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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호텔 파업과 성희롱 집단소송>(上) 파업 3일차에 드러난 사건
때는 6월 29일 새벽 3시. 대테러진압부대로 알려진 솔개부대를 비롯해 2천5백명이 넘는 전투경찰이 롯데호텔 소연회장으로 들이닥쳤다. 연회장 안에는 1천여명의 롯데호텔 직원들이 있었다. 그들이 의자와 집기로 문을 막고 버텨보았으나 역부족이었다.
군사정권 방불케 한 2000년 공권력의 롯데호텔 파업 진압
▲ 2000년 6월 29일 새벽, 롯데호텔 파업을 공권력이 강제 진압한 이후 모습. 사진 출처: 전국서비스산업노동조합연맹 |
당시 연회장에 갇힌 사람들은 이리 회상했다. 그날 “연기 탓에 숨이 막혔고” “앞도 볼 수 없었고” “커튼에 불이 옮겨붙었으며” “사람들이 창문에 살려달라고 SOS를 썼다.” 비명과 울음 속에서 둔탁한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쇠곤봉이 사람 몸을 때리는 소리였다.
“2층에서 자고 있던 우리들은 (새벽) 세 시경 공권력이 들어올지 모르겠다는 말을 듣고 36층으로 이동하였습니다. … 경찰들이 문틈으로 섬광탄과 연막탄 등을 쏴서 앞을 볼 수가 없었고 숨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 제 눈앞에서 경찰이 남자 조합원을 곤봉과 군화발로 때리는 모습을 보고 전 잠깐 실신하였습니다. … 남자의 머리에 피가 흐르고 실신하여 그 사람의 몸이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롯데호텔 파업 및 경찰 진압 과정에 대한 진상조사 보고서> 중 이OO 조합원의 증언
1980년대 군사독재정권 시절 이야기가 아니다. 밀레니엄 시대라는 말이 나오던 2000년이었다. 전투경찰 투입. 목적은 노동자들의 파업 대오를 해산하는 것이었다. 롯데호텔 파업 21일째였다.
날이 밝자, 언론은 지난밤의 폭력을 전했다.
<‘마구잡이’ 파업진압 공권력 남용 심각>, 문화일보, 2000년 6월 30일
<경찰 술 먹고 롯데호텔 노조 농성 진압>, MBC, 2000년 7월 1일
음주 의혹이 제기될 정도(전투경찰이 머물던 호텔 객실 미니바의 주류가 모두 사라진 것을 직원들이 발견했다)로 마구잡이 폭력이었다. 특히 사회적 공분을 산 것은 ‘임신부 폭행’이었다.
“롯데호텔 농성장에는 임신부가 10여 명이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압경찰은 연막탄과 분말소화기를 부려대며 살인적인 폭력 진압을 자행했다. … 임신부에게까지 이러한 폭력 진압을 감행할 수 있단 말인가! 최소한 모성보호조차도 짓밟는 경찰의 폭력 진압 앞에서 우리 여성 노동자들은 망연자실할 뿐이다.” -롯데호텔 폭력진압에 대한 한국여성단체연합 성명서 중. 2000년 6월 30일
▲ 롯데호텔 파업 노동자들에 대한 공권력의 폭력 진압은 사회적인 공분을 샀다. 당시 MBC 뉴스 인터뷰 영상 중. ©MBC |
경찰청은 임신부 폭행 사실을 극구 부인하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임신부가 있길래 ‘안전하게’ 이동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폭행당했다는 임신부의 증언이 이어졌다. 목격자도 적지 않았다. 이날 연행자가 1천125명. 부상당한 이는 30명이 넘었다. 화상을 입고 머리가 깨지고 다리가 부러졌다. 이 혼란 속에서 뱃속의 아기가 무사한 것은 행운이었다. 그 행운이 비껴간 이도 있었다.
밥이나 하지 왜 나와서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이 그날의 진압 과정을 조사했다. 그 결과는 <호텔롯데노조 조합원 연행 과정 현황 파악 설문 조사 자료>(2000)에 담겼다. 20년이 지나 그 자료를 읽게 됐다. 보는 내내, 잔혹한 폭력에 놀라고, 직권 남용에 분노하고, ‘그래도 되는’ 권력(과잉진압으로 징계를 받은 이가 없다) 앞에 무기력해진다. 실소를 금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다. 세상 쉽게 변하지 않는구나.
임신한 여성들이 전투경찰에게 들었다는 말이다.
“아줌마는 집에서 태교나 해라.”
“집에서 밥이나 해서 처먹지 왜 나와서.”
