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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대 한인 여성 이민자의 눈으로 포착한 변화

 

 

 

≪일다≫ 아시안 이민자 서사의 흐름과 영화 ‘미나리’

휴대폰 화면에 비친 두 노인은 또 늙어 있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막 확산되기 시작했을 때 호주로 돌아온 뒤, 한국에 가 보지 못했다. 지난 설날에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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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폰 화면에 비친 두 노인은 또 늙어 있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막 확산되기 시작했을 때 호주로 돌아온 뒤, 한국에 가 보지 못했다. 지난 설날에서야 의무감으로 부모님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 이제 유치원을 다니기 시작한 아이는 카메라를 쳐다보려 하지 않았다. 아이에겐 한국어로 떠드는 엄마도, 엄마의 엄마와 아빠라는 늙은이들도 낯설었을 것이다. 나는 부모님에게 지레 무안해서 양해를 구했다. “애가 말을 못 알아들어서 그래.”

 

아버지는 지금이라도 아이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라고 역설했다. 한국도 곧 중국만큼 강력한 나라가 되어 한국어의 위상이 올라갈 것이라는 나름의 글로벌한 논리에, 사는 곳을 옮겨도 자기 언어는 지키는 중국인들을 본받으라는 민족주의자적 언설을 섞어서.

 

아이에게 왜 이중언어 교육을 시키지 않느냐. 이민자 양육자로서 가장 많이 받은 질문 중 하나다. 사람들은 영어권 국가에 살면서 비영어권 출신 모계나 부계의 언어를 노출시키지 않는 것이 대단한 손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같은 질문에 여러 번 대답하면서, 내가 겁내는 게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이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기 위해 내가 한국어를 사용하다가는, 마침내 아이의 모국어-영어가 나의 제2언어-영어를 월등히 넘어서고, 언젠가는 아이가 나에게 말 걸기를 그만둘지 모른다는 두려움!

 

어차피 배우자와 나의 출생 국적이 달라서 우리에게는 물려줄 공동의 문화 유산이랄 것도 없다. 그러나 영어를 사용하고, 김치도 먹지 않고, 계보를 강조하지 않는다고 해서 아이가 스스로를 순정한 호주인으로 느낄까? 그럴 것 같지도 않다. 비-아시아인들은 이런 아시아인들을 ‘바나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겉은 노랗지만 속은 하얀 바나나. ‘백인종’의 사고를 내면화한 ‘황인종’의 신체를 시각적으로 비유한 차별적 비속어다.

 

▲ 넷플릭스 하이틴 로맨스 영화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3: 언제나 그리고 영원히>(2021) 중


아시아계 2세대의 불안정한 문화적 소속감

 

아시아계 2세대 교포들의 문화적 정체성은 자주 웨스턴 선주민의 인종주의적 인식과 불화한다. 가령, 한국계라면 당연히 케이팝과 K-드라마에 정통할 거라고 기대되지만, 2세들과 ‘고국’의 친연성은 생각보다 느슨하다. 이런 특성은 몇몇 영화 속 배경에도 반영돼 있다.

 

넷플릭스 하이틴 로맨스 영화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3>(2021)의 도입부에는 주인공 라라 진 가족의 한국 관광 모습이 담겨있다. 라라 진은 백인 부친과 한국인 모친 사이에서 태어난 하프 코리안이지만, 한국 본토의 물정에 빠삭하지는 않다. 일찍이 어머니를 여읜 라라 진과 자매들은 서울이 초행길이고, 이 가족의 한국 방문은 외국인들의 명동 관광 코스를 지루하게 빼다 박았을 뿐이다.

 

중국계 미국인 감독 룰루 왕의 자전적 영화 <페어웰>(2019)에서는 이민자 정체성을 둘러싼 내외부의 흥미로운 알력을 엿볼 수 있다. 주인공 빌리(아콰피나 분)의 부친이자 미국 1세대 화교인 하이얀은 “미국 여권을 가진 우리는 미국인”이라고 주장하고, 일본 1세대 화교인 삼촌 하이빈은 “어디서 살든, 어떤 여권을 가졌든 나는 어디까지나 중국인”이라며 대치한다.

