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삶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선택하는 이가 없도록

<질병과 함께 춤을>④ 질병과 성폭력 그 자연스러운 연결고리 (혜정)



죽음은 문득 결심하게 된 것이었다. 이상한 말이지만, 당시의 나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그런 결론에 도달했던 것 같다. 신경정신과 약만으로는 나를 압도해버린 그 고통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수면제를 들고 한강으로 향하던 길은, 이제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었다. 부인하거나 도망치려 해도 도무지 사라지지 않는 것들을 없애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나는 내가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선을 넘어버렸다 생각했고 문득, 채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 여름이었고,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맑고 화창한 날이었다.


<질병과 함께 춤을> 모임에서 (혜영)


성폭력, 데이트폭력 경험과 ‘류마티스’


2017년 여름, 전 애인과의 긴 법적 소송을 끝냈다. 애인은 내가 질병이 발생하기 1년 전에 만난 사람이었고, 질병을 거치면서 몇 년간 내게 폭력을 행사했다. 애인의 폭력은 내가 ‘류마티스’라는 진단명을 받던 날로부터 걷잡을 수 없어졌다.


멈추지 않는 애인의 폭력과 없어지지 않는 통증 가운데서 절망하던 당시의 나에게 고통을 없애는 유일한 방법은 나의 몸을 없애는 것이었다. 통증도, 애인의 폭력도, 내가 어쩌지 못하는 것들에 떠밀려 나는 그런 결론에 도달했다. 30킬로그램대의 몸이 다량의 수면제를 이겨내지 못해 정신을 잃었고, 나는 그렇게 살아남았다. 이후 폭로와 소송이라는 기나긴 과정을 거쳐오고서야 나는 비로소 그 시간들의 비참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올 수 있었다.


‘류마티스’는 자가면역질환이다. 내 면역세포가 나를 공격하는 것이다. 막다른 골목에서, 내가 나를 없애려고 했던 것과 같이 나의 몸은 내 안에서 나를 죽이고 있었다.


나는 성폭력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 속에서 애인을 만났다. 가해자는 조직 내 상급자이자 선임이었다. 나는 조직을 위해 그의 주거침입 시도와 지속된 추행을 주요 사업이 마무리될 때까지 함구했지만, 가해자에 대한 징계를 조직에 요청함과 동시에 몇몇 간부는 내게 전쟁을 선포했다. 운동 사회 내 성폭력 대개가 그렇듯 내 성폭력 사건도 전형에 가까운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조직 보위에 의한 2차 피해, 항변, 고립, 가해자의 거짓말 등 나는 수많은 운동 사회 내 성폭력 피해자들이 겪었을 일들을 고스란히 겪었다. 가해자가 징계를 받았지만 나는 만신창이가 된 마음으로 얼마 후 조직을 탈퇴하였다.


애인은 당시 성폭력 사건에서 나를 돕겠다고 나선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폭력적인 사람이었다. 그의 폭력성은 처음에는 나를 추행한 가해자들을 향하더니, 사건이 장기화되자 점차 나를 향하기 시작했다. 폭력 행동 후 스스로를 비하하면서까지 그가 내게 사과했던 관계의 초기에 나는 그에게 연민을 느꼈다. 자신의 폭력이 오랜 운동경험 속 상처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그의 해명을 믿었다. 나는 그와 헤어질 시기를 그 연민 때문에 놓쳤다.


나는 하루에 열두 번도 더 그에게 분노와 공포를 번갈아 느꼈고, 온몸의 피가 다 타서 증발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어느 순간부터였을까. 연민과 분노를 오르내리면서 몸은 마침내 스스로를 죽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 끔찍하고도 반복적인 성폭력, 데이트폭력 경험들이 나를 질병에 다다르게 했다고 믿는다.


여성들의 극심한 스트레스 경험과 질병의 인과관계


의사는 자가면역질환이 원인 불명이라고 설명했다. 나의 경험들과 질병 사이의 인과관계를 확신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원인 불명은 원인이 불명확하다는 것이지, 원인이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질병의 시간을 지나오면서 나와 같거나 유사한 질병을 가진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몸의 위치만 다를 뿐, 그들은 모두 자신의 면역세포가 스스로를 공격하는 병을 앓고 있었고, 여성들의 경우 대개가 극심한 스트레스 경험 후 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나는 그 이야기들을 들으며, 폭력적인 경험에 맞닥뜨렸을 때 상대를 해하기보다 스스로를 해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들이 떠올랐고 자가면역질환의 기전과 자연스레 겹쳐졌다.


