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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앞에서 만나] 영화 <크립 캠프 – 장애는 없다>
내가 살고 있는 집은 3층에 위치해 있다. 입구에는 계단이 있고, 건물 내에는 엘리베이터가 없다. 집 안을 들여다 본다. 밥솥에도, 어제 산 버섯들에도, 고양이 사료에도 점자는 없다. 현관에는 턱이 있고 화장실 입구도 마찬가지다. 이 빌라에 살고 있는 모두는 이 계단을 오를 내릴 수 있는 사람들이다. 점자 없이 식재료를 분류할 수 있으며, 집 안의 턱들을 가볍게 넘을 수 있는, 휠체어를 타지 않은 사람들이다. 우리 집에는 신체 장애인이 놀러온 적이 없다.
녹음실을 생각해 본다. 내가 갔던 녹음실은 대체로 지하에 있었다. 지하까지 가려면 계단을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 공연장을 떠올려 본다. 공연장 역시 대체로 지하에 있고 엘리베이터가 없다. 아주 좁은 문을 지나야 들어갈 수 있는 공연장도 있고, 엘리베이터가 없는 2, 3, 4층에 위치한 공연장도 있다. 턱이 없는, 엘리베이터가 있는, 장애 친화적인 공연장은 한 곳뿐이었다. 그리고 그 때도 수어 통역은 없었다. 내 공연은 특정한 누군가만 올 수 있는 공연이었다.
그러면서 공연을 열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와주길 바랐다. 편협하고 이기적이었다. 내가 노래할 곳이 어떤 곳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바라기만 했다. 때로는 이런 문구를 적기도 했다. “공연장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4층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러나 한 문장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한 번이라도 나는 공연장 사장님에게 엘리베이터를 설치할 의향이 있는지 물어본 적 있는가. 질문은 항상 다른 이의 몫으로 남겨두고 나는 계단을 내려가, 턱을 지나 노래를 했다.
나는 고양이들과 살고 있다. 그중 한 명, 땅이는 어린 시절 허피스를 앓아 한쪽 눈이 없다. 배경화면에 있는 고양이 사진을 보면 가끔 누군가가 이렇게 말한다. “한쪽 눈이 아프다”고. 땅이는 지금 아프지 않다. 전에 아팠을 뿐이다. 사람들은 보이는 대로 판단한다. 나도 그랬다. 땅이가 처음 왔을 때, 장난감 낚싯대를 눈이 있는 쪽으로만 휘저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알게 됐다. 땅이는 장난감에 환장하는 스타일이고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앞이든 뒤든 가리지 않고 집안을 종횡무진하며 달려든다는 사실을.
▲ 니콜 뉴넘, 제임스 레브렉트 감독 다큐멘터리 영화 <크립 캠프 – 장애는 없다> 포스터 |
연대로 지속된, 장애인 당사자들의 투쟁
<크립 캠프>(니콜 뉴넘, 제임스 레브렉트 감독, 2020)는 투쟁하는 장애인들의 이야기다. 그들 중 리더 쥬디 휴먼이 말을 한다. 사람들은 항상 아프지(sick) 않냐고 묻는다고. 그들은 아프지 않다고 대답한다. 조한진희 작가의 책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에서 말하듯 세상은 ‘건강’을 ‘정상’으로, ‘아픔’을 ‘비정상’으로 간주한다. 저들 보기에 비정상이면 ‘아픔’으로 판단해 버린다. 우리 모두 어딘가는 아프고 어딘가는 아프지 않다. 단순하게 구분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크립 캠프>는 1971년 장애인들이 대거 참가한 “제너드 캠프”(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참여하여 장애인권과 탈시설운동 등을 논의한 행사로 1951년부터 2009년까지 진행되었다) 미국 뉴욕의 기록 영상으로 시작한다. 장애인들이 단체로 참가한 이 캠프 속에서 그들은 자유로움을 느낀다. 그 자유를 대변하듯 밥 딜런 등 저명한 포크 음악가들의 포크 음악이 깔린다. 1970년대 자유와 평등을 중시하던 히피 문화 속에서 행해진 캠프는 장애인들의 시선을 바꿔놓는다. 그들은 동등한 시민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를 누리고 있지 못했다. 이들은 권리를 위해 직접 투쟁에 나선다.
