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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바이너리 글로컬 활동가 상현 인터뷰

 

[하리타의 월경越境 만남] 독일에 거주하며 기록 활동을 하는 하리타님이 젠더와 섹슈얼리티, 출신 국가와 인종, 종교와 계층 등 사회의 경계를 넘고 해체하는 여성들과 만나 묻고 답한 인터뷰를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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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로 이주한 이래 나는 여러모로 ‘경계인’이 되었다. 활동 지역이나 공동체가 한국(서울)과 독일(프라이부르크)에 걸쳐있고, 일상에 여러 가지 언어와 문화가 복잡하게 뒤섞여 있다. 그래서 혼란스럽고 적응하기 어렵다고 느껴질 때도 있지만, 둘러보면 나 같은 경계인은 어디에든 존재한다. 10년 만에 우연히 다시 만난, 대학 때 친구이자 정당 동료이기도 한 상현도 경계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처음 서로를 알게 되었을 때, 상현과 나의 공감대는 생활자치도서관(풀뿌리 지역 가치와 일상 문화를 중시하는 대안적 학생운동)과 페미니즘이었다. 둘 다 10대 때 사회운동의 언어와 열기에 매료되어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데모에 참여했지만 그 내부의 가부장적 문화는 거부하는 ‘운동권 아웃사이더’였다. 지금의 둘 사이의 공감대는 뭘까. 나는 ‘물리적 탈조선’을 했고 상현은 아시아 곳곳으로 자주 ‘버추얼 탈조선’을 한다. 여전히 페미니스트이며, 동네 축제에서 마이크를 잡는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상현의 지난 10년에 대해 들어봤다.

 



▲ 상현의 모습. 거주지가 있는 서울 중랑구에서 일하는 풀뿌리 활동가이면서,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를 위해 아시아 곳곳의 시민사회와 연대하는 국제연대활동가이기도 하다. 자신의 젠더를 ‘논-바이너리’(Non-binary)로 정체화하고 있다.

 

1986년 대구에서 태어나 자란 상현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상경한 ‘서울 이주민’이다. 최인훈의 단편소설 <광장>에 나오는 사회운동가에게 감정이입하고 시사 프로그램을 진지하게 보던 상현에게 대학은 ‘데모하러 가는 곳’이었다. 2005년에 입학해 교내에선 학생회 활동과 등록금 인상 반대운동을 하고, 학교 밖에서도 사회 이슈에 목소리를 냈다. 2009년 쌍용 자동차 파업과 용산 참사를 겪으며, 졸업 후에도 계속 ‘세상을 바꾸는 운동’을 하겠다고 방향을 정했다.

 

하지만 상현이 그동안 몸 담은 직장은 진보 정당이나 이름난 시민단체는 아니다. 자기가 사는 동네가 속한 동대문구와 중랑구에서 ‘풀뿌리 활동가’로 일했다. 서울시 청년활동지원센터 청년 반장, 중랑희망연대 사무국장 등으로 지역 주민들과 구청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했다. 최근에는 기후 교육에 쓸 보드게임을 개발하고, 코로나로 인해 ‘돌봄독박’ 상황에 놓인 여성들을 위한 유튜브 & 예능방송을 진행했다.

 

풀뿌리 활동가 외에 직함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아시아 연대 활동가’이다. 2019년에 있었던 홍콩 민주화 시위를 지지하기 위해 ‘국가폭력에 저항하는 아시아 공동행동’에 참여했다. 상현은 ‘한-홍 민주동행’ 공동대표, ‘미얀마의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한국 시민사회단체 모임’ 공동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다.

 



▲ 중랑 지역 단체인 동북여성환경연대 초록상상에서 개최한 ‘성평등 영화제’에서 영화 <김복동>의 GV 진행을 맡은 상현.(가장 왼쪽) 출처: 인터뷰이


미얀마 민주화를 지지하는 한국 활동가들이 하는 일

 

하리타: ‘미얀마의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한국 시민사회단체 모임’(이하 시민모임) 얘기부터 해보면 좋겠어요. 미얀마 시민 불복종 운동이 시작된 이래 군부 폭력에 의한 사상자가 이제 885명을 넘었다고 하고(7월 1일 기준) 반-군부의 무장투쟁이 장기화될 거라고 들었어요. 시민모임은 그 동안 어떤 일들을 해왔나요?