 

중국 장춘에서 재회한 친족들 사이에서 빌리 가족은 서구 문화에 물들어 젠체하는 반쪽짜리 중국인 취급을 당하지만, 빌리는 자신에겐 전부였던 세계를 버리고 고작 여섯 살에 고독의 땅에 떨어졌던 충격과 슬픔을 이야기한다.

 

▲ 중국계 미국인 감독 룰루 왕의 자전적 영화 <페어웰>(2019) 등장인물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존 추 감독, 2018)은 어떤가. 싱가포르 재벌가 아들인 닉 영의 집안에서 중국계 미국인 2세대 레이첼 추를 받아들일 수 없는 수많은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중국인 며느리답지 않게 미국적이라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부모의 고향에서는 ‘너무 외국인’이고, 자신의 고향에서는 ‘어차피 아시아인’인 이들은 진짜배기로 인정받지 못하고 양쪽에서 기각 당하는 위치에 놓여 있다. 이주민 2세대가 문화적 소속감을 둘러싸고 느끼는 이 괴리감과 수치심은 ‘인종적 가면 증후군’이라고 불리기도 한다.(관련 BBC 기사: Racial Impostor Syndrome: When you're made to feel like a fake)

 

아시아라는 기형적 프릭 쇼(freak show)

 

2세대 아시안 교포들은 서구 사회를 상대로 우리가 누구인지 표현하기 시작했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은 <조이 럭 클럽>(웨인 왕 감독, 1993) 이후 20년만에 아시안 배우 중심의 캐스팅을 한 할리우드 영화다. 국내에는 잘 소개되지 않았지만 북미에서는 역대 로맨틱 코미디 5위에 들만큼 어마어마한 흥행성적을 기록했다. 이 영화의 성공은 무척 상징적이었다.

 

영화는 주인공들의 사랑을 ‘가족의 인정’이라는 관문에 통과시키는 과정을 그린 계급차 극복 로맨스로, 부유층 화교 커뮤니티와 중국계 이민 가정을 스크린에 올린다. 유교적 가치관과 속물적 사고방식을 가진 닉의 가족, 싱글맘으로 미국 정착을 위해 분투했던 레이첼의 모친 캐릭터 등은 싱가포르 출생 화교인 원작 소설가 케빈 콴(Kevin Kwan)의 개인사를 반영하고 있다. 실제로 2세대 교포의 창작물은 자전성이 짙은 경우가 많다. 원하건 아니건 혈통에 정박 당하는 이들에게 부모 세대는 자기-서사의 퍼즐을 완성시키는 조각인 것이다.

 

▲ 존 추 감독의 영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2018) 중. 출연진이 전부 아시안인 할리우드 로맨틱 영화로, 흥행에 크게 성공했다.


그러나 교육 자본이나 문화 자본을 갖지 못했던 이민 1세대가 다음 세대의 시선을 경유해서만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 때, 1세대는 이중의 타자화라는 위험에 놓이게 된다. 첫째는 2세대와의 문화/언어 격차로 인한 타자화이고, 둘째는 아시안 스테레오타입을 물색하는 서구적 시선에 의한 타자화다.

 

토론토에서 편의점을 운영하는 한인 가족의 일상을 코믹하게 그려낸 <김씨네 편의점>은 캐나다에서 만든 드라마인데, 한국계 캐나다인 작가 인스 최(Ins Choi)의 연극을 확장한 시트콤이다. 구시대적인 부모와 계몽된 자녀들이 지속적으로 충돌하는 가운데, 반일감정에 불타며 아집이 심한 아버지, 한인 교회에 의탁하는 성보수주의자 어머니, 그리고 복수형이나 시제를 도무지 활용하지 못하는 이 부부의 ‘브로큰 잉글리시’는 극 초반부의 주요 웃음 포인트다.

