 또 달라붙지 않게 헐라고 (...) 숨얼 뻘떡거림서 뛰어가넌디 가다가 곰얼 만났다. 곰이 보고서, “너 왜 그렇게 급허게 도망치냐?”고 물었다. 그렁께 호랭이넌, “야야 암말도 말라. 큰일났다. 꽂감헌티 붙잡혀서 하마트먼 죽을 뻔힜다. (...) 곰언 그 말얼 듣고 (...) 허허 웃임서, “야 그건 (...) 사람이다 사람. 그까짓 것 겁내각고 그러냐? (...) 내가 앞장서서 갈 팅게 너넌 뒤따러 오너라. 그러고 나 허넌 것얼 봐라.” 그러고 험서 호랭이럴 뒤따라 오게 허고 갔다.

 

새아침이 밝았지만 호랑이는 여전히 한겨울의 어둠 속에 머물러 있다. 그의 공포는 처음부터 실체가 없었음에도 걸음을 멈추고 대면하지 못한 탓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이른 봄 아침 햇살 아래 드러난 맹수는 어젯밤과 같지 않다. 거대한 아가리와 날카로운 발톱은 맹위를 잃고 말았다. 그 때 나타난 것이 선잠에서 깬 곰이다.

 

곰언 호랭이보고, “야 너넌 나무 밑둥거리럴 파서 나무럴 넘어뜨려라. 나넌 우그 올라가서 그놈이 못 도망가게 홈통 구녁얼 막을란다” 허고서 나무에 올라가서 홈통 구녁에 궁뎅이럴 대고 덜썩 앉었다. 소도둑놈언 나무 홈통 속에 들어앉아서 (...) 어찌야 살꼬 허고 궁리를 허고 있넌디...

 

겨우내 자느라 지난밤의 맹렬함을 알 리 없는 곰의 눈에 소도둑은 그저 먹잇감일 뿐이다. 더구나 소도둑이 제 발로 들어간 썩은 나무통은 겨울잠을 자는 곰으로서는 속이 훤한 곳이다. 이참에 겁에 질린 호랑이를 제치고 산중의 왕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으니 망설일 것이 없다. 하지만 곰은 이 좋은 기회를 잡지 못한다.

 

봉께 곰으 붕알이 축 늘어져서 나무 홈통에 달랑달랑허고 있었다. 소도둑놈언 (...) 옳다, 됐다 험서 허리끈얼 풀러각고 곰으 붕알얼 꽉 쨈매서 심껏 잡어댕겼다. 그렁께 곰언 “아이구우, 나 죽네, 아이구우, 나 죽네” 험서 죽겄다고 큰 소리럴 질렀다. 호랭이가 그 소리럴 듣고 놀램서, “거 봐라, 내 뭐라더냐? 꽂감헌티 붙잽히면 죽넌다고 그만큼 말허잖더냐? (...) 에따! 나넌 살어야겄다”험서 막 뛰어서 도망쳐 가버렸다고 한다.

 

미몽에서 깨지 못한 검은 곰은 정(精)의 고갱이이며 생명의 근원인 불알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리고 백수의 왕은 공포라는 귀신에 씌어 끝내 썩은 나무통조차 들여다보지 못한 채 겨울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홀로 눈을 뜨고 있었던 소도둑만이 어둠의 정체를 끝까지 바라보고 살 길을 찾아낸다. 그는 죽음의 질주에 이어 숨통을 막는 어둠 속에서도 기어이 살아남아 소 대신 곰을 잡았다. 남의 소나 훔치던 건달이 범의 기운을 타고 곰의 정기를 손에 넣으며 기백이 넘치는 사람으로 성장한 것이다.

 

승리자가 된 소도둑의 가장 큰 소득은 무용담이다. 곰 가죽을 덮어쓰고 불알(방울)을 흔들며 북풍 속에서 걸어 나온 자라면? 그의 이야기는 신화가 되고도 남는다. 방울은 환웅이 하늘에서 들고 내려온 세 가지 천부인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지금도 무구(巫具)로 쓰는 칠성방울에는 방울끈이 달려있는데, 곰의 불알을 묶었던 허리끈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영웅 신화로 나아가지 않는다. 옛이야기는 건국, 시조, 창건과 같이 찬란한 말을 숭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주인공인 소도둑은 소잔등에 엎드린 자, 한자로는 복희(伏犧)다. 신화 속의 복희씨는 먼 옛날 제사장이었다니 희생인 소를 다루던 인물이다. 제사 때마다 소를 바쳐야 했을 농사꾼들에게는 소도둑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다만 복희씨는 한 몸이었던 여신 여와씨를 떼버리고 유교 가부장 문명을 일으킨 첫 번째 남자(시조)가 되어 사당으로 올라갔지만, 소도둑은 자신이 살던 마을로 내려온다.

 

소도둑의 성별을 굳이 사내로 못 박을 필요는 없다. 단군신화에서도 큰곰(환웅)의 정기를 얻어낸 자는 웅녀였으니 말이다. 다만 웅녀는 아들을 낳아주고(?) 신화에서 지워졌지만, 소를 훔치던 여자는 곰 가죽을 팔아 잘 살았다고 한다. 외양간의 소는 무사하고, 범은 달아났으며, 도둑은 이제 없다. 겨울을 이겨낸 강인한 그녀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새봄을 맞이할 것이다.

 

소의 해가 가고 임인년 범의 해가 왔다. 소의 잔등에서 내려온 그(녀)들 앞에 범이 기다리고 있다. 새해에는 새 해가 뜰 것이다.

 

[필자 소개] 심조원. 어린이책 작가, 편집자로 이십 년 남짓 지냈다. 요즘은 고전과 옛이야기에 빠져 늙는 줄도 모르고 살고 있다. 옛이야기 공부 모임인 팥죽할머니의 회원이다.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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