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만만찮은 그녀들의 이야기] 꽁지 닷 발 주둥이 닷 발 새
<꽁지 닷 발 주둥이 닷 발 새>는 아들이 엄마를 삼킨 괴물 새를 뒤쫓아 가서 앙갚음을 한다는 이야기다. 채록된 자료가 많지 않아도 짜임새가 단단하고 깊이가 만만찮다. 어린이 책으로는 제법 여러 권 나와 있는데 아들이 엄마를 구해 돌아오는 것으로 결말을 바꾸고, 아들의 여정을 강조한 것이 많다. 소년의 용기와 성장, 효도를 가르치려는 것이다. 그런데 채록된 원래 이야기는 이렇게 각색해도 될까 싶을 정도로 아주 다르다. 이야기는 시작부터 충격적이다.
이전에, 어떤 산골에 가난한 과부가 어린 아들 하나를 데리구 살어요.
(...) 팔월 추석이 들오와 인제. 그런디, 그 아들을 보구서,
“아가 오늘 가 나무 많이 해오너라? 저기 내 그 동안에, 너 추석때 고까옷 해주께.” 그랬어. 그렁개 얘가 가서 그냥 부지런히 나무를 해가지구 왔어요. 아 오니까, 울타리에다 빠알강 걸 널어 놨는디 좋아라구.
“아이구, 우리 어머니가 내 고까저고리 해줄라구 물을 딜여 저렇게 널억구나.” 하구서는, 아 와서 보니까 어머니두 욱구. 울타리 널응 건 사람에 가죽여. 아 그러니까,
“우리 어머니 워디 갔느냐?”구 그러니까,
“느이 어머니는 꼬랭이 댑 발 주딩이 댑 발 새 두 마리가 와가지구 잡어먹구, 발허구 머리허구만 방이다 두구서 잡어먹구 가죽은 그렇게 거기다 걸어 놓구 갔다.” 아 그런단 말여.
(한국구비문학대계 1983년 충남 공주군 유조숙의 이야기)
괴물의 정체는 날카로운 이빨이나 발톱이 아니라 긴 꽁지와 주둥이다. 매나 독수리 같은 맹금류보다 두루미나 황새의 모습에 가깝다. 새의 꽁지깃은 폭력과 거리가 멀고, 닷 발이나 되는 주둥이는 무엇을 공격하기에 거추장스럽기까지 하다. 두루미의 경우 꽁지(접었을 때는 꽁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날개깃이다)를 활짝 펼치고, 긴 부리를 치켜든 채 시끌벅적 춤을 추는데, 이는 짝짓기 행동이자 무리 안에서의 중요한 의사소통이다. 사람에게 있어서도 ‘꽁지를 흔들거나’, ‘주둥이를 놀려대는’ 것은 통제되지 않는 섹슈얼리티와 발언을 뜻한다. 보통 남성이 여성에게,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함부로 내뱉는 언사다. 그 새는 피를 흘리며 ‘감히 엄마를 벗어놓고’ 집을 나간 ‘용서받지 못할 여자’인 것이다.
아들이 집에 돌아왔을 때 ‘있어야 할’ 엄마가 없다. 빈껍데기만 남루하게 걸어둔 채 말 한 마디 없이 사라져 버렸다. ‘꽁지 닷 발 주둥이 닷 발 새라니! 언제까지나 나를 먹이고 품어주어야 할 엄마에게 날개가 있었을 리 없다.’ 아들은 엄마가 자기를 두고 떠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의 분노는 ‘내 엄마’를 삼킨 ‘꽁지와 주둥이의 괴물’을 겨눈다.
▲ <꽁지 닷 발 주둥이 닷 발 새>는 아들의 엄마와 괴물 새로 상징되는 모성에 관한 설화다. (이미지 출처: pixabay)
|
참 월마망큼을 가니까 또 모심는 사람이 있더래요.
그래서 인제 그,
“우리 어머니, 저기, 잡어먹은 꽁지 댑 발 주딩이 댑 발 새 워디루 날러가능 거봤느냐?”구 그러니까.
“이 모 다 심어 주먼 알으켜 주마.”구.
아 그 모를 다 심어 줬더니,
“이 너머루 가라.”구.