1972년, 윌로브룩 병원 사건이 발단이 되었다. 지적장애가 있는 아이들을 집단으로 수용하고 한 아이당 3분의 식사 시간만 제공하며, 50명의 아이를 한 간호사가 돌보는 실태가 밝혀지면서 탈시설에 대한 목소리가 커진다. 이 같은 사태를 방지할 수 있는 법은 미국 재활법의 조항 504다. 이는 차별금지 조항으로서 연방 자금을 쓰는 병원과 교육기관, 교통수단 등에서 사회적 약자를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다. 허나 닉슨 대통령은 자금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하고, 장애인들은 거리로 나섰다. 맨해튼 사거리의 교통을 마비시킨 휠체어 농성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자 정치권은 재활법을 통과시키지만 실제 이행을 하지 않았다.
이들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시위를 이어나갔다. 1977년 카터 정부 시기, 이들은 보건복지부 관으로 들어가 본격 시위를 벌인다. 23일간 단식 투쟁을 하는 이도 있었다. 물이 끊기고 밥이 끊겼을 때 연대를 해온 건 시민사회였다. 가게를 운영하는 레즈비언 커플이 샴푸와 물을 보내오기도 하고, 블랙팬서라는 단체가 아무 대가 없이 음식을 제공했다. 이들이 연대하며 끈질기게 시위하는 만큼 정부 역시 끈질기게 자금을 핑계로 고개를 가로젓다가, 끝내 이들이 이기고 만다. 장애인들은 시위하던 시설에서 나오며 박수를 받는다.
▲니콜 뉴넘, 제임스 레브렉트 감독 영화 <크립 캠프 – 장애는 없다>(Crip Camp, 미국, 2020, 넷플릭스 제작) 중에서 |
대중교통에서 장애인을 마주할 일이 적은 사회
2021년 한국의 장애인 이동권은 어떠한가. 역시나 제대로 보장되지 않고 있다. 한국의 장애인들도 투쟁에 나섰다. 휠체어를 타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방식이다. 누군가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는 사실 자체가, 삶 자체가 투쟁이 된 셈이다. 서울교통공사 측은 교통이 지연되는 것을 장애인 시위대의 탓으로 돌렸다. 애초에 장애인이 이용하기 불편한 시스템을 만들어 놓고 이용자의 탓을 했다.
언론 역시 이를 장애인들의 탓으로 돌리는 기사를 냈다. “장애인 단체 시위로 원활한 배차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타이틀은 분명히 화살이 달려있다. 게다가 “기습시위”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이미 장애단체들이 보도자료를 냈고, 하루 전에 서울교통공사에서 트위터에 분명히 공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지한 언론은 활시위를 당겼다.
2001년, 2002년 장애인용 리프트가 추락해 2명의 장애인이 사망했다. 이후로 지자체는 지하철 전 역사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겠다는 약속을 했지만 아직까지 이뤄지지 않고 있다. 2017년 또 다른 사망자가 결국 나오고 말았다. 엘리베이터를 설치해도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열차와 역 사이의 간격 때문에, 휠체어 이용자는 또 한 번 지하철 앞에서 고비를 마주하게 된다.
장애인 시위는 장애인들을 포함한 모든 교통약자를 위한 시위다. 하지만 이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은 여전히 달갑지 않다. ‘분리 평등 정책’과 다를 바 없다. 이렇게 되니 대중교통에서, 길가에서 장애인들을 마주할 일이 적어지고 점점 그들을 우리와 다른 존재로 인식하게 된다.
▲ 19회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 부대행사로 마로니에공원에서 열린 <장애인 이동권 투쟁 20주년 사진전 - 버스를 타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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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또한 마찬가지다. 장애인을 다룬 극영화는 대부분 동정의 시선을 담는다. 눈물을 쥐어짜게 만들고 극장을 나서면 저들과 다른 자신의 삶을 긍정하게 만든다. 이는 기부 방송의 시선과 닮아있다. 카메라는 위에서 ‘이들’이 아닌 ‘저들’을 찍는다. 구조의 문제는 가린 채, 동정과 연민의 감정만 남긴다. 기부 방송의 목적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선한 목적에는 그에 맞는 과정이, 연출이 따라야 한다. 사회적 약자를 내려다보는 시선은 어떠한 구조적 변화도 가져오지 못한다.
