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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은 오래 외로웠다
<질병과 함께 춤을>⑤ 여울을 짓는 빛들 (목우)
오래 아플 때면 몸을 만졌다. 이유랄 것은 없었다. 햇빛이 비치는 오후에, 모두가 잠든 캄캄한 밤에, 문득문득 쓸쓸한 생각이 들 때마다 몸을 만지고 나면 안정제를 복용한 것처럼 통증이 가라앉았다. 그 순간에는 내가 될 수 있는 느낌이었다. 풍경과 나, 오롯이 둘. 새소리도 길고고양이 소리도 바람 소리도 사라진 정적 속의 소통.
나는 조용한 사람이었다. 말소리도 작았고 늘 조심조심 걸었다. 삶의 한 부분이 무너져 내린다면 생의 전체가 무너져 버리는 사람, 나는 그랬다. 몸을 만진다는 것은 내 생의 일부였으나, 나는 늘 수치스러웠다. 딸딸딸. 어머니는 그런 나를 보며 비웃곤 했다. 나는 무너지지 않기 위해 스무 살 무렵부터 몸 만지는 것을 그만두었다.
딸딸딸. 스물한 살 조현병이 발병하기 전 나는 여관을 전전하고 있었다.
엄마는 내게 나가 죽으라고 했어. 아빠는 나를 만졌고 오빠는 내 목을 졸랐지.
폭언과 폭력이 반복되는 집이 싫어 여관을 돌아다닌 것인데
-거길 봐 줘. 만져 줘.
라는 가사가 나오는 음악을 반복해 들으며 절망적으로 몸을 더듬었다. 나를 사랑한다고 스스로 상상하고 위안받았던 한 뮤지션의 노래였다.
당시의 나는 알 수 없었고 혼란스러웠다. 세상의 기준을 알 수 없었다. 숨 막히는 일상 속에서 내게 단 하나의 출구였던 자위가 왜 수치가 되어야 하는지. 또한 알 수 없었다. 왜 그는 이런 노래를 부르는지. 그리고 그것이 사랑이라고 말하는지. 그래서 세상의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지. 검은 밤과 꿈틀거리는 몸. 미래도 없고 상처뿐인 과거와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터널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몸부림치는 것뿐.
“질병과 함께 춤을” 동료들이 누워 있는 내 몸의 윤곽을 그려주고 있다. 사진: 혜영
병원에서 퇴원하고 어머니와 함께 산에 올랐다.
-나는 자유다!
몇 번이고 외쳤지만 자유가 실감 나지 않았다. 서글픈 상실감 속에서 나는 의대에 가겠다며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공부를 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친구들의 객기를 함께 겪으며 웃기도 울기도 하고 그러다 다시 학교에 복학했다. 몸을 만지지는 않았으나 그때부터 얼굴이 붉어지고 호흡이 가빠왔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도색잡지를 빌려오셨다. 오빠와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재미있게 읽었다. 그리고 그 내용은 때로 내가 몸을 만질 때면 달콤한 자극제가 되어 주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부끄러웠다. 나는 어떤 자연스러운 삶의 흐름에서 벗어나는 듯했다. 단말마적인 쾌락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심한 죄책감으로 마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나는 예전보다 더 말이 없는 사람이 되어 학교에 복학했다. 한 번도 상처라는 것을 겪어 보지 않은 듯 사람들의 밝은 웃음과 목소리들. 저마다의 꿈들과 관계들로 아름다워져 가는 이들. 나는 선망하듯 그 모습들을 가슴에 담았다. 내 삶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는 채로 굳어 있던 나에게, 그녀들은 나무 위를 날아다니는 새처럼 자유로워 보였고 행복해 보였다.
알 수 없다는 깊은 절망감.
당신들의 삶이, 꿈이, 관계가, 내게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었으나 다가가고 싶었다. 조금씩 나는 다시 몸부림치고 있었다. 날기 위해 새의 깃이 돋아나듯 나도 그 삶으로 닿고 싶었다. 나는 곱고 아름다운 색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 당시의 나를 회고하는 사람들은, 내가 짙은 고동빛 같은 모습이었다고 했다.
십 년이 넘는 세월의 망상 속에서
마지막 발병 이후 채식을 시작했다. 그리고 더는 나를 만지지 않았다. 그러나 마지막 발병의 기억은 독할 정도로 나 자신을 옭아매는 사슬이 되어 열다섯 해가 넘는 시간을 괴로움 속에 보내야 했다.