 

상현: 지난 2월 1일에 쿠데타가 발생하자마자 국내에서 60여 단체들이 성명을 냈는데요, 그때 성명서만으로 부족하니까 다양한 활동을 계속 같이하자는 뜻에서 꾸려진 게 시민모임이에요. 국회와 기업에 대응하는 것과, 한국 시민들의 참여를 촉진하는 것, 두 가지 큰 방향입니다.

 

연대체의 주요한 활동은 한국 국회가 나서도록 촉구하는 것과 기업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인데요. 60여 명의 국회의원들이 꾸린 모임에 저희가 ‘미얀마 사태를 비롯한 해외에서의 인권침해에 대응하기 위한 법제도 개선’ 토론회를 제안해서 오는 8월 12일에 국회의원들과 정부 부처 담당자들이 참석하는 행사가 열릴 예정입니다.

 

기업의 경우, 포스코나 한국가스공사, 롯데그룹이 미얀마에서 대규모 프로젝트를 하고 있어서 그 자금이 군부로 들어가고 있어요. 저희는 그 결탁을 중단하라는 요구를 지속적으로 하는데요, 그 중 한 사례로, 기업 투자자들에게 주주권을 행사해서 자금 지급을 막아달라고 저희의 활동에 공개 지지를 요청했어요.

 

포스코와 한국가스공사가 미얀마 군부와의 결탁을 중단하고 대금 지급을 중단하기를 촉구하는 1만 명 온라인 지지 서명 운동을 했고요. 지역에서 생기는 풀뿌리 모임들과 계속 연결해서 릴레이 시위나 문화 행사를 열어요. 여론을 환기시키고 후원금을 모으는 거죠. 연대체 소속 단체가 지금은 105개로 늘어났어요.

 

▲ 미얀마의 시민 단체 ‘저스티스 포 미얀마’(Justice for Myanmar)가 만든 인터렉티브 플랫폼 ‘군부 자금 카르텔 지도’(Cartel Finance Map) 이 프로젝트에 ‘미얀마의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한국 시민사회단체 모임’도 참여했다. 포스코는 가스전 사업, 관광지 개발, 은행 투자 등의 명목으로 미얀마 군부에 한 해 2천억 원 이상의 대금을 지급하고 있다. (출처: https://data.justiceformyanmar.org)


하리타: 기업에 대항한 활동들이 제일 어려울 것 같이 느껴지는데, 어떤 성과가 있었나요?

 

상현: 사실 이게 제일 어려운 부분인 것 같아요. 공기업이나 대기업들은 ‘국익’ 논리를 내세우고, 한국 기업들이 빠져봐야 그 자리를 중국 회사들이 대체해서 결국 같은 상황이 계속될 거란 주장도 있어요. 저희는 기업에 ‘인권 실사’(환경권, 노동권, 소비자권 등 기업 운영과 관련해 발생할 수 있는 제반 인권의 잠재적 침해 상황을 점검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조사,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과정)라도 실시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한국 기업들이 대우그룹(1967~2000년 4대 재벌 기업) 시절부터 국제 시민사회에서 이런 식의 반인권적 행태로 악명 높았어요. 그런데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공론화가 제대로 되질 않았어요. 다른 나라들이 군부 쿠데타 이후 미얀마에서 철수를 하는 상황에서도 한국 기업들은 버틸 수 있는 이유가 한국에 관련 법이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국회가 나서면 이 부분을 법제화할 수 있죠.

 

하리타: 상현 님은 이번 시민모임 연대체에서 어떤 일을 맡아 왔나요? 이전 홍콩 민주화 시위 연대 때와 달라진 점들이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상현: 작년과 재작년에 홍콩 시민들과 연대할 때만 해도 ‘직접행동’을 주로 기획했는데요, 이번에는 공동집행위원장으로서 전반적인 계획과 전략을 짜고 소속 단체들과 협의하는 일을 많이 했어요. 기업에 공개질의서를 발송하거나 국회와 공동 토론회를 기획하는 활동들도 이번에 처음 해보고 있어요

 

맞서는 대상이 중국 정부가 아니라는 점에서, 개인적으론 홍콩과 미얀마 연대의 차이를 느꼈어요. 홍콩 민주화 시위를 지지할 때 중국 정부는 저희한테도 ‘너무 거대한 적’이었거든요. 그래서 어려움이 있었어요. 집회에서 얼굴이 드러나면 중국 입국 금지를 당할 수도 있으니까 사람들이 참여를 꺼린다든가, 지자체 장소 대관이 갑자기 취소됐는데 거기에 중국 대사관이 개입한 정황이 나타나는 식이요. 한편으로는 인권과 민주주의 가치를 위해서 하는 일인데, 한국의 혐중 정서와 연관이 되어서 고민스러웠죠.