 

<김씨네 편의점>이 주는 위화감은 작가들이 한국 현지의 문화와 깊게 관계하고 있지 않으면서도 과장된 전형화를 시도한다는 점에서 나온다. 이를테면 김씨 부부의 감수성은 1970년대쯤 미주 대륙으로 이주한 1세대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며 개연성을 참작해보겠지만, 이 동시대 시트콤이 방영을 시작했던 2016년 당시 김씨 부부의 딸 자넷은 갓 스무 살이었다. 20대 한국 여자를 대표하는 인물인 ‘나영’의 잘못된 캐리커처도 한국 시청자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부분이다. 야단스럽고 천진난만한 성격에 양갈래로 묶은 보라색 파마머리, 요란한 패션이라니…. 그럼에도 작가가 한국계라는 이유만으로 보증되는 신뢰는 한국계 이주민, 나아가 아시아인에 대한 편견을 확산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체벌을 일삼고, 교육열이 넘치고, 우스꽝스러운 억양을 사용하는 아시안 양육자에 대한 서구 사회의 일반화는 실질적으로 그 자녀인 2세대 교포들이 승인한 것이기도 하다. 한국계 미국 배우 켄 정이 스탠드업 코미디 쇼에 올라 부모의 ‘아시안성’을 희화화할 때 객석에 앉은 백인 관객들이 얼마나 즐거워하는지 보라. 이런 풍경은 우리가 스스로 아시안 진열장 속으로 걸어 들어가 구경거리를 자처하고 있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 캐나다 시트콤 <김씨네 편의점> 시즌 1(2016)의 에피소드 4 ‘프랭크와 나영’(Frank and Nayoung) 편에서.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크레이지 벗 낫 리치 아시안 

 

말하자면 한국계 이민자 1세대가 스스로를 깊게 연루시킬 만한 영화나 드라마는 흔치 않다.  화교들의 기함할 재력이 그 자체로 스펙터클이었던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슈퍼 리치 동양인 클럽은 최근 넷플릭스 리얼리티 쇼 <블링블링 엠파이어>(2021)에서 실사화되었다. 한국계 입양 미국인인 케빈을 제외한 주요 인물들의 소비 규모에는 한계가 없고 품목에도 제한이 없다. 난임 부부 가브리엘 추와 크리스틴 추는 대리모를 고용해 둘째 아이를 ‘가지려’ 한다.

 

남부연합기(Confederate flag, 미국 남북전쟁 당시 노예제도를 지지한 남부연합 정부의 공식 국기)가 휘날리는 사우스 캐롤라이나에서 “너희들 땅을 다 사 버리겠다”고 큰소리치며 인종차별주의자들을 쫓아버리는 출연자 케인의 배짱은 그의 두둑한 지갑에서 나온다. 시청자인 나의 역할은 ‘레드넥’(redneck, 미국 남부의 보수적 정치성향을 가진 가난하고 교육수준 낮은 백인 농부들에 대한 멸칭)과 아시안 재벌의 인종적 위계를 뒤집는 자본주의의 역학에 혀를 내두르는 것 정도일 테다.

 

최상위 재력의 특권층이 아니더라도, 아시안 이민자의 재현은 중산층 이상, 고학력, 대도시 거주자, 차이니즈-아메리칸 가정의 2-3세대에 쏠려 있다. <세이빙 페이스>(앨리스 우 감독, 2004)의 촉망 받는 외과의사 윌,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경제학과 교수 레이첼, <페어웰>에서 경제적 독립을 위해 애쓰는 중인 작가 지망생 빌리의 지역 기반은 모두 뉴욕이다. <김씨네 편의점>의 부부 또한 이미 자녀들을 사회에 진출시키고 한시름 놓은 와중이다.

 

최근 이 흐름에서 살짝 비껴 나 있는 영화들이 나오기 시작한 건 반가운 일이다. <세이빙 페이스>를 만든 앨리스 우 감독의 두 번째 영화 <반쪽의 이야기>(2020)는 가상의 미국 소도시를 배경으로 한다. 영화는 백인 학생들의 과제를 대필하며 생활비를 긁어 모으고 있는 차이니즈-아메리칸 청소년 레즈비언 엘리 추의 사랑과 성장을 그리고 있다.

 

▲ 앨리스 우 감독의 영화 <세이빙 페이스>(2004)의 한 장면.


