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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몸들이 많아도 ‘질병 서사’가 적은 이유
<질병과 함께 춤을>⑦ 아픈 몸들의 낭독극을 준비하며
적지 않은 이들이 질병 경험을 숨긴 채 살아간다. 사회의 모순적 태도 때문이다. 사람들은 가난할수록 아프고, 고용이 불안정할수록 아프다는 건강 불평등 현실에 고개를 끄덕인다. 동시에 주변에서 누군가 암 진단을 받았다고 하면 ‘짜게 먹어서’ ‘술을 많이 마셔서’라며 개인의 생활 습관을 손쉽게 원인으로 ‘진단’한다. 질병을 개인의 문제로 환원하는 ‘질병의 개인화’가 내면화된 사회이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시대가 건강을 스펙으로 만들면서, 아픈 몸을 자기관리에 실패한 사람의 몸으로 만든 결과이기도 하다.
아픈 몸들은 아직도 가시화되지 않았다
한국은 강도 높은 노동, 고도의 경쟁, 오염된 생태계, 불안정 고용, 차별과 혐오 속에서 너나 할 것 없이 크고 작게 아플 수밖에 없는 사회다. 3명 중 1명이 암에 걸리며, 그보다 많은 사람이 만성질환과 함께 사는 사회다. 하지만 아픈 몸들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질병 경험이 낙인이 될까 봐, 아프다는 게 자기관리 실패로 여겨질까 봐, 취업이나 업무상 차별이 두려워서, 아프다고 말하는 게 구차해서 그리고 아픈 몸을 설명할 언어가 부족해서 제대로 말하지 못한다.
<질병과 함께 춤을> 모임에서 몸의 통증을 의인화하여 포스트잇으로 대화하고 있다. (사진: 혜영)
이처럼 한국은 질병 경험이 드러나지 않는 사회이다 보니, 아픈 몸들에 대한 차별을 비롯한 ‘질병과 인권’은 아직 사회적으로 충분히 의제화되지도 못했다. 마치 오래전 성폭력 피해나 임신중단 경험이 사회적 낙인으로 인해 가시화되지 못함으로서, 사회적으로 의제화되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아픈 몸들의 현실을 가시화시키는 게 질병과 인권 운동의 토대를 만들어가는 과정임을 자주 강조해왔다. 그 주장에 동의하며 자신의 질병 경험을 꺼내고 싶지만, 주저하게 된다는 아픈 몸들이 있음을 뒤늦게 알았다. 중증의 질병도 아닌데 말해도 될까 다시, 검열한다는 것이다.
질병의 중증도는 의학적 판단에만 있지 않다. 의학적으로는 생명의 위협 정도가 질병의 중증도겠지만, 이뿐 아니라 삶의 질에도 존재한다. 질병으로 인해 삶의 질이 극심히 훼손된다면 그게 바로 본인에게 중증의 질병이다. 물론 중증의 질병이 아니어도 질병 경험을 말하는 것은 중요하고 의미 있다. 우리는 각자 고유한 어려움과 살고 있으며, 고통의 올림픽을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 상황에서는 중증이든 아니든 잘 안 들렸던 목소리가 들리는 게 중요하다. 이를테면 모호한 몸들의 질병 경험이다.
노동을 하고 있지만, 기대받는 건강한 노동자의 몸에 ‘미달’하는 존재들. 노동을 하기엔 아프고, 치료에만 매달리기엔 건강한 애매한 몸들. 존중받지 못하는 통증과 스스로도 다 인지하지 못하는 증세들. 낙인과 차별 속에서 숨기게 되는 병명들. 의료권력으로부터 병명을 부여받지 못해서, 아프지만 환자는 아닌 몸들. 산업재해지만 산재로 인정받지 못하는 질병들, 투쟁에 승리해서 산재로 인정받았지만 막막하기만 한 미래와 불안들. 아프지만 쉴 수 없어서 기를 쓰며 겨우 노동을 지속하는데, 할만하니까 하는 거라며 고통과 노력을 무시당하는 몸들. 여러 경계에 놓여있는 흔들리는 몸들이다.