낯설지 않다. 지금도 지하철 임산부석을 두고 소란이 벌어지면 듣는 말이다. 그 몸으로 왜 나왔냐, 집에나 있으라 한다. 밥도 그냥 먹으라 하지 않는다. 꼭 ‘해서’ ‘차려’ 먹으라 한다. 공적인 공간에서 임신한 여성은 있어선 안 될 사람 취급당한다. 눈에 보이면 불편해한다. 자신들의 눈에 보인다고 화를 낸다. 마치 그날의 전투경찰처럼.
어디에 있건 임신한 여성은(아니 대다수의 여성이) ‘집 사람’ 취급받는다. 그가 일을 하고 사회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는 사실은 가볍게 지워진다. 롯데호텔 노동자들이 21일째 머물던 파업 현장은 직장생활의 연속이었다. 당연히 그곳에 여성 직원들이 있었고, 그 수가 400명에 달했다. 임신한 여성도 직원이자 노동조합의 조합원이었다. 하지만 정부도, 경찰 투입에 동조한 롯데호텔 측도 ‘임신한 여성’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임신한 이에 대한 ‘보호 조치’ 고려는커녕 ‘존재’조차 떠올리지 못하는 듯했다.
없어야 할 사람 취급이 과연 ‘평온했던’ 시절의 일터에선 없었는지.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취재 도중 ‘산란기’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20년이 지나도록 롯데호텔 노동자들이 기억하는 말이다.
모 임원이 임신한 여성들을 두고 이런 말을 했단다.
“요즘 산란기야? 왜 이렇게들 임신을 해.”
가해자의 인성뿐 아니라, 일터가 임신을 한 여성노동자를 어떤 시선으로 보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농담’이라 했다. 당시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제재당하고 징계해야 하는 ‘정도는’ 아니라고 했다.
이 말이 ‘문제’로 인식된 것은 한참 뒤였다. 롯데호텔 파업이 없었다면, 평생 오지 않을 순간이었다.
관광산업 호황인데 ‘삭감’ ‘정리’ ‘계약직’…파업의 시작
12년 만의 파업이었다. 도무지 일을 멈추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외환위기(IMF) 3년 차인 2000년, 정리해고와 아웃소싱이라는 단어가 널리 쓰였다. 하지만 대형 백화점에는 고객이 넘쳐 흘렀고, 환율 차액으로 인해 면세점 쇼핑이 유행했다. 한국을 찾은 해외 관광객이 처음으로 5백만 명을 넘은 해이기도 했다.
관광산업은 때아닌 호황을 누렸다. 하지만 호텔 직원들이 받은 것은 보너스가 아니었다. 그들 앞에 상여금 반납 동의서가 놓였다. 호텔은 이참에 ‘삭감’하고 ‘정리’하려 했다. 회사 밖이 지옥이라는 이유였다. 당시 기업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번지던 ‘부부 사원 중 1인 퇴사’도 실시됐다. 부부 중 누가 나가야 하는지 빤한 이 ‘권고’에 수십 명의 여성이 직장을 잃었다.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회사는 노조가 계약직 확대에 동의할 것을 요구했다. 호텔 직원 2천8백여 명 중 비정규직 직원 수가 이미 절반을 넘겼다. 외환위기 2년만에 생긴 변화였다. 이러다가는 회사 안도 지옥이 될 판이었다. 결국 노조는 파업을 선포한 것이다.
▲ 외환위기 2년이 지난 시기였지만 관광업은 부흥기였다. 그럼에도 상여금 반납, 권고사직, 계약직 확대... 밀려나는 노동권을 지키기 위해 호텔롯데 노조는 파업에 돌입했다. 롯데호텔 직원들의 선전전 모습. 사진 출처: 전국서비스산업노동조합연맹 |
하루면 될 줄 알았던 74일의 파업
2000년 6월 10일, 롯데호텔 직원이자 노동조합 조합원 천여 명은 롯데호텔 앞마당을 가득 메웠다. 4성급 호텔 앞마당에 붉고 검은 현수막들이 여기저기 걸렸다.
<껌 파는 회사라고 월급도 껌값이냐!>
“파업 다음날 가족 여행이 잡혀 있던 거예요. 어떻게 하지? 하는데 동료가 옆에서 ‘야, 그거 새벽에 끝나. 하루면 돼.’ 이러는 거예요. 칫솔만 하나 가지고 간 거죠.”
이때를 회상하던 조합원 최미숙 씨(현 롯데면세점노조 회계감사)의 말이다. 입사 11년차이던 그의 인생에는 파업이라는 것이 처음이었다. 가족들에게 내일 보자 인사하고 롯데호텔로 향했다.
“그날 저녁에 안 끝났어요. 농성 들어간 첫날 새벽에 다 호텔 앞으로 나오라고 하는 거예요. 가슴이 두근두근한데, 또 다 모여 있으니까 믿는 구석이 있는 거예요. 천 명 넘게 있으니까.”