추락한 ‘남성성’의 회복을 꿈꾸는 제이콥의 무모한 도전

 

이 아시안 이민자 서사의 지형에서 <미나리>(리 아이작 정/정이삭 감독, 2020)의 위치는 눈여겨볼 만하다. 물론 <미나리>도 자전적인 가족 드라마기는 하다. 영화는 1세대 재미교포 부부 제이콥(스티븐 연 분)과 모니카(한예리 분)가 이동식 트레일러 하우스에 두 아이를 싣고 녹음 속으로 들어가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이들은 캘리포니아 생활을 정리하고 아칸소주로 ‘귀농’하는 길목에 있다.

 

미국 콜로라도주에서 태어난 리 아이작 정 감독은 아칸소로 이주했던 어린 시절을 토대로 <미나리>의 시나리오를 썼다. 이윽고 모니카의 모친 순자(윤여정 분)까지 합류하며 3대를 형성하는 이 가족 중에 감독의 분신은 막내아들 데이빗(앨런 김 분)이라 하겠지만, <미나리>는 유년기의 노스탤지어를 복원하거나 어린이의 눈으로 어른을 관찰하는 영화는 아니다. 시점은 자주 제이콥에게, 때로는 모니카와 순자에게로 이동한다. 낯선 벽지에서 몸부림하는 어른들의 내밀한 사정이 숨어있다.

 

모니카와 제이콥은 10년 차 교포다. 1970년대에는 한국에서 미국으로, 1980년대에는 미국 서부에서 남부로 두 차례의 대이동을 거듭했지만,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정착했다는 인상은 아니다. 오히려 아칸소로의 이주는 도박에 가까워 보인다. 캘리포니아의 병아리 부화장에서 쌓은 노동의 결실은 50에이커의 미개간지와 바퀴 달린 집으로 맞바꿨다.(거기다 대출금이라는 혹도 붙었다) 제이콥은 별다른 농기계도 없이 온종일 척박한 땅 일구기에 매달리고, 여전히 병아리 감별사로 일하는 모니카는 조숙한 딸과 심장질환을 앓는 아들의 주 양육자 역할까지 해내야 한다. 딸 모니카를 돕기 위해 아칸소로 날아온 순자는 데이빗에게 “한국 냄새” 나서 싫은 할머니다. 가족 구성원 누구에게도 녹록지 않은 1980년대 아칸소의 목가적인 풍경은 막막한 심정을 배가시킨다.

 

▲ 리 아이작 정/정이삭 감독의 영화 <미나리>(2020)

 

<미나리> 가족의 위기는 근본적으로 모니카와 제이콥의 동상이몽에서 비롯된다. 병아리 궁둥이 들여다보는 일에서는 재미도 보람도 느끼지 못하던 제이콥은 농장 경영자로 변신해 가장의 리더십을 뽐낼 심산이다. 하지만, 아칸소로 와서 더 큰 고립과 불안에 시달리게 된 모니카에게 병아리 궁둥이 들여다보는 일은 문제도 아니다. 투자 안정성, 거주 지속성, 병원 접근성, 인종 다양성이 없는 환경… 캘리포니아로 돌아가야 할 현실적인 이유들은 넘쳐나지만, 제이콥의 맹목적인 야심 앞에서 번번이 가로막힌다.

 

‘가부장’으로서 제이콥의 의지가 관철될수록, 아칸소행은 그의 남성성 회복을 위한 여정으로 읽힌다. 비장애인-이성애자-한국 선주민 남성으로 나고 자란 제이콥에게 있어서 이민은 그동안 누렸던 신체와 인종적 특권이 비정상성으로 급강하하는 경험이었을 것이다. 만족스럽지 않은 생계부양 능력과, 수평아리를 골라내 분쇄기로 보내는 노동은 그의 남성성을 더욱 실추시킨다. “수컷은 맛이 없기 때문”에 선택되지 못한다는 어긋난 설명을 통과해(수평아리는 재생산 능력이 없어 ‘경제성’이 떨어진다는 이해타산에 의해 폐기처분 당한다) 제이콥은 그러므로 “수컷은 맛이 있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땅을 갈고 터전을 닦아내는 ‘땀 흘리는 몸’, 사나운 자연을 ‘정복하는 몸’은 제이콥이 선택한 새로운 남성성 모델인 셈이다.