질병 경험을 발화하고 해석하는 것의 의미
우리는 타인의 질병 경험을 경유해서 겨우 자신의 삶을 보는 경우가 많다. 타인의 질병 경험을 들으며 위로를 받는다. 본인에게는 미처 언어로 정리되지 못하고 감각과 단어로만 떠다니던 느낌이었는데, 누군가는 그 느낌과 경험을 붙잡아 질병 서사로 풀어낸다. 타인의 질병 서사를 읽으며 자신의 삶에 언어를 부여받은 것 같은 희열을 경험한다.
발바닥이 간지러운데 어디가 간지러운지 정확히 모르겠고, 긁어도 시원하지 않던 게 해소된 느낌이다. 혹은 ‘관종’(관심종자, 타인의 관심을 받고 싶어하는 욕구가 지나친 사람들을 칭하는 은어)이라고 여겨질까 봐 조심스러워 삼켰던 말이나, 공개적으로 꺼내기 두려웠던 말들을 꺼내는 것을 보고 용기를 얻는다. 자신의 고통에 갇혀 있느라 미처 타인의 고통을 보지 못했음을 깨닫기도 한다. 다른 이의 질병 경험을 통해 자신의 아픈 몸과 삶이 확장된다.
<질병과 함께 춤을> 모임 구성원들이 연극 워크숍에서 서로의 손을 맞잡고 눈을 감고 걷고 있다. (사진: 혜영)
질병 경험 듣는 것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벅찬 경험은 말하기다. 자신의 질병 경험을 관점을 가지고 정리해서 발화하고 나누는 경험을 하다 보면 새로운 자신을 만난다. 아프기 전에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아프기 전에 느꼈던 자신의 몸에 대한 감각과 세상에 대한 감각에 대해 다시 보게 된다. 질병에 대한 불안이 자신의 삶을 자주 흔들기 이전의 세계, 그 당시처럼 삶이 ‘복원’되는 느낌. 지금 이대로의 몸이 괜찮다는 감각. 몸에서 질병과 통증이 사라지지 않아도 지금 이대로 괜찮다는 안온함을 만나기도 한다.
물론 이는 단순히 질병 경험을 발화하고 주변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어떤 과정을 관통하느냐가 중요하다. 자신의 질병 경험을 둘러싸고 있는 자책감이나 죄책감 그리고 거의 동시에 맞물려 있는 억울함이나 우울감. 그 감정들은 분명 자신 안에서 흘러나왔지만, 정말 자신의 감정이었나 돌아보는 과정을 밟을 때, 질병 경험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 좀 더 선명해진다. 어떤 현실이 그런 감정을 생성시키고 흘러나오게 했는지 질문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질병 경험을 파편화된 개인의 경험으로 읽지 않는 과정이다. 타인의 질병 경험 속에서 자신의 기억을 비춰 보고, 사회적으로 질병을 해석해 낼 때 다르게 재구성된다. 삶이 재해석된다. 성별, 빈곤, 고용, 주거, 계급, 연령, 장애, 차별, 혐오, 낙인 등은 질병 경험을 다양한 방식으로 굴절시킨다. 그 굴절을 면밀하게 살펴보면,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어떻게 개인의 삶으로 구현되는지 확인하게 된다. 이 과정 속에서 질병 경험은 기존과 다른 방식으로 정렬되고 배치된다.
아픈 몸들이 연대하기 위한 장을 만들자
<질병과 함께 춤을> 동료들도 그랬다. 질병은 우리 몸을 변화시켰고 고통을 주었고 삶이 뒤틀리게 만들었다. 질병은 몸에 대한 다른 감각을 주었고, 또 하나의 소수자 정체성을 추가시켰다. 정상에서 빗겨 난 몸으로 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배우게 했고, 삶의 태도를 바꾸게 했다. 질병은 우리 삶을 다른 곳으로 안내했다. 지도 없는 세계로 내던져진 것 같았지만, 우리는 아픈 동료들과 서로의 질병 경험 속에서 새로운 지도를 만들어가고 있다.