그래 인제 또 가니까. (...)
괴물 새가 간 길은 그동안 엄마가 해오던 노동으로 이어져 있다. 모 심고, 담배 심고, 까치와 멧돼지를 먹이던 길이다. 이야기하는 사람에 따라 ‘태산 같은 빨래를 씻어서 삶아서 행궈 풀 먹여서 농 안에 넣어줘야’ 한다거나, ‘변소 간의 구더기를 다 주워서 아랫물에 씻고 윗물에 행궈 까마귀 입에 넣어 주는’ 행로를 길고 생생하게 묘사하기도 한다. 아들은 논일, 밭일, 집안일에 양육과 보살핌 노동을 떠맡으며 살아온 엄마의 고단한 발자취를 따라 새의 집에 이른다.
가니까 첩첩산중이 들어갔더니. 가마안히 가서 망을 보니까 참 새 날러댕긴 자취가 익구, 그런디, 이렇게 돌문이 닫혔어. (...) 그 돌문을 잡어 제끼구서 들어가 봤더니, 그게 새집여.
그래 가마안히 들어가서 벽장속이 가 들어 앉었으닝깨, 이놈으 새덜이 오더니,
“아이구, 인내 난다. 인내난다.” 그러더니,
“저녁을, 저기, 떡을 해먹자.”구.
그러구서는, (...) 떡을 금방내 해서 시루를 쪄서 놓구서.
“야. 장자네 집이 가서 저어기 칼 읃어가지구 와서 이 떡얼 쓸어 먹자.” 그러구 가더랴.
새의 둥지는 나무 위가 아니라 무거운 돌 밑에 숨어있고, 저녁이 되어 귀가한 새들은 괴물의 모습이 아니다. 그녀들은 사람 냄새를 맡고도 놀라기는커녕 함께 저녁거리를 궁리하더니 떡을 하겠단다. 누추한 땅굴 살림에 걸맞지 않게 떡을 하고, 미처 갖춰두지 못한 칼과 주걱을 빌리러 가는 모습에서 혐오스러운 주둥이와 꽁지는 희미해져 있다. 괴물 새는 찾아온 아들을 먹이려고 여념이 없는 보통의 엄마인 것이다.
(아들은) 그 동안에 가서, 구정물을 퍼북구 그냥 재를 훌훌 뿌리구 그러구 들어왔지. 아 그러더니 오더니 ‘이게 워쩐 일이냐?’구.
“이거 몹 먹게 생겼다.”구, 시루를 뗘 집어 내빌더니,
“밥을 해먹자.”구. 밥을 해놓구서,
“이제 장자네 집이 가서 주걱을 읃어가지구 와서 퍼먹자.”
구, 그러드랴.
주걱 읃으러 간 새, 또 재를 퍼북구, 저기 구정물을 퍼 붜 놨어.
그랬더니 오더니,
“아이구. 할 수 웂이 굶어 자는 수밲이 웂다.”
그러나 아들은 엄마의 새 출발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 세상의 눈을 피해 땅 속에 꾸린 ‘비정상 가족’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아들은 모두가 함께 나눌 양식에 재를 뿌리고 구정물을 뿌림으로써 그녀의 떡과 밥을 누구와도 나누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엄마는 아들의 투정 앞에 속수무책이다. 아들의 상실감을 달랠 길이 없음을 알아채고 제풀에 지치도록 기다리기로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들은 끝내 엄마로부터 분리되지 못한다.
그러구서는, (...) 인저 방이서 자는디. 어쨌던지 꼬추가루를 훌훌 뿌리구 바늘루 그냥 사뭇, 뿌렸어.
“하이구 따거. 깔때기가 문다구. 빈대가 무나보다구. 저기, 저기 뜰이 가 자자.”구. 뜰이 나가서 그러는디 또 한 봉지를 갖다 뿌렸어. 그랬더니,
“아이구. 이렇게두 못 허구 저렇게두 못 허구. 별 수 웂이 가마솥이 자자”구. 가마솥이루 들어가더래요.