 

그런데 미얀마 연대 운동에선 ‘총으로 시민들을 살해하는 군부’에 대항해 논쟁의 여지 없이 정치권까지도 힘을 보탤 수 있어요. 다만, 연대체 초기에는 로힝야 난민 문제에 대한 입장 차이가 있었어요. 로힝야 난민을 박해한 것에 대한 아웅산 수치 정부의 책임을 물을 것인가 하는 부분이었죠. 미얀마 정치권에서 반-군부 통합 정부를 구성할 때도 선뜻 지지하기 어려운 고민들이 있었어요. 미얀마 내부의 반성과 성찰, 로힝야족에 대한 태도 변화가 보이면서 연대 관계에도 조금씩 변화가 생기고 있습니다.

 

마을 탐방 갔다가 발견한 국제 연대의 가능성

 

하리타: 아시아 다른 활동가들과 연결된 경험은 사실 더 이전이죠?

 

상현: 네, 학부 전공이 일본어이고 외국어대학교를 다녀서 다른 나라에 관심이 많았는데, 직접적인 계기는 2017년 무렵 풀뿌리 활동을 할 때였어요. 당시 서울 이주민로서 저 자신이 아직 지역 사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상태였죠. ‘지역 활동’, ‘마을 활동’이라고 하면 건강과 먹거리, 자녀 교육 이슈를 주제로 한 프로젝트 위주고, 중장년 남성이 대표자를 맡고 그 중심으로 공동체 문화가 형성되는 경우가 많아서 청년 여성으로서 주체적으로 활동하기 쉽지 않았어요. 그런데 저 같은 청년 주민들이 사실 많았고요. ‘내가 이 동네에서 어떻게 잘 살아갈 수 있을까’, ‘나 같은 청년들이 마을에서 잘 살려면 뭐가 필요할까’ 고민을 많이 했죠.

 

그러다가 책 『마이너리티 코뮌』(신지영, 갈무리, 2016)을 읽고, 일본의 소수자 커뮤니티 사례에 주목하게 되었어요. 그 중에서도 예전에 『가난뱅이의 역습』(마쓰모토 하지메, 이루, 2009)이라는 책을 통해 접한 적이 있던 일본 코엔지 지역 청년 공동체 사례에 관심이 갔어요. 침체된 상권이 있고 재개발 논의가 돌던 내 활동지역과 비슷한 상황에서 공동체가 시작되었고, 그 상권에 돈 없는 청년들이 들어가서 자유분방하게 이것저것 하면서 동네를 활성화시킨 사례죠. 마침 서울시 마을공동체종합지원센터에 해외연수 및 마을컨퍼런스 공모사업이 있어서 지원했는데 선정되었어요. 동네 탐방단을 꾸려 마을 활동가들이 코엔지 활동가들을 만나러 갔죠.

 

코엔지 마을을 잘 둘러보고, 돌아와서는 코엔지의 주요 활동가인 마츠모토 하지메를 초빙해 동대문구에서 마을 컨퍼런스를 열었어요. 청년들이 주가 되어 반자본주의적 문화예술 활동, 공동체 경제를 기반으로 마을공동체를 활성화한 사례를 듣고 교류했어요. 그때, 도쿄에서 아시아 지역의 활동가, 문화예술인들을 초빙해 페스티발을 연 사례를 전해듣고는 ‘이거다!’했죠.

 

▲ 2017년 9월, 3백여 명의 아시아 활동가와 예술인들이 열흘간 서울과 부산에서 ‘NO LIMIT SEOUL 자치구’ 페스티벌에 참여했다. “동아시아 반란자들의 난리부루-스가 온다! 동아시아의 영구평화와 가난뱅이·아마추어 문화를 마구마구 전파한다. 재개발·전쟁·핵발전 이슈까지 거침없이 풀어놓는 수십 개의 자유로운 이벤트”라고 소개했다. ‘누구도 아웃사이더가 아니다’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기념 촬영을 한 참가자들 모습. (출처: No Limit Seoul 자치구 페이스북 페이지)


서울의 예술인, 공동체들을 연결해 아시아의 활동가들을 초빙해 행사를 여는 것을 계획했어요. 도쿄 쪽엔 이미 장기간 교류를 통해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기획과 섭외에 도움을 받을 수 있었죠. 한국의 활동가들이 준비팀을 꾸리고 사무국까지 구성했어요. 그러면서 경의선 공유지를 비롯한 여러 공동체 공간과 활동가들을 연결했죠. 중국의 ‘농민공 커뮤니티’도 초빙하고 싶어서 물색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알게 되기도 했고요.