동정의 대상도 차별의 대상도 아닌
이 글을 쓰기 위해 다른 장애인이 나오는 극영화를 몇 편 찾아보았다. 대부분 남성이 주인공으로 여성혐오적 시선을 담고 있었다. 구스 반 산트 감독의 <돈 워리>에서는 여성 간호사를 성적 대상화하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 사회적 약자를 다루면서 다른 약자성은 가볍게 짓밟고 넘어가는 영화였다. 그런 교차성의 문제뿐만이 아니다. 많은 극영화들이 극복의 서사를 취하고 있다. 장애는 극복의 대상도, 동정의 대상도 아니다. <크립 캠프>를 보고 나면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 대신 투쟁의 불씨와, 사회구조에 대한 의심을 갖게 된다.
장애인은 장애 외의 수많은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사회는 그저 장애인으로만 그들을 바라본다. 장혜영 감독의 <어른이 되면>(2018) 속 장혜정 님은 재능 부자다. 미술 전시를 열기도 하고 어디서나 춤을 출 수 있으며 무엇보다 농담의 귀재다. 다큐프라임 <부모와 다른 아이들 :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에도 장혜영, 장혜정 자매가 등장한다. 커피 매니아인 장혜정 님은 계속해서 커피를 마시려 하고 언니는 만류한다. 아메리카노를 사러 가면서 오늘은 여기까지 마시자고 장혜영 님이 새끼손가락을 내민다. 약속을 하면서 묻는다. “이 약속은 어떤 약속이야?” 장혜정 님이 대답한다. “헛된 약속”. 배를 쥐고 웃었다.
유투버 구르님은 매달 휠체어를 새롭게 꾸며 화보를 찍는다. 최근 유행했던 엠넷의 댄스 프로그램 <스트릿 우먼 파이터> 스타일로 그래피티 앞에서 멋진 포즈를 잡기도 하고, 하이틴 영화 속 여주인공처럼 꾸며 촬영하기도 한다. 12월의 주제는 크리스마스였다. 휠에 크리스마스 장식을 달고 산타복을 입고 선물을 들었다. 미디어에서 더 다양한 장애인의 모습을 조명하고 납작하게 그리지 말 것을 명시한다.
<크립 캠프> 속에는 장애인들의 드랙쇼 영상이 있다. 장애를 최대한 숨기기를 강요하는 사회의 눈치를 벗어나 이들은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 화장을 하고 옷을 입고 무대 위로 오른다.
▲ 니콜 뉴넘, 제임스 레브렉트 감독 영화 <크립 캠프 – 장애는 없다>(Crip Camp, 미국, 넷플릭스 제작, 2020)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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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립 캠프 – 장애는 없다>의 원제는 <Crip Camp>다. Crip은 발을 절룩거리는 모습을 뜻한다. 그러므로, 한국어 제목을 어떤 의도로 붙였는지 모르겠지만 원제를 훼손하는 제목이다. 영화 속 이들은 한 번도 장애는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장애를 부정하거나 극복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대신, 장애와 함께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끊임없이 질문한다. 동등한 시민으로서 왜 누군가의 삶은 투쟁이 되어야 하는지 물음표를 던진다.
기록영상들의 화질이 좋아지고 흑백에서 컬러로 바뀔수록 조금씩 변화가 일어난다. 전동 휠체어가 생기고, 지난한 투쟁의 결과로 경사로가 생긴다. 음향감독을 꿈꾸던 장애인은 부스를 올라가려면 계단을 통과해야 했지만 이 역시 개선되었다. 각자 꿈꾸던 삶에 조금씩 가까워졌다. 이 모든 것의 배경에는 당시의 투쟁이 있었다.
한국사회에서는 그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조차 시위가 된다. 이 문장 안에 담긴 많은 혐오와 구조적 문제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장애인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가 변혁해야 한다. 국가는 더 이상 그들의 삶에 빚을 질 수 없다. 늦은 만큼 빠르게 갚아나가야 한다.
[필자 소개] 신승은: 싱어송라이터이자 영화감독. 1집 앨범 [넌 별로 날 안 좋아해](2016), 2집 앨범 [사랑의 경로](2019)를 발매했으며 단편영화 <마더 인 로>(Mother-in-law, 2019), <프론트맨>(Frontman, 2020) 등을 연출했다.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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