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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여자가 암이라니” 이런 반응은 이제 좀
아픈 몸, 무대에 서다② 나의 일상이 공감을 얻을 수 있을까?
질병을 둘러싼 차별, 낙인, 혐오 속에서 살아가는 ‘아픈 몸들의 목소리’로 만든 시민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배우들의 기록을 연재합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8번의 항암 치료 직후 환자복을 입은 모습이 스님 같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 나의 주도로 친구들과 스튜디오에서 부처가 된 컨셉으로 사진을 남겼다. (스튜디오 글래머샷 촬영)
아플 수밖에 없는, 그치만 아프면 내 탓이 되는 사회
늘 아프고 피곤한 몸과 마음 상태였지만, ‘사회생활’을 하면 당연히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레토릭을 우스갯소리처럼 하면서 실제로도 내면화할 수밖에 없는 게 내 현실이었다. 지친 노동과 인간관계, 그리고 짐짓 평등한 척했던 위계의 폭력에서 비롯된 상처와 피로와 무기력. 번아웃을 겪으면서도 고장 난 몸과 마음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나의 상태에 적응해버리는 게, 이 사회를 살아내는 일종의 버티기 작전이었다.
무던하게 참아내는 게 나름 장점인 줄 알았는데 아픔을 잘 감지하지 못할 만큼 고장 나 있었다. 게다가 나는 프리랜서로, 어디가 아픈지 정확한 검사조차도 부담이 되는 재정 상태로 살고 있었다. 아픔이 질병이 땅! 땅! 하고 재판 결과처럼 판정되어 버릴 미래의 막막함을 자꾸 외면하며 남몰래 모로 누워 베개를 눈물로 적시는 날들이 자꾸만 쌓여갔다. 걷잡을 수 없이 아픈 몸이 되면 ‘무능력한 사람’이라고 평가되는 사회에서, 아파서 쉬고 싶은 나의 마음이 ‘능력 없음’과 ‘의지박약’으로 치부될까 굉장히 두려웠다.
결국, 걷잡을 수 없게 되었을 때야 나는 비로소 병원을 갔다. 그리고 부담감, 불안함, 두려움 속에서 작은 쉼을 마주할 수 있었다. 이마저도 모친이 강권해 들어 둔 사보험에 의지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예술계열에서 일하는 30대 페미니스트 프리랜서 여성으로 살면서 아플 수밖에 없었던 나는, 심각하게 아프고 나서야 집중치료를 위한 잠시의 쉼을 통해 나를 힘들게 하는 것들로부터 조금 해방될 수 있었다. 그리고 아픈 몸과 삶에 대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이 생겼다.
치료보다 더 고된 건, 사회가 아픈 몸을 대하는 태도
오랜 병원 생활을 경험하면서 ‘젊은 여성 환자’가 겪은 여러 에피소드는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았다. 마냥 웃고 넘길 수 없거나 피곤함이 몰려오는 상황들이었다. ‘젊은데 아픈 여자’에게 쏟아지는 ‘불쌍하다’는 전형적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저 나름의 삶을 살아내는 ‘그럴 수도 있는 삶’이 되고 싶었다.
우선은 나 또한 아픈 몸으로 사는 삶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이 없음을 인정해야 했다. 그리고 아파도 괜찮고, 잘 아플 수 있는 삶을 위해 무엇을 말해야 하고 무엇이 필요한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프다는 것은 ‘잘못한 것’ 혹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 말이다. 왜 아픈지 그 원인을 찾아서 자책하거나 원망하는 데 시간과 에너지를 쓰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미디어나 책에서 강조하듯, 음식과 생활을 완전히 바꿔야 깨끗하게 낫는다는 이상적인 지침 이외의 것을 찾고 싶었다. 그러니까 내가 잘못해서 병에 걸렸으니, 내가 모든 것을 바꿔야 나을 수 있다는 자기계발적인 가치관과 정상성의 기준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아픈 사람들에게 필요한 ‘아픔과 함께하는 일상과 삶의 철학’에 대한 이야기는 찾기 어려웠다.