 

이 행사가 국제 교류이면서 마을 교류이기도 했던 것이 서울과 부산에 수많은 풀뿌리 시민 단체들이 환대해줘서 가능했거든요. 제가 중랑구로 막 이사왔을 때인데, 마을 총회에서 페스티벌 기획을 발표하니까 주민들이 ‘청년들이 하는 일을 도와주자’며 즉석에서 후원금을 모으고, 숙박 장소나 행사 공간도 무료로 내어주고 음식도 나눠줬어요.

 

하리타: 서울시 지원을 받아 다녀온 일본 마을 탐방이 훨씬 더 큰 국제교류의 물꼬를 터준 셈이네요. 10일 동안 언어도 각기 다른 3백 명의 아시아 활동가들끼리 뭘 했는지 궁금해요.

 

상현: 우선 개막식은 경의선 공유지에서 했는데요, 여기에 지금은 이랜드 기업이 들어와 개발을 하고 있죠. 각자 자국 활동 지역의 젠트리피케이션 상황이 어떤지, 거기에 대한 저항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발표하는 시간에 홍콩, 대만, 몽골 도시들의 사례를 나눴던 기억이 나요.

 

‘이것저것 규탄대회’라는 이름으로 각자의 피켓과 깃발을 들고 서울 도심을 행진했어요. 원래 청와대까지 행진하려 했는데 가는 길에 지쳐서 도중에 돌아와 경복궁역 인근에서 대형 트럭에 밴드 세트를 싣고 공연을 했죠. 아현동, 문래동, 영등포 등지의 공연장, 예술공간을 연결해 공연하거나 세미나를 진행했어요. 성북구 희섬정과 같은 마을 카페 공간도 든든한 아지트가 되어주었어요.

 

▲ 2017년 9월 한달 간 진행된 ‘NO LIMIT SEOUL 자치구’ 페스티벌 중에서, 9월 16일 청계광장 옆에서 열린 <이것저것 규탄대회> 모습. (출처: No Limit Seoul 자치구 페이스북 페이지)


좋았던 일이 많지만, 원활하게만 진행된 건 아니었습니다. 다양한 국가의 지역, 커뮤니티에서 참여한 만큼 젠더 감수성의 차이, 문화적 차이로 인해 여러 문제가 발생했어요. 도중에 그만두어야 하나 생각할 정도로 힘든 상황도 있었고, 주최자로서 무거운 책임을 절감했습니다. 스태프 성평등 교육, 자치구 규약 만들기를 통해 참가자들이 배제 없이 축제를 누릴 수 있도록 고민하고, 젠더 커뮤니케이션 팀을 운영해 축제 기간에 발생하는 젠더 문제들을 모니터링하고 대처하고자 했지만, 한계가 있었죠. 지금까지도 그 상흔이 남아 있고 제가 놓을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해요.

 

그 후에도 동료들과 국제교류 행사들을 이어갔는데요. 콜트콜텍 공장이 폐업하고 노동자를 대량 해고하고 옮겨간 인도네시아 공장 앞에서 연대를 요청하는 항의 행동을 했고, 해고 노동자를 돕는 콘서트를 기획했습니다. 인도네시아 하드코어 펑크씬의 페미니즘 운동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동료들과 직접 번역해 서울에서 상영회를 열기도 했어요.

 

하리타: 시민의 평범한 일상에서 ‘글로컬리즘’(Globalism+Localism)이 일어난 재밌고 희망적인 사례들이네요. 이런 만남들 이후에 접한 홍콩 민주화 시위나 미얀마 군부의 쿠데타 소식은 피부로 와닿을 수밖에 없겠어요. 동료 활동가, 혹은 외국에 사는 친구에게 연대하는 마음으로 아시아 연대 활동가가 된 것 같네요.