아들은 고춧가루를 뿌리고 바늘로 찌르며 난폭하게 달라붙지만, 엄마는 아들의 격렬한 분노를 똑바로 응시하지 못한다. 그저 응석받이를 대하듯이 폭력을 받아내다가 마침내 가마솥으로 들어가기에 이른다. 밥과 떡의 자리로 다시 내몰린 것이다.
(아들은) 솥뚜껑을 덮어 놓구 불을 때기 시작했어. 처음에는 때니까,
“아이구 따땃하다. 따땃하다.” 그러드니,
“구만 때라. 구만 때라.” 하더니, 자아꾸 때닝깨 그 속이서 후둑후둑 저기, 날르는 소리가 나더니, 빠짝 타서 그냥 요만한, 콩만한, 저기 숯덩어리가 돼 죽어 버렸어.
아들은 가마솥 뚜껑을 눌러 새를 가두고 불을 붙인다. 따뜻하던 온기는 무서운 열기로 번져간다. 집착이 되어버린 아들의 일방적인 사랑은 죽음의 열기에 휩싸인다. 화려한 꽁지와 당당한 주둥이의 새는 검은 가마솥에 갇혀 빨갛게 달궈져 죽은 뒤 숯덩어리가 된다. 울타리를 넘어 세상으로 나아가던 모성도 영원히 사라졌다.
그래 그 눔을 도구통이다 퐁퐁 빵궈가지구서 오메 오메 길이다 뿌렸대요. 그래 웬수를 갚었어. 그랬더니 그게 모기가 됐대요. 그게. 모기가 그 꽁지 댑 발 주딩이 댓발 새 죽은 원혼이라 그 주딩이가 길어가지구 그케 사람을 문댜.
그녀가 남긴 한 줌의 재는 모기가 되어버렸다. 알다시피 모기는 암컷만 피를 빤다. 피를 빨아야 알을 낳을 수 있으므로 모기의 흡혈은 지극한 모성이기도 하다. 환한 햇볕 아래 날갯짓하던 그녀는 어둠을 틈타 시궁창을 오가며 피를 찾는 날벌레, 맘충이 되고 말았다. 아들이 얻은 것은 밤이 깊도록 앵앵거리며 성가시게 들러붙는 모성이다.
시인이자 세 아이의 엄마였던 에이드리언 리치가 자신의 성정체성을 고백하며 이혼을 요구했을 때, 그녀의 남편 알프레드는 자살로 응답한다. 아내의 사랑이 더 이상 자신을 향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가장 끔찍한 폭력으로 복수한 것이다. 하지만 에이드리언은 옛이야기의 괴물 새와 달리 가마솥에 갇히지 않았다. 세 아이와 함께 무거운 돌문을 열고 나와 지금까지 모성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 그녀가 이 이야기의 괴물 새를 만난다면 이렇게 말을 건넬 것이다.
“우리 사이에 (지금) 일어나는 일들은 수 세기 동안 일어났던 거예요.
괴물의 형상을 지닌 한 여자,
여자의 형상을 지닌 한 괴물
하늘은 그런 형상들로 가득 차 있지요.”
(에이드리언 리치, 시집 <문턱 너머 저편>에서)
이 이야기는 ‘아들의 마더’에 관한 서늘한 탄생설화다.
[필자 소개] 심조원. 어린이책 작가, 편집자로 이십 년 남짓 지냈다. 요즘은 고전과 옛이야기에 빠져 늙는 줄도 모르고 살고 있다. 옛이야기 공부 모임인 팥죽할머니의 회원이다. 일다
▶ 열두 가지 재밌는 집 이야기 『네가 좋은 집에 살면 좋겠어』
'문화감성 충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자의 욕망을 통제하는 가부장제에 대한 섬뜩한 풍자 (0) | 2022.03.08 |
---|---|
구름마을 노인들의 단추 비빔밥 안에 든 것 (0) | 2022.03.01 |
공정 담론을 넘어서는 페미니즘 교육을 모색하기 (0) | 2022.02.22 |
피해자 김지은, 김잔디…세상을 고발하고 바꾼 노동자 (0) | 2022.02.15 |
“같이, 혼자 사는 사람들” (0) | 2022.02.07 |
호랑이를 쫓아낸 건 곶감이 아니었다 (0) | 2022.01.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