몇 년 전 병원에 입원했을 때 침대에 누워 SNS와 책을 통해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를 틈틈이 찾아봤다. 암환자의 일상을 이야기하는 채널이 유튜브와 웹툰 등에 이제 막 등장하기 시작했을 정도로, 아픈 사람들의 일상과 삶의 태도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보는 게 쉽지 않았다. 아마도 대부분은 아픈 사람들을 불편하게 느끼고, 아픈 게 나의 일이 아니길 바라며, 아픈 타인의 불행을 자신의 건강과 비교하는 식으로 대상화시키고 있어서가 아닐까. 누구든 아플 수 있으며, 예전의 건강한 상태로 돌아가지 못할 수 있음에도 말이다.
건강한 몸은 날씬하고 아름다운 몸과 등치되기도 한다. 반면, 질병은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비극의 장치로 소비되는 경우가 많다. 아플 수밖에 없게 만드는 사회에서 왜 아픈 삶의 스펙트럼은 이리도 눈에 띄지 않는 것일까. 많은 아픈 사람들이 각자의 스펙트럼으로 다양하게 삶을 영위하고 있는데 말이다.
▲ 시민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온라인 관람 신청 https://socialfunch.org/dontbesorry
병과 함께하는 삶이 슬픔과 좌절만 있는 건 아니니까요
아픈 나의 몸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처음으로 기획한 것이 있다. 바로 항암 치료 때문에 빠지는 머리카락을 삭발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하던 일이 예술 기획이다 보니, 주변 예술인 동료를 모아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에서 나의 삭발식을 생중계하는 퍼포먼스를 기획했다. 보통 사람들이 상상하는 슬픔과 눈물 범벅의 삭발식이 아닌, ‘그냥 빡빡이 여성이 된 암환자 라이프’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삭발 퍼포먼스 인스타 생중계 캡쳐. 쟤(정지혜)
굉장히 긴장되는 순간이었지만 생중계를 통해, 나의 상태를 몰랐던 사람들에게 일일이 설명하는 대신 한 큐에 나의 구체적인 상태와 소식을 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암환자의 스테레오타입에서 벗어난 나의 삶의 태도에 생각보다 많은 응원을 보내왔다.
그 이후로도 환자 택스(tax)가 잔뜩 붙은 비싼 항암모자나 답답하고 관리도 힘든 고가의 가발을 꼭 선택할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에, 최대한 다른 선택지가 있는지 찾아보았다. 주로 해외 경우긴 하지만 긴 스카프를 ‘터번’처럼 만들어 휘휘 두르고 다니는 모습을 참고해 겨울에는 주로 터번을 쓰고 다녔다. 다른 계절에는 약해진 피부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지만 모자 또한 최대한 내 마음에 드는 베레모를 쓰고 다니기도 했다. (물론 까까머리인 나는 매우 종교적인 모습으로 보이고, 베레모를 쓴 나는 인사동에서 자주 볼듯한 인상이었지만 말이다.)
입장 바꿔 생각해보면 나 또한 그랬을 테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당황스러워하고 너무 조심스러워했다. 익숙하지 않은 모습의 나, 환자인 나에게 어떤 말을 건네야 하는지, 어떻게 대해야 할지 혼란스러워했다. 우리가 아픈 사람에게 취해야 할 태도에 대한 정보나 교육을 받은 게 거의 없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놀라웠다.
이렇게 항암 기간을 보내는 동안 큰 힘이 되어준 게 있었는데,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에서 연재된 ‘반다의 질병관통기’였다. 그 연재를 통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건강권’에서 더 나아가 ‘잘 아플 권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난해 그 연재가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조한진희, 동녘)라는 책으로 출판되었다. 북토크에 참여해서 저자의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들으며, 나도 아픈 몸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되었다. 그 용기를 가지고 나는 여성의 몸에 대해 자신의 경험을 말하는 CBS ‘말하는 몸’이라는 팟캐스트에 출연했다. 아픈 여성의 몸을 향하는 시선에 대해 이야기하고 ‘맘껏 아플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제도의 필요성에 대해 설명했다.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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