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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앞에서 만나] 영화 <개 같은 날의 오후>

 

 

≪일다≫ ‘옥상’에서 내려올 수 있어야 한다

영화 속 옥상 “옥상으로 따라와.” 싸움 실력을 갈고 닦은 주인공이 그동안 학우들을 괴롭혀온 일진을 옥상으로 불러낸다. <말죽거리 잔혹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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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옥상

 

“옥상으로 따라와.” 싸움 실력을 갈고 닦은 주인공이 그동안 학우들을 괴롭혀온 일진을 옥상으로 불러낸다. <말죽거리 잔혹사>(유하 감독, 2004) 속 옥상은 비뚤어진 남성성이 폭발하는 공간이다. 영화 속 학교의 ‘옥상’은 더이상 갈 곳 없는 공간적 특성을 이용하여 학교폭력의 클리셰로 많이 사용된다.

 

‘배트맨 시리즈’에서는 경찰청 옥상이 등장한다. 여기서 옥상은 배트맨의 구원을 요청하는 박쥐 모양의 ‘배트 시그널’을 쏘아 올리는 공간이다. 경찰, 인간, 공권력의 힘으로 세상의 악을 다스릴 수 없을 때, 궁지에 몰린 도시는 남성 영웅을 호출한다.

 

<밍크코트>(신아가, 이상철 감독, 2012)에는 병원의 옥상이 나온다. 친엄마가 병상에 누워있는 상황에서 자신만의 신앙으로 버티고 버티던 주인공은 만삭의 딸까지 위독한 상황에 처하자 병원 옥상으로 올라간다. 끓는 용암처럼 울부짖고는 하늘을 향해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은다. 인간이 손을 쓸 수 없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주인공은 배트맨을 부르듯 신을 부르는 듯하다.

 

옥상은 이렇듯 건물 안에서 더이상 수가 없는 인물들이 찾아가는 공간이다. 학교의 옥상은 학교폭력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학교의 실패이고, 경찰청의 옥상은 악이 팽배한 세상에서 공권력의 나약함, 병원의 옥상은 생사의 기로 앞에서 인간과 의술의 무력함이다. 옥상은 주인공이 몰릴 대로 몰린 영화의 절정이나 끝 무렵에 많이 등장한다.

 

▲ 영화 <개같은 날의 오후>(이민용 감독, 1995) 중에서


<개같은 날의 오후>(이민용 감독, 1995)에서는 옥상이 메인 무대다. 학교도, 경찰청도, 병원도 아니고 ‘장미아파트’ 옥상이다. 일상적 공간인 아파트 옥상으로 10명의 여성이 우당탕탕 올라온다. 이들은 일상이 궁지에 몰려있기 때문이다.

 

옥상 위 여성들

 

40도를 넘는 폭염으로 각 세대가 냉방을 돌리자 장미아파트의 변압기가 터져버렸다. 집에 있기조차 힘든 아파트 주민들은 아파트 앞마당으로 나와 수박을 쪼개 먹으며 더위를 달래본다. 그 때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정희가 아파트 밖으로 도망 나오고 남편은 쫓아 나와서 구타를 계속한다. 남성 주민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집안일이라며 시큰둥하게 반응한다. 반면, 여성 주민들은 피해자를 돕고 가해자를 말리려다가 다치기도 한다. 와중에 다른 남성, 영희 아빠가 아내(영희 엄마)의 뺨을 때리고, 분노에 치민 여성들은 모두 합심해 남성들을 패며 난장판이 벌어진다.

 

이내 경찰이 도착해 싸움을 말리는데, 정희를 지독히 괴롭혔던 남편은 이미 사망했다. 경찰이 여성들을 전부 살인범으로 체포하려 하자 당황한 주민들은 우왕좌왕 아파트로 들어가 버린다. 몇 명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지만 당황한 통에 옥상까지 올라와 버린 9명의 여성과 태연히 옥상에서 선탠을 하던 기순까지, 총 10인의 여성이 살인범으로 체포하겠다는 지상의 경찰들에 맞서 농성을 시작하게 된다.

 

가정폭력 피해자, 트랜스젠더 여성, 호스티스 여성, 바람피우고도 큰소리치는 남편의 아내, 결혼하지 않은 1인가구 여성, 남편과 함께 식당을 하며 남편보다 두 배 세 배 더 일하지만 자신 명의의 재산이 한 푼도 없는 여성 등 10인의 여성 캐릭터는 다양한 차별을 상징적으로 담고 있다.

 

▲ 영화 <개같은 날의 오후>(이민용 감독, 1995) 스틸컷


이들의 연대는 처음부터 갈등을 겪는다. 영희 아빠와 바람을 피우는 1인가구 여성 기순과 영희 엄마의 마찰이 첫 번째 갈등이다. 기순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에어컨 수리 기사인 영희 아빠가 기순을 강간한 것에서 시작된 관계이다. 하지만 영희 엄마는 계속해서 기순을 미워한다.

 

두 번째 갈등은 방송기자가 가정폭력 피해자 정희에게 휴대전화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다. 아직 피해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정희가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채로 휴대폰 배터리가 나가자 몇 여성들은 정희를 질책한다.