 

‘한국적’인 것과 ‘미국적’인 것의 경계에서 

 

1990년대까지만 해도 미주 한인 하면 연상되는 직종은 세탁소와 슈퍼마켓이었다. 편의점을 배경으로 전형성을 확보하려 시도했던 <김씨네 편의점>과도 달리, <미나리>는 비교적 덜 가시화된 과거에 접근한다. 제이콥과 모니카의 노동은 1960년대 일본에서 전파된 병아리 감별 기술이 문을 열었던 한인 이주의 역사를 담고 있다. 그러나 ‘1970년대 미국, 병아리 감별, 한인’이라는 보편성은 ‘1980년대 미국, 컨트리, 농부’라는 특수성으로 선회하며 독특한 교차점을 만들어낸다.

 

<미나리>의 외신 리뷰에서 종종 제이콥을 미국화된(Americanized) 인물로 평가하는 것은, 그의 ‘남성적’ 행보가 1880년대 미국 서부 황무지를 개척하던 빈농들의 아메리칸 드림과 겹쳐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라 스마시가 『하틀랜드』(반비, 2020)에서 추적했던 것처럼, 미국의 1980년대는 공장식 농업이 확산되고, 땅값이 추락하고, 대출 이자가 치솟아 농업인구 유출이 가속화되던 시대였다. 이 ‘농가위기(farm crisis)’의 맥락에서 제이콥의 전망을 바라본다면, 병아리 감별이건 농사건 도시의 중산층에게는 보이지 않는 변두리의 이주민 노동이라는 점에서는 매한가지다.

 

▲ 리 아이작 정/정이삭 감독의 영화 <미나리>(2020) 중에서

 

<미나리>의 미덕은 고국에 발을 걸친 1세대 교포를 전형화함으로써 갈등을 길어내는 구도를 벗어나, 인물의 면면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려는 겸손한 태도에서 나온다. 이 가족의 삶에는 충돌하는 가치들이 뒤섞여 있다. 수맥을 찾아준다는 백인 다우저(dowser)에게는 “한국인은 머리를 쓴다”며 선을 긋지만, 유일한 농장일꾼인 폴 앞에서는 “한인을 절대 믿지 말라”고 말하며 흥분하는 제이콥의 민족의식은 분열되어 있다. 커뮤니티 기능을 기대하며 교회를 기웃거리는 한국적 개신교도인 모니카는 펜테코스트파(방언, 간증, 성령의 초자연적 힘과 병 고침 등을 강조하는 기독교파) 교인들이 행하는 성령치료의 도움을 받기에 이른다. 또래 백인 사이에서 모멸을 겪는 한편으로, 마을에서 공공연히 괄시당하는 백인 이웃 폴에게 친한 내색을 할 수 없을 때 데이빗의 양심은 할퀴어진다.

 

먹고 살기가 급박해질수록 ‘순정 한국인’으로 남거나 ‘충분히 미국인’이 되거나 하는 걸 살필 겨를이 없는 이 가족은 어색하고, 어중간하며, 이도저도 아니다. 이것은 내가 느끼는 나의 바로 그 이민자 정체성이기도 하다.

 

‘한국 할머니’ 순자 캐릭터를 보며 드는 양가 감정

 

<미나리>는 윤여정 배우의 호연으로 입소문을 탄 영화다. 연이은 해외 어워드 수상을 알리며 골든글로브에 이어 오스카 여우조연상까지도 점쳐 보게 만드는 윤여정 배우는 이 ‘이도저도 아닌’ 가정에서 지나치게 한국적이라는 이유로 손주에게 배척당하는 할머니를 연기했다.

 

때로는 무례하고 때로는 엉뚱하면서 의외로 사려 깊은 순자는 확실히 데이빗이 그림책에서 봤을 법한 ‘미국적’ 할머니-오븐에 쿠키를 굽고 흔들의자에서 뜨개질을 하는-와는 다르다. 그러나 모니카와 제이콥이 생계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동안, 순자와 데이빗의 관계는 일방적 적대에서 상호유대로 발전한다. 그 과정에서 미안함, 고마움, 그리움이라는 감정에 호소하는 순자는 비백인-교포 2세 관객들로부터 강력한 감응을 견인하게 된다.

