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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법/불법’ ‘노동/결혼’ 교차하는 여성의 이주
<귀환 이주여성을 만나다> 산업연수생이었던 필리핀 여성 레이첼
* 한국 남성과의 결혼을 통해 한국에 입국했다가 본국으로 되돌아간 <귀환 이주여성을 만나다> 기획 연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보도됩니다. 이 기사의 필자 위라겸 님은 전남여성가족재단 연구원입니다.
한국 이민정책 역사가 담긴 레이첼의 가방
귀환 이주여성 현지 조사를 하기로 결정한 이후 조사팀이 걱정했던 것 중 하나는 ‘과연 인터뷰에 응할 여성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점이었다. 국내 이주여성 상담소나 쉼터에서 여성들의 귀환을 지원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쉽사리 연락이 닿지 않겠냐는 기대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귀환 이후에도 연락이 지속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연락이 닿았다 하더라도 시간을 맞출 수 없어서, 또는 인터뷰 장소까지 올 돈이 없어서 등 다양한 이유로 인터뷰가 성사되지 못했다. 반면 SNS 등 이주여성 커뮤니티를 통해 홍보를 하자, 순식간에 많은 지원자가 몰려 이들 가운데 인터뷰 참여자를 정하느라 고심한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실제 인터뷰를 진행하면서는 또 다른 문제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우리는 일단 현지 여성들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인터뷰를 진행했지만, 인터뷰 참여자들은 단지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우릴 만나러 온 게 아니었다.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주기를 바라고 찾아온 것이었다. 이미 대사관에도 찾아가고 변호사를 만나보고 한국에 있는 지인에게 부탁해 사정을 알아보고, 백방으로 노력해온 여성들도 있었다.
이주여성노동자를 지원하는 필리핀 단체 BATIS 센터를 찾아가서 귀환이주여성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통역 지원 이보현.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필리핀에서 만난 레이첼(가명)도 그 중 한 명이다. 인터뷰 장소에 나온 그녀의 가방에는 그동안 한국에 가기 위해, 자녀의 출생등록을 바로잡기 위해, 남편과 사별 이후 상속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아온 서류가 한가득이었다. 20년 넘게 이어져 온 그녀의 이주 경험 속에는 한국의 이민정책과 국제결혼 정책의 역사, 그리고 아시아 여성의 노동과 결혼을 통한 이주의 역사가 그 서류의 두께만큼이나 켜켜이 쌓여 있었다.
귀환 이주여성의 삶은 단순히 1)한국 남성과 결혼해서 한국에 왔다. 2)한국에서 살다가 무언가 문제가 생겨 본국에 돌아가게 되었다. 3)그런데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 즉 한국 정부와 사회가 지원해야 할 문제가 남아 있다. 이렇게 정리되지 않는다. 이주와 귀환, 또다시 이주,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이해하기 위해 레이첼의 삶 속으로 들어가보자.
첫 합법 외국인근로자인 ‘산업연수생’으로 한국에 오다
레이첼은 1994년 봄 처음 한국 땅을 밟았다. 당시 스물한 살이었다. 그 나이에 여자 혼자서 외국에 일하러 가는 것이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진짜 집에 돈이 없었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한다. 언니들은 일찍 결혼해 아이를 키우고 있었고, 동생들은 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집안에서 돈 벌 사람은 그녀뿐이었다. 한국에 도착해서 일하러 간 곳은 필리핀에서 다니던 기업의 공장이었다. 필리핀에도 있고 한국에도 있는 회사, 이른바 해외투자기업에서 일한 것인데 1994년은 이 해외투자기업 근로자가 처음으로 한국에 합법적으로 일하러 올 수 있게 된 해였다.
하지만 이들은 한국에서 ‘근로자’가 아니라 ‘산업연수생’이었다. 실제로는 근로자와 다를 바 없이 일하지만 한국 기업에 ‘연수’를 받으러 온 신분이기 때문에 근로자로 대우해주지 않아도 되는 외국인. 그래서 법에서 정한 노동시간도, 최저임금도, 산업재해 보상도 적용되지 않는, 말 그대로 무법 상태에 놓인 사람들이었다.