그때, 혼자만의 상상 속에서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철저히 유린했으며 사랑이라는 이름을 더럽힐 정도로 불결한 행동을 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내게 남아 있는 마지막 카드를 써 버린 것이었다. 자위를 하며 떠올리곤 하던 상상을 다시는 하지 않겠노라 나에게 다짐한 이후 내가 나를 믿어 줄 수 있었던 꿈의 이름, 지순한 사랑, 해치지 않는 사랑, 서로에게 구원이 되어 주는 사랑을 스스로 처참하게 배반한 것이다.
결국 그 무엇도 아닌 더럽고 수치스런 사랑을 한 나.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환시 속에서 환시 속의 그에게 미움과 증오밖에는 남겨준 것이 없는 나. 그래서 슬프고 아픈 나. 그것이 너무도 생생한 현실인 나의 망상이었다.
내 몸에게 하는 말. 사진: 혜영
그때부터 혼자 있어도 바람 소리가 들렸다. 갖가지 비난하고 비웃고 욕을 하는 바람 소리. 여름날 내리는 빗방울 소리도, 아침의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도, 누군가의 고운 피아노 반주도, 모두 한 가지로 내게는 수치스러웠다. 그 모든 소리들이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내게는 도움을 요청할 사람이 없었다. 언제까지든 내가 만든 망상들 속에서 고통받고 괴로워하는 것 말고는.
한 사람의 삶이 이렇게 쉽게 요약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어린 시절부터의 자위, 도색잡지, 성인기의 더러운 상상, 그리고 조현병. 누군가 나의 일생을 기록한다면 이 몇 마디 말로 요약하지 않을까.
내게 어떤 꿈이 있었고 어떤 사랑을 하고 싶었으며 무엇을 이겨내고 싶었고 견뎌왔는지, 이 몇 마디의 문장은 아무 이야기도 해 주지 못한다. 왜 그 모든 것들이 좌절이었고 절망이었는지, 순진하던 꿈들이 어떻게 배반당하고 상처 입었는지.
민들레야.
부르는 빈 뜰의 목소리가 메입니다. 바람이 불어옵니다. 조그맣게 피어 있던 민들레 꽃잎들이 바람에 흔들립니다. 한 송이 한 송이의 민들레가 빈 뜰을 향해 무어라 중얼거리는 것 같습니다. 빈 뜰은 눈을 감습니다. 바람 속에 사각거리는 풀잎 스치는 소리며 민들레들의 옅은 향기가 흩날리는 것이 아주 미세하게 느껴집니다. 빈 뜰은 그 작은 소리에 가만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스물다섯 무렵, 사랑하는 사람에게 써 보내던 편지의 일부이다. 마음이 투명하게 전해질 수 있을 거라 믿었던 그때. 그러나 그 마음은 배신당하고 이제는 아픈 상처로 남아 있다. 사랑하는 이에게 처음 고백을 한 후 그의 태도는 돌변했다.
-너의 모든 메일은 보내자마자 곧장 쓰레기통으로 들어간다.
-한 번만 더 전화를 하면 스토커로 경찰에 고발하겠다.
-너, 창녀니?
나의 모든 열망을 비웃고 모욕하던 그. 그러나 그를 사랑했던 나. 십 년이 넘는 세월을 망상 속에서 오히려 내가 그를 모욕하고 상처 주었다고 여기는 아픔으로만 살아온 마흔넷의 나.
내가 아팠던 건 그에게 사랑을 주지 못하고 미움과 증오를 주어서, 그에게 끔찍한 기억을 남겨주어서였다. 그러나 그 세월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내게 연락하지 않았다. 운명처럼 사랑하던 이가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걸 받아들이기까지 나는 홀로 오래 고통받아야 했다. 그리고 현실을 인정하고 나서야 나는 다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었지만, 그를 사랑하지 않게 된 후에도 여전히 소리들은 위협하듯 나를 괴롭혔다.
이제는 내 삶의 방향키를 내가 잡고 싶다
아버지는 조현병이었다. 늘 캄캄한 방 안에서 혼자 잠을 자던 아버지. 자신의 일생을 망쳤다며 그런 아버지를 증오로 바라보던 어머니. 그리고 그런 아버지를 빼다 박았다며 어린 나를 앉혀 놓고 매일 몰아세우던 어머니. 너무 가슴이 아팠던 나. 학교에서 칭찬받고 들어와 기쁜 마음으로 문을 열면 언제나 아무도 반겨주지 않던 집. 이제는 안다. 그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 그리고 그로 인해 얻게 된 자위라는 습관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라고.