 

옥상 밑 경찰들도 갈등을 조장한다. 가정폭력 피해자 정희에게 남편이 사망한 사실을 알리며 남편을 죽인 살인범들과 함께 있는 기분이 어떤지 묻고, 호적 정정 전인 트랜스 여성을 남성으로 지칭하며 내려오라고 하는 등 치졸한 방법이다. 트랜스 여성 유미의 호적 얘기로 옥상 위 여성들은 또 한 번 크게 갈등을 겪는다. 유미를 여성이 아닌 ‘게이’로 지칭하기도 하고, 부녀회장은 밤무대 가수라고 할 때부터 꺼림칙했다며 비난한다. 그 말을 들은 술집 호스티스 윤희가 왜 사람을 직업으로 천대하냐며 분개하고 옥상은 또 한 번 난장판이 된다. 하지만 이내 정희와 또 다른 가정폭력 피해자인 경숙이 ‘우리끼리 이러는 걸 바라는 사람들은 저 아래 남자들일 거예요’라고 말리며 진정이 된다.

 

옥상은 지상보다 더 태양과 가깝다. 더 뜨겁고 따가운 곳에 있는 사람들의 불쾌지수는 지상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끝까지 연대한다. 시작은 어설펐지만, 과정은 험난했지만, 결국엔 카메라 안에 10명의 여성이 모두 들어온다.

 

<델마와 루이스>의 에필로그가 있다면

 

영화에는 총 세 번의 밤과 그에 따른 세 번의 아침이 나온다. 농성 첫날 밤, 옥상 위 사람들은 각자 서로를 소개한다. 다음 날 아침, 남성들은 여성의 부재로 인한 어려움을 겪는다. 양말이 어디 있냐며 옥상에 대고 소리를 치기도 하고, 식당에서 조리를 하며 배달까지 하는 아내가 없자 남편은 속수무책이다.

 

이튿날 밤, 옥상 밖의 여성들이 암벽등반 기술과 로프를 이용하여 음식을 전달한다. 쫄쫄 굶던 옥상 여성들은 허겁지겁 빵을 먹으며 자신이 겪었던 차별과 혐오를 조금 더 표현한다. 회사들이 160cm 이상, 50kg 이하 여성만 뽑아 지원했던 곳에서 전부 탈락한 일, 자신 또한 정희처럼 폭력을 겪었던 일 등을 나눈다. 셋째날 밤은 유미의 생일 파티다.

 

영화 속에는 다양한 혐오와 차별, 그리고 권리에 관한 이야기가 폭포처럼 쏟아진다. 국회의원 여성 할당제, 트랜스젠더 성별 정정 권리, 비혼 여성에 대한 차별, 가정폭력, 성노동 여성에 대한 혐오, 그리고 대체로 아내 명의로 재산을 두지 않던 당대의 가부장적 문화 등, 영화가 진행 될수록 지나가는 대사 하나하나가 전부 주옥같다.

 

필름의 쨍한 색감과 거친 카메라 워크로 담아 영화 전체가 생동감 넘치는 자료화면을 보는 것 같은 효과를 준다. 통계자료와 서사를 적절히 섞은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과도 유사하다. 하지만 문학과 영화는 다르다. 실제 사람이 등장하여 연기를 하고, 그것이 그대로 카메라에 담기는 영화는, 문학에 문학만의 윤리가 있듯 영화만의 윤리를 지켜야 한다. 초중반 부의 불필요한 노출씬, 베드씬과 트랜스 여성 유미를 배제하는 씬에서 드러나는 과한 폭력씬은 이 영화의 목표에 걸맞지 않은 방식이며 실패한 씬이다.

 

▲ 영화 <개같은 날의 오후> 중에서


처음에는 어설프고 혐오가 오가던 옥상 위는 경찰과의 대치가 진행될수록 더 단단해진다. 이 농성은 옥상 위에 올라간 자들만의 이득을 위함이 아니다. 옥상 밑에서 안전히 살기 위한 이 운동에 옥상 밑의 여성들도 동조하여 가사노동을 중단하고 지지와 응원을 보낸다. 가장 뜨거운 곳에서 세상을 바꾼 셈이다.

 

그리고 4일 째 아침, 강경진압이 이뤄지고 그 뜨겁던 여름에 드디어 비가 내린다. 옥상 위 여성들은 단비를 반기고, 옥상 밑 아파트 광장으로 수많은 여성들이 성차별 사회 속 외침을 적은 피켓을 들고 들어온다. 그들의 수는 진압 경찰 수에 비할 바 없이 훨씬 많다.