 

▲ 영화 <미나리>(정이삭 감독, 2020) 중에서


그러나 순자는 데이빗에게 이방인이었듯, 영화의 주요 인물 가운데 가장 타자화된 캐릭터다. <미나리>에서 순자는 낯설고 기이한 원류의 단서이고, 분열 직전인 가족을 봉합하는 사건이며, 사위가 헛물을 켜는 동안 개울가에 미나리를 심는 지혜의 노인이자, “아무데서나 잘 자라는” 한국 산나물의 생명력을 비유의 다리로 삼아 위로를 제공하는 메신저다. 이 과도한 기능성으로 인해 ‘우리 할머니도 이랬다’거나 ‘한국 할머니들은 이렇다’거나 하는 평균을 추출하려는 시도들은 다소 미심쩍게 느껴진다.

 

재현의 기회를 충분히 누리지 못했던 집단의 일원이 가까스로 틈을 비집고 나올 때, 그 인물의 개인성을 ‘한국-할머니’식의 속성으로 환원하는 것은 쉽게 범해지는 오류다. 이 과도한 대표성이야말로 서구 사회의 인종적 소수자들이 늘상 지고 다니는 부담이 아니었던가.

 

이민 1세대와 2세대,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까

 

주류 문화의 내부자들에 의해 외부자로 취급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그들이 결정한 경계선 밖에서 만나 무리 지어지지만, 결국은 그 무리에서조차 서로를 이방인으로 발견하고 만다. <미나리> 비대면 GV에서 모더레이터로 참여한 이민 2세대 한국계 배우 산드라 오는 영화의 내러티브가 가지는 보편성을 수긍하면서도 코리안-아메리칸 2세대의 고유한 공감대를 강조했다. 2세대로서 “깨닫지도 못한 채 품고 있었던 깊은 슬픔”을 열어젖히고 “흘려보내는” 스크린 경험이었다고 말이다.

 

산드라 오에게 모니카는 30대 시절의 모친을 겹쳐보는 매개였다. 산드라 오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킨 건 한국인의 살결이며 고춧가루를 맛보는 손짓 같은 “육체성(physicality)” 차원의 생활감에 근거한다. 그에게 “피부”로 와 닿는다는 감흥은 나에겐 미지의 영역으로 남을 것이다. 나는 나의 2세대 아이가 떠올릴 그 ‘몸’의 기억을 의식조차 못한 채 기입하고 있는 1세대이므로.

 

단순히 교포라는 이유에서 하나로 묶인 ‘우리’는 과연 매끄러운가. 한국에서 30년을 산 나의 정체성에 쌓이고, 한국을 여행지로 접했을 뿐인 아이의 정체성에 쌓이게 될 문화적 함량의 차이를 다시 한 번 가늠한다. 그로 인해 우리의 대화는 어설프고 본질에서 미끄러지고 닫힌 문 바깥을 빙빙 돌지 모른다. 나 역시 판에 박힌 아시안 부모로써 교포 자기비하 개그의 소재가 될 가능성이 있다. 또는 내가 원하는 것보다 더 애틋한 연민을 받게 될 수도 있다. 다음 세대에 해석되는 방식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물려주고 싶지 않아도 물려줄 수밖에 없을 유산도 알고 있다. 무국적 외로움, 내 것 아닌 시선의 내면화, 내력을 향한 우울한 애증 같은 것들. 이민 2세대를 관통하는 ‘깊은 슬픔’이란 결국 여기에서 출발하지 않는지 짐작해 본다. 그리고 생각한다. 내가 그들에게서 멀어지지 않으려 애쓰듯이, 그들도 나와 같은 사람을 알아내려는 호기심을 포기하지 않기를. 그래서 <미나리>(참고로 이런 측면에서는 <세이빙 페이스>도 무척 훌륭하다) 같은 영화를 보면 작은 희망이 생기는 기분이다.

 

[필자 소개: 탱알. 자유기고가. 보고 읽은 것에 관한 글을 씁니다. <다 된 만화에 페미니즘 끼얹기>(2019)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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