문득 몸이 하는 말이 내게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지순하기만 했던 날들이 지나 사랑을 느낄 때면 몸이 불안해지곤 한다. 얼마 전 알 수 없는 두려움 속에서 몇십 년 만에 처음으로 내 몸을 만졌다. 그리고 알았다. 사랑이란 이 순간의 고독도 감싸 안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말해 주었다. 다시는, 다시는 그러지 말자.
몸의 가장 낮은 부분을 딛고 있었을 발. 사진: 혜영
집으로 돌아와 문을 열자, 김치찌개 냄새가 현관까지 밀려와 있었다. 어머니는 오징어를 많이 넣고 김치찌개를 했으니 같이 먹자고 말씀하셨다. 스스로를 ‘가짜 비건’(vegan, 육류와 닭알, 유제품, 생선 등을 먹지 않으며 동물을 희생시켜 얻은 의류나 동물실험을 거친 화장품 등을 사용하지 않음)이라고 말하며 한동안 생선을 먹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그만두자.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던 이가 폴 발레리였나. 이제는 내 삶의 방향키만은 내가 잡고 살고 싶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너무 아팠던 날들을 놓아주고 이제는 나에게 집중하고 싶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떤 꿈을 꾸는지, 내가 손잡아 주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누구인지… 낮은 언덕에 퍼지는 햇빛처럼 춥고 가난하게 사랑을 시작하고 싶다. 그것이 한 사람을 소유하게 해 주지는 못해도 그 사람의 가슴 속에 남겨주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비어 있는 듯 충만한 사랑으로 불 밝혀지는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
지켜가야 할 것들의 목록을 적고 간소하고 단순한 생활을 하며 내 삶의 규율을 지어가는 것도 그중 하나겠다. 그러다 보면 캄캄하기만 하던 내 생의 상처에도 새 살이 돋아 오르지 않을까. 땅을 가르는 지진의 진원지처럼 끊임없이 내 삶에 출현하는 끔찍한 형상들도 그즈음이면 신나게 한바탕 놀 수 있는 친구들로 변해 있지는 않을지.
내 영혼 속에 고통이 키운 빛이 있을 것이다
내 몸은 오래 외로웠다. 그러나 나는 내 몸을 위로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내 몸을 위로하려면 먼저 나는 사랑을 알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먼 길을 돌아 나는 사랑으로 회귀한다. 사랑은 누군가에게서가 아니라 내 속에서 찾아지는 것이었다. 물결이 해변의 모래알을 스쳐 가고 남겨져 있는 수많은 언어가 사랑이었다. 그렇게 변화하면서도 무한의 흔적을 품은 언어. 그러나 미세한 모래알처럼 섬세한 언어.
누군가의 작은 흔적들에 민감해지는 것이 나는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일상의 순간순간이 그처럼 부드럽고 무한해지기를. 우린 비록 몸 하나의 존재이지만 말이다. 너무 큰 상처로 오래 휘청거려서일까. 이제는 삶을 수놓고 있는 작디작은 변화를 감지하며 세밀하게 감정의 흐름과 소통을 지켜보고 싶다. 세상은 단조롭고 많은 순간 폭력적이지만 그 배면에 흐르고 있는 우리 영혼들의 슬픔과 연대함으로 이루어내는 기쁨을 그려보고 싶다.
먼 길을 돌아 나는 영혼을 발견한 것일까. 그 작은 흔적들에 민감해지기로 하며 나는 나의 하루를 시작한다. 아마도 이제 나는 혼자임을 받아들이겠지만 그것이 빛 한 줄기가 꺾어질 때의 하나임을 안다. 빛이 무언가에 닿아 꺾어질 때 색깔이 번지듯, 나의 무릎이 꺾어졌을 때 내 영혼 속으로 번지는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분명 고통이었으나 느리고 연약한 달팽이가 작은 나뭇잎 하나에 매달려 끝없이 되새김하듯 그 좁디좁은 세계의 응축되어 있던 고통이 키운 것이 있을 것이다.
어둠을 먹고 조금씩 번져가는 달빛처럼 이제 여러 개의 빛이 모여 한마음으로 빛의 여울을 만들 때, 이제 나는 그 어룽거리는 한 점 빛이고 싶은 것이다. 산타 루치아. (목우)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 세상을 바꾸는 작은 변화, 이 연재는 <아름다운재단> 지원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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