환우회 카페에서도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여성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녀들 모두 극심한 스트레스 경험 후에 류마티스 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아마 그 극심한 스트레스 경험 중 성폭력 경험도 분명 있을 것이다. 내가 나의 반복된 성폭력 경험을 ‘스트레스 경험’이라고 그 카페에 써넣었던 것처럼 그녀들도 그런 경험들을 그곳에 다 이야기하기는 어려웠을 테다.


그녀들 가운데 일부는 스스로를 비관하거나 탓하면서 자살 충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성폭력 사건 속에서 여성들이 자신에 대한 비난을 내면화하듯, 스스로를 공격하는 과정은 면역질환의 증상과 닮아있다.


환우회 카페에 사연을 올린 이들 가운데 정상가족 내의 여성들은 류마티스 진단 후에 남편으로부터 다양한 종류의 폭력을 경험하고, 자신의 통증이나 질병 증상에 대한 호소를 가족들에게 묵살당하기도 하며, 직장에서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했다. 가사노동이나 육아 역시 그녀들이 질병이 있다고 해서 면제되지 않았다. 질병과 그 질병으로 인해 더해지는 일상의 무게까지, 그 모든 것을 고스란히 감당하면서 삶을 살아가야 할 때 질병은 여성들에게 마침내 너무나 무거운 짐이 되고 마는 것이다.


죽음이라는 화두


애인과의 소송을 하는 2년간, 그 엄청난 지옥을 지나오면서 나의 최대 목표는 죽지 않고 일상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나는 끝끝내 살아남아 그 사람과의 싸움을 끝내고 싶었다. 다 인지하기도 어려운 종류의 고통에 둘러싸인 채, 나를 죽이고 싶다는 충동을 누르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의지를 지켜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통증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시공간은 점점 더 축소되었다. 당시의 나는 스스로를 지탱하지 못할까 봐 나의 고통을 들여다보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집으로 들어가기가 두려워 집 앞 횡단보도 근처를 한없이 배회하기도 했다. 그 횡단보도로 가는 길 위에서 공황발작을 자주 경험했다. 당시에는 인지하지 못했지만, 그 공포의 정체는 집으로 들어가면 스스로의 고통에 직면하여 마침내는 내가 나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그런 종류의 것이었던 것 같다.


또 가해자가 나를 죽이기 위해 집 앞 도로변에 차를 대고 기다리거나 흉기를 들고 건물 입구에서 기다릴지도 모른다는 공포도 나를 괴롭혔다. 그런 상황이 발생했을 때 죽어가는 순간에도 정신을 차려 녹음기를 켜거나 경찰에 신고하기 위해서 자주 연습했다. 가끔 위기상황에 112가 눌러지지 않아 애를 먹는 꿈을 꾸다가 잠을 깨곤 했다.


일상 가운데 잠이 들기 위해 애쓰는 시간과 공황에 시달리는 시간, 불안과 싸우는 시간, 내가 어딘가에서 갑자기 죽임을 당하거나 죽지 않으리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인지시키는 시간, 무엇보다 통증과 우울이 범벅된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기 위해 애쓰는 시간이 점점 늘어갔다.


마디마다 부어 버린 손가락과 손목. (혜정)


죽음은 당시의 나에게 수많은 형태로 나타난 공포의 원인이자 거의 유일한 화두였다. 자살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후 나는 자살 충동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다. 이 모든 괴로움들이 언젠가는 끝날 것이라고 되뇌면서도 나는 그것들이 끝나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었던 것 같다.


질병은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고, 열이 올라 아침저녁으로 체온을 재야 했으며(의사는 열이 39도 이상 오르거나 통증이 심해질 경우 응급실로 오라고 했다), 관절들은 늘 벌겋게 부어있었다. 재판을 기다리던 어느 여름엔 손 쓸 새도 없이 양쪽 팔꿈치가 서로 조금 다른 각도로 굽어버렸다. 이런 나를 가족들에게 보이는 것이 두려워 나는 2년 동안 집에 내려가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끝날 것 같지 않던 소송이 끝나자, 나를 기다리던 할머니가 문득 돌아가셨다. 기나긴 고통의 여정 중 하나에서 벗어나자마자, 나는 내가 사랑해마지않던 이의 죽음과 맞닥뜨렸다. 죽음은 고통을 해결하는 방식도 무엇도 아닌 그저 사라지는 것이었다. 할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나의 자살 충동은 사라졌다. 너무도 갈망하던 것이 사랑하는 이의 죽음으로 닥치자, 비로소 나의 죽음도 그 수많은 3인칭의 죽음으로 한 발 멀어졌다.