완성될 수 없는 지도일 것이다. 우리의 몸은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의 몸은 어떤 식으로도 안정화 되지 않고, 삶도 그렇다. 그럼에도 아픈 몸으로 어떻게 삶을 살아 낼지 함께 지도를 만드는 행위가 주는 안정감과 위로는 말로 다 할 수 없다. 우리는 이번 연재를 통해 질병과 함께 사느라 고통스러웠던 시간과 경험이 쓸모없는 게 아님을 새삼 확인했다. 우리의 ‘앞선’ 고통이 뒤에 오는 이들의 등불이 될 수도 있음을 종종 서로에게 환기한다. 더 많은 이들이 질병 경험을 발화하길 바란다.
이번에 <질병과함께 춤을> 연재 시즌1을 마무리하면서, 아픈 몸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발화할 수 있는 확장된 장을 열고자 한다. ‘다른몸들’(질병, 젠더, 장애, 민족, 계급, 종차별 등의 문제를 교차적으로 고민하는 활동가 그룹)과 ‘인권연극제’(차별의 논리를 거부하는 사람들, 인간의 당연한 권리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무대)가 함께 <아픈 몸들의 질병 서사로 만들어지는 낭독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를 준비하고 있다. 아픈 몸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할 공간이 부족하고, 사회에는 질병 서사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아픈 몸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깊이 있게 들어줄 청자를 만나기 어렵고, 마음 밖으로 나오지 못한 이야기들은 마음에 고여 또다른 고통을 만들기도 한다. 마음에 갇혀 있던 이야기를 만나게 하자. 잘못 살아서 아픈 거라는 자책감, 아파서 주변 사람들에게 민폐가 되고 있다는 미안함을 버리고, 질병 경험을 말해보자.
<아픈 몸들의 질병 서사로 만들어지는 낭독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참여자 모집 웹자보. 출처: 다른몸들
<아픈 몸들의 질병 서사로 만들어지는 낭독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는 아픈 몸들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전문적 연기나 공연 능력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누구나 참여할 수 있도록 자신의 질병 경험을 써서 낭독하는 형식을 기본으로 설정했고, 그 외 여러 방식을 열어 두었다. 노래나 랩으로, 춤이나 퍼포먼스로, 사진이나 영상으로 그리고 각자가 원하는 그 어떤 방식도 가능하다.
다양한 시민들이 자신의 질병 이야기를 소박한 무대 위에서 마음껏 펼쳐볼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의 질병 경험을 발화하고 재해석한다는 것은 몸을 재해석한다는 것이며, 결국 우리 삶을 재해석한다는 의미다. 마음에 고여 있던 질병 경험을 둘러싼 이야기를 꺼내고, 연결되고, 연대하고, 회복하고, 변화하고, 변혁하자. 서로의 용기와 환대 속에서 마침내 온전히 존재하자.
우리 사회에 절실한 질병 서사
질병 경험을 말하는 행위는 본인에게도 중요하지만, 우리 사회에게 절실한 행위다. 아픈 몸에 대한 무지를 이루다 설명할 수 없는 사회다. 난독증 있냐는 말이 조롱의 ‘농담’이 되고, 아픈 이들에게 어떻게 건강을 관리했길래 실패했냐는 ‘비난’은 그칠 줄 모른다. 최근 코로나19 감염자들에 대해 비난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그들은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이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환자임에도, 그들의 고통에 주목하기보다 그들 자체를 바이러스 취급하기도 한다. 우리 사회 질병과 인권 수준을 여실히 드러낸다. 질병 윤리가 얼마나 남루한 수준인지 새삼 확인하게 된다.
이런 현실에서 질병 경험을 사회에 드러내는 것 자체가, 질병을 둘러싼 조야한 인권 현실에 개입하고 변화를 만드는 행위일 수밖에 없다. 사회는 질병 경험자들의 현실에 무지하고, 무지하기 때문에 과감히 무례할 수 있다. 우리가 질병 경험을 말함으로써 사회에 만연한 질병을 둘러싼 편견, 무지, 오지랖에 균열을 낼 수 있다. 아파도 괜찮은 사회, 질병권(疾病權)이 보장되는 잘 아플 수 있는 사회를 만들자. 바로 우리의 경험과 목소리로. 조한진희(반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 낭독극 행사 내용과 참여 신청: 다른몸들 페이스북 페이지 https://facebook.com/damom.a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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