하루면 될 줄 알았던, 74일 파업의 시작이었다.
“다음날 가족들에게 전화해서 내 짐 좀 싸달라고. 나는 공항으로 바로 갈게. 다음 날 또 연락해서, 내일 갈게. 먼저 가 있어. 비행기표만 뒤로 미루다가 결국. 나중에 가족들이 제주도 귤 한 박스 농성장에 주고 가더라고요.”
수십 장의 대자보에 가득 적힌 것들
24시간 회사 앞을 지켜야 했다. 그 시간을 메울 크고 작은 프로그램이 준비됐다. 어느 날은 면세점으로 침묵 시위를 가고, 호텔이 자리한 중구 일대를 행진하고, 호텔 야외 주차장에 세운 농성장에서 율동을 배우고, 노래 가사를 바꿔 부르며 지냈다. 옆 동네 노동조합에서 연대를 오고 저녁이면 문화제를 했다.
파업 3일차에, 노동조합 파업 일지에는 소박한 프로그램 하나가 적힌다. <2000. 6. 12. 대자보 호텔 벽면 부착>. 이 대자보가 가져올 파장을 그땐 아무도 몰랐다.
“파업을 하면 대자보 같은 거를 붙이잖아요. 부당하게 생각하는 것을 써보자. 회사가 이랬다. 상사가 저랬다. 개선해달라. 써서 호텔 앞에 쭉 붙였어. 그런데 다른 노조랑 사람들이 와서 보더니, 이거 심각한데? 이러는 거예요.”(김금주, 당시 롯데호텔노조 조합원. 현 롯데면세점노조 위원장)
수십 장의 대자보를 가득 메운 것은 그동안 지배인과 부서 팀장 등 직장 상사가 가해온 성희롱이었다.
▲ 2000년 롯데호텔 파업 당시 모습. 직원들은 그동안 일하면서 부당한 대우를 받은 사실을 대자보에 적었는데, 그 결과 심각한 성희롱 사태가 드러나게 되었다. 사진 출처: 전국서비스산업노동조합연맹 |
당시 금속연맹(민주노총 금속노조가 산별노조로 전환하기 전 명칭) 여성국장을 맡았던 임혜숙 씨는 그때를 이렇게 기억한다.
“2000년도에 롯데호텔 파업 투쟁이 일어났고. 그 과정에서 노조 간부들이 그런 이야기가 막 나온다면서, 성희롱 예방교육을 해달라고 의뢰가 왔어요. 노상에서 교육을 했어요. 호텔 들어가기 전 주차장에 텐트를 치고 농성하는 데서. 성희롱 예방교육 끝나고 조합원들에게 A4 용지를 나눠준 거죠. 회사 다니면서 자신이 들었거나 경험했던 성희롱이나 성폭력을 적어달라. 그래서 그거를 다 모았는데 내용이, 너무 심각했어요. 양도 되게 많고. 이거는 그대로 두면 안 되겠다. 그렇게 대응팀이 만들어진 거죠.”
그 자리에서 접수된 성희롱 사례는 150여 건.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노동조합은 바로 다음날 실태조사에 들어간다. 10명 중 7명꼴로 성적인 농담, 비유, 외모 평가를 들었다고 했다. 회식 자리에서 부루스 추기 강요 등과 같은 신체 접촉 요구도 빈번했다. 노동조합은 여성/사회단체들과 함께 ‘롯데호텔 성희롱 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를 꾸린다.
농담이, 유희가, ‘문제’로 규정되는 순간이었다. 그간 쉬쉬하거나 개인 일로 치부된 것이 일터를 벗어나, 여자들이 모여 말하는 자리가 생기자 ‘직장 내 성희롱’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이 명명은 국내 처음이자 유일한 ‘직장 내 성희롱 집단소송’으로 이어진다. (中편에 이어집니다.)
*참고 및 인용 자료
-<롯데호텔 파업 백서>(민주노총, 2000) 중 “롯데호텔 및 경찰 진압 과정에 대한 진상조사 보고서”, “호텔롯데노조 조합원 연행 과정 현황 파악 설문 조사 자료”, “호텔롯데 파업 74일의 교훈” 등
-김소연, [아름다운 저항 2.0] 롯데호텔 노조 파업, 사람매거진 <나.들>, 2013.12 제14호 “2000년 6월 29일 순수는 짓밟혔다” 외 관련 기사
[필자 소개] 희정. 기록노동자. 싸우고 견뎌내고 살아가는 일을 기록한다. 『노동자 쓰러지다』, 『퀴어는 당신 옆에서 일하고 있다』 등을 썼고 [회사가 사라졌다』(공저)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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