 

서울 이주민이 찾은 새로운 집, ‘해방된 마을’ 중랑구

 

인터뷰이들에게 종종 10년 뒤 이상적인 삶의 모습을 그려보라고 하면 대개는 지금과 다른 곳에서 더 많은 권한과 자원을 갖고 활동하는 자신을 상상한다. 그런데 상현은 확고하게 그 때에도 중랑구에 살면서 주민들과 더 깊은 우정을 만들고 있길 바란다고 답했다. 그리고 지역 활동가들이 보다 지속가능성을 갖고 활동할 수 있는 제도와 체계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렇게 동네에 대한 애착이 큰 것은 중랑구가 상현에게 ‘해방된 마을’에 가까운 모습으로, 언제든 돌아갈 집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 지난 5월 27일, 중랑마을넷 기획으로 진행된 유뷰트 생방송 <코로나19 집콕, 돌봄독박여성을 위한 싱글벙글 쑈>를 알리는 웹자보(왼쪽). 상현은 세 VJ중 한 명이다. 오른쪽은 2020년 중랑구 민관 네트워크에서 한 달 간 개최한 컨퍼런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을에서 희망을 찾다> 포스터. 중랑구는 국내에서 풀뿌리 시민활동이 가장 활발한 곳 중 하나다. (출처: https://jungnangmaeul.net)


하리타: 지역활동가로서 얘기했을 때, 중랑구는 어떤 곳인가요?

 

상현: 중랑구 신내동으로 이사를 들어오는 날, 구청 사거리에서 여성주의 강좌 홍보 현수막을 봤어요. 그 때가 2014년인데, 구청 사거리에 페미니즘 강연이 홍보물로 걸려있다는 게 신기했어요. 그리고 지역 주민 500명 넘게 들어와 있는 카톡방에서 누군가가 젠더 감수성에 낮은 말을 하면, 여러 사람이 나서서 조목조목 짚어주었죠. 분쟁이 되는 게 아니라 정화가 되는 것도 자주 목격했고요. 페미니즘의 목소리를 내는 지역 여성들이 많고, 또 오래 활동을 지속하면서 서로 존중하는 문화가 생긴 거예요.

 

한번은 행사 사회를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고 보니 ‘성소수자 부모 모임’을 초청한 간담회였어요. 구청에서 지원을 받는 사업이라 공무원들을 설득하는 게 어려웠을 텐데도 강단 있게 추진한 거죠. 초청받아온 분들도 “막상 우리 동네에서는 불러주지 않는데 멀리 중랑구에서 불러주니 신기하다” 했을 정도예요. 지역의 한 단체에 성노동을 주제로 대관을 신청했을 때도 “지역도 좀 변해야죠”라고 하면서 흔쾌히 공간을 쓰게 해주셨어요. 아, 내가 정말 좋은 동네에서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구나, 느낄 때가 많아요.

 

저는 워낙 호기심이 많아서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는데, 아무리 멋진 경험을 했어도 집에 돌아와서 주변에 사람이 없으면 쓸쓸할 것 같아요. 훌쩍 떠났다가도 다시 돌아와서 내가 겪은 것을 다 나눌 수 있는 동네 동료와 친구들이 있고, 이들과 같이 일하는 단단한 모임들이 있어서 에너지를 많이 받는 것 같아요.

 

논바이너리 후보로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할 수 있을까?

 

하리타: ‘표심에 의존하는 정당 정치가 아니라 풀뿌리 지역 운동이 세상을 바꾼다’는 믿음을 오래 갖고 있었잖아요? 작년 말 서울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을 맡아 활동 반경이 서울이라는 메가폴리스로 커졌고, 내년엔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할 계획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생각에 변화가 좀 있었던 건가요?

 

상현: 여전히 변화의 가능성과 힘은 풀뿌리 운동에서 나온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지역 활동이 정치적 힘을 갖는데 있어서 지금은 문턱이 높아요. 시민들이 동네 문제에서 출발해서 시청이든 국회든 청와대든 갈 수 있어야 하는데, 시민의 일상적인 언어나 고민이 지역 테두리를 벗어나면 사라지는 것을 자주 봤어요. 청원이나 민원을 제기하는 정도로만 지역 주민의 목소리가 제한되고, 지역구 국회의원의 의정보고서나 구청 서류들을 보면 애초에 시민들의 의견은 다른 말로 바뀌거나 사라지는 거예요.