당시 산업연수생에 대한 비인간적인 처우가 시시때때로 언론에 보도되었다. 이들이 최초의 사업장에서 이탈하여 조금이라도 처우가 나은 다른 일자리를 찾는 것은 생존을 위한, 그리고 한국에 온 목적을 이루기 위한 당연한 선택이었다. 이렇게 레이첼도 미등록 외국인노동자, 일명 ‘불법체류자’가 되었다.
레이첼은 1998년에 임신한 채로 필리핀에 돌아왔다. 미등록 체류 상태로 한국에서 아이를 출산하고 양육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 아버지는 한국에서 만난 필리핀 사람이었는데, 그는 자녀를 책임질 생각이 없이 떠나갔다.
4년 넘게 한국에서 일하고 돌아왔지만, 필리핀에서의 삶은 그다지 나아진 게 없었다. 여전히 가족들은 지난 4년 동안 그러했듯이 그녀에게 돈 벌 방법이 있을 거라고, 해외에 나가서 돈을 벌어올 거라고 기대했다. 그리고 레이첼은 이제 자신의 아이도 키워야 했다. 하지만 필리핀에는 마땅히 일자리가 없었다. 그런 일자리가 있다면 애초에 한국에 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불법 사람’이 되어 살아간다는 것
1994년에 처음 한국에 갈 때와 마찬가지 이유로, 게다가 이제는 자녀 양육 부담까지 않은 채 그녀는 다시 한국행을 선택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합법적으로 한국에 갈 방법이 없었다. 한국에서 2년 넘게 미등록 상태로 체류했던 전력 때문이었다.
필리핀의 한 인력소개소 모습.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레이첼이 찾은 방법은 그레이스(가명)라는 사촌의 신분으로 한국에 가는 것이었다. 2000년인지 2001년인지 기억도 가물가물한데, 그레이스라는 이름으로 된 여권과 서류로 한국에 왔다. 부모님과 동생, 그리고 자녀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 체류를 허가 받은 2년이 지나도 그녀가 돈을 벌어서 필리핀 가족에게 보내야 하는 상황은 변함이 없었다. 더구나 사촌 신분으로 한국에 왔기 때문에, 만약 필리핀에 가게 된다면 다시는 한국에 올 수 없게 될 터였다. 해결책은 미등록 상태를 발각당하지 않고 한국에서 계속 일하는 것이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다시 임신하게 됐을 때는 필리핀에 가지 않기로 했다. 첫째 아이 때처럼 또다시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혹은 다른 방법을 찾아 한국에 올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둘째 아이의 아버지도 필리핀 사람이었다. 그 역시 아버지 노릇을 할 생각이 없었다. 설사 있었다 하더라도 한국에서 ‘불법 사람끼리 불법 아이를 낳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들지는 불 보듯 뻔했다.
둘째 아이는 태어난 지 한 달 만에 필리핀에 보냈다. 친정에서 지금까지 두 아이를 봐주고 있다. 책임져야 하는 사람이 한 명 더 늘었기에, 레이첼은 더 열심히 일하고 강제추방 당하지 않도록 신경 쓰며 살았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둘째 아이를 낳고 한국에 있는 필리핀 대사관에 출생신고를 하러 갔는데, 그녀는 레이첼이 아니라 그레이스로 살고 있었기 때문에 둘째 아이의 어머니는 그레이스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나중에 필리핀에 돌아와 둘째 아이의 출생등록을 정정하려고 했지만, 아직도 해결하지 못했다. 문제는 역시나 돈이다. 아이도 이 사실을 알고 가끔 엄마에게 따지곤 한다. 그녀가 한국에 다시 가려고 하는 이유 중에는 아이의 출생등록을 정정하는 문제도 포함되어 있다.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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