 

이 영화의 엔딩은 사회에서 내몰린 두 여성이 경찰들에게 포위당하자 차를 타고 절벽으로 질주하는, 그리고 그 허공 위의 모습에서 멈추는 <델마와 루이스>(리들리 스콧 감독, 1991)를 연상케 한다. <델마와 루이스>의 엔딩이 극한의 상황에서 최선의 자유라면 <개같은 날의 오후>의 엔딩은 <델마와 루이스>의 에필로그 격이다. 인물들은 델마와 루이스처럼 허공으로 점프를 하지만 옥상 밑 경찰들이 깔아놓은 매트리스 위로 안착한다. 그렇게 진압대원들에 의해 끌려가지 않고 자신들의 방법으로 지상에 내려온 뒤, 제 발로 경찰버스에 올라탄다.

 

과정에서 호스티스 윤희가 시종일관 밑에서 꼴사납게 굴던 기동 대장에게 악수를 청하기도 한다. 항상 영화에서 대상화되던 직업의 여성이 줄곧 주인공을 맡아오던 직업의 남성에게 건네는 이 악수는 끝까지 구조를 전복시키는 쾌감을 준다.

 

주인공이 없는, 아니 많은 영화

 

이 영화에는 주인공이 없다. 아니 아주 많다. 다른 영화에서 흔한 원 샷, 투 샷이 나오긴 하지만 한 인물이 겪은 차별 경험에 주목할 때나, 서로 입장이 갈릴 때에 종종 사용될 뿐, 대체로 보기 드문 군중 샷이 많이 나온다. 7,8명씩 한 앵글에 잡히는 것은 허다하고 10명이 잡히기도 한다. 마치 관객을 두고 인물들이 빙 둘러앉은 듯한, 군중 속에 관객을 위치시키는 효과를 준다. 더운 여름, 옥상에서 농성 중인 역할의 배우들은 화장보다는 땀 분장으로 범벅이 되어있고, 그들을 여러 명씩 화면 가득 담는 카메라 덕에 보는 내내 그들의 땀냄새를 맡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다. 영화는 관객을 옥상 위에 앉히고, 주인공 없는 이 영화의 크레딧 어디쯤에는 내 이름도 등장할 것 같다.

 

옥상 밑을 다루던 초반부에는 인물들이 서로 각각의 아파트에 분리되어 교차편집으로 보이지만, 변압기가 터진 순간부터 이들은 앵글 안으로 모인다. 영화는 누구 한 명의 서사에 집중하지 않고 여성, 소수자, 약자, 성차별에 주목한다. 그리고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옥상 위만이 아니다. 옥상 위에 올라간 여성의 자녀와 반려견을 대신 돌봐주며 응원하는 주민, 식량을 건네준 여성 특수부대원, 지지와 연대를 보낸 여성단체들, 마지막에 다함께 피켓을 들고 나타난 수많은 여성들까지. 영화는 다양한 투쟁의 방식과 연대의 방식을 조명한다.

 

그리고 그 방식에는 혐오와 배제가 없다. 옥상 위에 올라올 ‘자격 요건’ 같은 것은 없다. “이 옥상에 깨끗하고 잘난 여자들만 있어야 된다는 법 있어?” 호스티스 윤희의 이 대사처럼 외롭고 소외된 자들은 누구나 올라올 수 있다. 그리고 누구나 올라올 수 있듯, 누구나 반드시 안전하게 내려갈 수 있어야한다.

 

▲ 영화 <개같은 날의 오후> 엔딩 씬


가정 내 성차별과 폭력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더군다나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난 코로나 시국, 누군가에게는 ‘집콕’이 또 다른 재난일 것이다. <개같은 날의 오후> 속 여성들은 연대로 폭염을 식히고 빗방울을 맞이했다.

 

정반대에 있는 것 같아 보이는 약자성과 혐오는 서로 닮은 특성이 있다. 교차한다는 점이다. 사회적 약자, 소수자성 하나만 지지하는 사람도, 하나만 혐오하는 사람도 존재하기 쉽지 않다. 어떤 약자성을 혐오할 때 그것이 내가 가진 약자성에 가닿지 않으리란 법 없다. 그래서 배제하는 방식의 페미니즘은 이름표만 빌려온 혐오다. 아무리 폭염이 내리쬐는 불쾌한 옥상에서도 우리는 명확히 알아야 한다. 우리를 여기에 올려놓은 존재들은 지상의 시스템이란 것을.

 

10인의 여성이 경찰서 이송 버스에 타는 모습으로 이 영화는 끝이 난다. 그들은 웃지도, 울지도, 허망해하지도, 통쾌해하지도 않는다. 그들의 모습이 사진처럼 멈추고 크레딧이 죽 올라간다. 시나리오 작가는 엔딩을 무엇이라고 적었을까. 10여 년 전, 서점에서 사 왔던 <개같은 날의 오후> 시나리오 책을 펼쳤다. 시나리오 책의 마지막 두 줄로 글을 마무리한다.

 

버스에 2열로 앉은 10명의 여인들.

그 편안하고 자신감 넘치는 표정들이 화면을 가득 메우면서. 

 

[필자 소개] 신승은: 싱어송라이터이자 영화감독. 1집 앨범 [넌 별로 날 안 좋아해](2016), 2집 앨범 [사랑의 경로](2019)를 발매했으며 단편영화 <마더 인 로>(Mother-in-law, 2019), <프론트맨>(Frontman, 2020) 등을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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