 

그래서 풀뿌리 활동가인 제가 직접 지역과 시민사회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치 소비자/민원인과 정치인으로 구분된, 건널 수 없는 강을 하염없이 지켜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문제라고 생각하고 필요로 하는 것들을 직접 정치의 장에서 풀어야겠다고요. 풀뿌리와 직접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녹색당은 저에게 그 연결고리에요. 정당 연설회를 통해, 정당의 논평을 통해, 풀뿌리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은 강력한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차별적인 지역축제에 맞서 ‘시대착오적인 장미 아가씨 소리 집어치우라’라는 논평을 쓰고, 지역주민들과 함께 성평등과 생태적 가치를 상징하는 커다란 녹색 종이 장미를 들고 퍼레이드를 했을 때, 저는 엄청난 가능성과 해방감을 느꼈습니다. 일상생활의 정치와 투표가 분리되지 않는 정치 환경을 만들고 싶어요.

 

▲ 성차별적인 지역축제에 맞서 ‘장미 아가씨 소리 집어치우라’는 논평을 쓰고, 지역 주민들과 함께 성평등과 생태적 가치를 상징하는 커다란 녹색 종이 장미를 들고 퍼레이드를 했을 때. (출처: 인터뷰이)


하리타: 사실 상현이 출마한다 해도 당선 가능성은 낮잖아요. 물론 당선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지만, 이번 선거 경험을 통해 이루고 싶은 실질적인 목표가 있을 것 같은데요.

 

상현: 지난 4.7 서울시장 보궐선거 때 시민사회에서 ‘기후 후보가 없다’는 목소리가 많이 나왔는데요, 그걸 보면서 ‘녹색당이 나섰어야 하는데’ 싶어서 너무 아쉬웠어요. 이번 선거에서는 녹색당이 기후 정치를 통해 사회 전환을 이룰 유의미한 정치세력으로 자리매김했으면 해요.

 

기후위기는 기업에 대한 투자나 기술적 해법만으로 풀 수 없잖아요. 탄소중립하겠다면서 석탄화력발전소를 신규 건립하는 기만적인 정부 노선에 단호하게 맞서야 하는데, 그게 녹색당이 지금까지 해온 일이에요. 관성적으로 녹색성장을 읊는 것이 아니라 대안을 제시해야죠. 그리고 서울시민들이 이미 일상 언어로 말하고 실천하고 있지만, 아직 전환의 청사진으로 충분히 정치화되지 않은 것들- 예를 들어 도시텃밭, 에너지 자립, 함께 돌봄, 순환경제, 생태, 존엄 등을 과감하지만 또한 친숙하게 기후위기 해법으로 말하고 싶어요.

 

하리타: 저는 상현이 ‘논 바이너리’(Non-binary 남성과 여성 둘로만 분류하는 젠더 구분을 벗어난 성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로 성별 표기를 하고 출마할 수 있을지도 궁금합니다. 작년 말 녹색당 당직자 선거에서 그렇게 했을 때는 좋은 의미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요, 공직자 선거의 경우엔 난제가 훨씬 많겠죠. 한국은 주민등록부터 모든 행정 체계에서 성별 표기가 아직도 여성/남성 두 가지뿐이라서…

 

상현: 당직자 선거에서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직관적으로 생각해보니 총선 때 비례대표 후보로 나왔었고 그 밖에도 활발히 활동했던 트랜스젠더 고 김기홍 당원의 존재감이 컸던 것 같아요. 그 분을 보면서 ‘이렇게 해도 괜찮구나’, ‘성 정체성을 드러내고 인정을 받는다는 건 삶과 죽음의 문제이고 나의 운동에서도 중요하다’는 깨달음을 얻은 거예요. 선거준비팀에서 아직 논의하지는 않았지만, 저도 저의 얘기를 하고 젠더를 가시화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연대하는 목소리를 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필자 소개] 하리타(정세연). haritamoonrider@gmail.com 독일과 한국, 그 밖에 매일 여러 경계들을 넘나들며 사는 경계인 페미니스트 작가입니다. 해외에 거주하는 한국 여성들을 인터뷰하는 팟캐스트 “탈조선, 다음이야기”를 진행 중입니다! linktr.ee/Talda_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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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인생은요?

미국에서 출판된 한국계 미국 이민자인 저자 성sung의 첫 책을 한국어로 번역한 책이다. 아동기에 한국을 떠난 저자는 현재 대학원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하고 있는 밀레니얼 세대이다. 이민 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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