그리고 온전히 황량한 현실 속에 발바닥을 붙이고 맨몸뚱이로 서 있는 나를 생생하게 자각했다. 나는 질병과 트라우마를 가진 여성 활동가다. 그리고 영영 할머니를 만날 수 없다. 나는 이와 같은 현실을 온전히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다시 출발해야 함을 생각했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상담선생님 앞에서 많이 울었다.


누구나 삶의 어느 순간 질병을 만날 수 있다


질병을 가진 이들이 만나 서로의 고민과 문제의식을 나누는 ‘질병과 함께 춤을’ 모임을 하면서 나는, 죽음을 거부하기 위해 억지로 설정했던 내 희망의 정체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그것은 현실이 아닌 단지 ‘질병 이전의 삶’을 향해 있었다. 그리고 내가 그 희망으로부터 왜 매번 좌절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깨달았다. 불가능의 영역을 희망으로 설정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사회가 가진 질병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과도 멀지 않다. 사회는 질병의 목표를 ‘완치’로 설정하고, 질병인에게 그것을 요구한다. 치료법이 없는 질병을 가진 경우도 마찬가지다. 시한부 판정을 받지 않는 이상, 치료약이 없음에도 개인이 노력하면 나을 수 있으리라고 말한다. 나 역시도 자연스럽게 이 고정관념 속에서 나의 희망을 설정했다.


나의 몸은 이제 ‘낫는다’는 단어가 적용되지 않는다. 질병이 없었던 몸은 이제 내가 도달할 수 없는 무엇이다. 성폭력 경험과 데이트폭력 경험이 없었던 나로 돌아갈 수 없듯이.

 

<질병과 함께 춤을> 워크숍에서 나의 몸이 하는 말을 듣고 있다.(혜영)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조한진희, 동녘, 2019)에는 성폭력과 데이트폭력 피해 경험과 질병의 인과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저자는 성폭력 피해자의 피해경험을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상처’로 인식하고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사회가 피해자들로 하여금 그 경험과 함께 살아가기 어렵게 만든다고 이야기한다. 나의 경험도 그러했다. 나는 이런 피해경험들이 내 몸을 더욱 취약하게 만들어 질병을 발생시키고, 이미 있는 질병도 악화시켰다고 생각한다.


나는 타인들에게 내 질병이 낫기 어려운 것임을 설명하고, 성폭력 피해경험이 내 질병에 영향을 미쳤음을 설명하고, 트라우마와 질병이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지만 또 이 모든 것들이 함께 있는 존재가 나임을 설명하고 또 설명했다. 이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들을 과거로 흘려보내고 현재를 살아가고 싶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이것들을 극복하지 못한 것이 나의 나약함 때문이 아니며, 내가 현재 경주하고 있는 노력들은 극복을 위해서가 아닌 지금의 나로 온전히 살아가기 위함이라고도 설명했다.


나는 앞으로도 이런 이야기를 할 것이다. 내가 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절망을 느끼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가면서 살아나가고 싶다고.


우리는 누구나 삶의 어느 순간 질병을 만날 수 있다. 이 모든 고통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비로소 삶임을, 그것이 실패한 삶이 아니며 누구에게든 찾아올 수 있는 삶임을, 그 삶을 살아낼 수 있도록 서로가 함께 애써야 함을 우리 모두가 인정해야 한다.(조한진희,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동녘, 2019) 질병을 가진 몸이 그 자체로 온전히 살아갈 수 있도록, 불가능한 것들을 붙들고 좌절하지 않도록 사회구성원 모두가 노력해야 한다. 어느 날 문득, 누군가가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해 죽음을 선택하지 않도록 말이다.  (혜정)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 세상을 바꾸는 작은 변화, 이 연재는 <아름다운재단> 지원으로 작성되었습니다.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   2024/10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